#1
이우정, 신원호 콤비가 만드는 드라마를 참 좋아합니다. 모두가 한 번씩은 주인공이 되고, 시청률 붙잡기용 악다구니도 없으며, 선과 악은 있되 결코 무겁지는 않은 이야기들. 아무 때나 어떤 에피소드를 펼쳐도 앞뒤가 궁금하지 않죠. 뭣 모르고 멋 부리던 대학 시절, 응답하라 1994, 유년의 우리 ‘동네 ’이야기, 응답하라 1988, 자취방에 산만하게 널브러진 친구들과의 수다 또는 침묵 같은 슬기로운 의사 생활, 이우정과 신원호는, 기억, 그걸 차지게 불러냅니다.
#2
아내가 나물을 무쳐 비빔밥을 만들었습니다. 이틀 동안 점심, 저녁으로 내리 먹은 뒤에도 열 끼는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내의 취나물은 장모가 무치는 취나물 맛입니다. 아내는 장모에게 나물 무치는 방법을 배운 일이 결단코 없습니다. 제가 십 년 지켜봤는데 둘 다 서로 뭘 가르치거나 배울 타입이 아니거든요.
십 년째 식구들 생일마다 끓이는 제 미역국은 자꾸 엄마 미역국 맛을 닮아갑니다. 제가 부엌에서 칼질을 하기 시작한 건 결혼한 다음부터죠. ‘고기는 이만큼만 볶으면 될 거야. 참기름은 충분히, 내일 저녁까지 먹을테니 마늘은 굵은 놈으로 네 알쯤 으깨 넣으면 되겠지. 에이 몰라. 소금보다는 조선 간장이 낫겠네.’ 제 혀와 코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레시피로 가공되어 두 손으로 전달됩니다. 아내의 나물도 그렇게 탄생했을 겁니다.
#3
기억이 한낱 과거일 뿐이라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산다 말하는 오늘 우리도 여전히 지난 시간을 끊임없이 불러내죠. “내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왕년에서 걸걸한 과장 조금만 덜어내면 저의 내일보다 훨씬 진한 이야기들이 있을 겁니다. 삼십 년 전 장인이 아내에게 사 준 책을 읽던 아들이, 아빠, 이 사람 누구야 하며 사진 두 장을 내밉니다. 각각 다른 유니폼을 입은 장인의 증명 사진들입니다. 올겨울 만날 장인은 두 장의 사진에서 과연 어떤 왕년을 불러낼까요?
#4
신은 인간에게 기억과 망각이라는 기가 막힌 능력을 함께 주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막았다지만, 혹시 기억이란 능력을 만들어놓고 보니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 대신 기억을 잠깐 물리쳐 둘 곳만 만들어 놓은 건 아닐까요? 잊은 줄 알았던 6년 전 오늘이 갑자기 생각나는 것처럼 말이죠. 잊지 않겠다 다짐하지 않아도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