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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Apr 14. 2020

옵션

3년 좀 넘게 쓴 아이폰을 새 모델로 바꿨습니다. 카메라 렌즈 세 개 달린 놈이 있고, 두 개 달린 놈이 있더군요. 하나는 한 손에 편안하게 쥘 수 있는 크기, 다른 하나는 아슬아슬하고 나머지 하나는 가로로 눕히는 순간 ㅅ, ㅎ, ㅍ 들어간 글자는 못 쓸 크기였습니다(아내에게 ‘사랑해’ 문자를 못 보내는 게 가장 큰 문제군요). 프리미엄 색상이라 이름 붙인 (제 관점에서) 우중충한 색만 입힌 것이 있는가 하면, (이 또한 순전히 제 감각에서) 쉬이 질릴 만큼 쨍한 색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모델이 있었습니다. ‘화질 걱정 없이 그대로 두 배 당겨 찍을 수 있다면 아내 찍어줄 때 좋겠는데?’ 와 ‘그냥 가까이 가서 찍으면 되잖아’ 사이, ‘영상 볼 때 좋겠네’ 와 ‘에이, 곧 노안 오면 어차피 멀리 놓고 볼텐데, 뭐’ 사이, ‘자꾸 보니까 비싼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하네’ 와 ‘나이에 어울리게 보라색 한 번 가 봐?’ 사이, 기껏 세 모델 뿐인데 고르는 데 일주일은 걸린 모양입니다.


많은 옵션이 사라졌지만 밥 하기 귀찮을 때 선택지가 여전히 밥 해먹는 일 뿐이라는 것 빼곤 답답한 것은 없습니다. 이발소에 가지 못하는 차에 오랜만에 머리를 길러볼까 합니다. 어른들과는 놀 수 없으니 아이들이 무슨 게임을 하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둘이 놀 때 뭐라고 떠드는지 끼어들어 봅니다. 아이들이 저와 놀아주는 기분입니다. 테니스도 수영도 언감생심이니 동네 구석구석을 달려봐야겠습니다. 아내에게 저항 밴드 운동을 가르쳐봤는데 또 하잡니다. 하루 쓰는 글의 양은 비슷함에도 남는 시간이 생겨 무료 인터넷 수업 몇 개를 등록했는데 더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사진 찍기와 편집 수업이 제일 재미있습니다. 아내에게 DSLR을 사달라 해볼까 싶었지만 네, 사주지 않을 겁니다. 새로 산 아이폰을 DSLR처럼 써야겠습니다. 달리다가 찍고, 아내와 달고나 마시면서도 찍고 설거지 하다가도 찍고 찍으니 건질 컷들이 제법 있습니다.


문장으로 증례할 순 없지만 아이들은 더 발랄하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딸은 다 쓴 두루마리 휴지 틀, 날이 따뜻해져 아내가 정리해두려던 스카프, 프링글스 빈 통을 가져다가 자꾸 뭘 만듭니다. 필통도 만들고 노트도 만듭니다. 아들이 툭 던지는 농담이 마침내 웃깁니다. 우스운 농담을, 그것도 꽤 자주 합니다. 아빠를 무서워만 하는 줄 알았던 녀석이 저를 불러 세워 놓고 훈계를 늘어놓는군요. 두 녀석 모두 제가 일하는 방에 와 뽀뽀도 자주 해 줍니다. 엄마, 아빠 90년대 감성에 맞춰 춤도 춥니다. 학교도 갈 수 없고 친구들도 만날 수 없으며 베를린 역사 여행도 갈 수 없지만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여전히 팔방으로 뻗습니다.


남들 다 듣는다 하여 따라 신청했던 경제학 원론 첫 시간 주제, ‘선택과 기회 비용’의 문제를 너무 무겁게 끌고 온 걸까요? 비교하면서 흘려 보낸 시간은 무시한 채 스스로를 대단히 까다로운 결정을 해야 할 중차대한 인물이라 여겨왔던 걸까요? 그렇게 내린 결정들이 아직 다다르지 않은 시간과 밟지 않은 공간에서 대단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꽤 단순하다 여긴 제 삶에도 일일이 잡아낼 수 없는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나봐요. 이 다채로운 세상에서 제게 주어진 자유라 여겼던 수많은 옵션들이 사라진 지금, 오히려 더 자유롭습니다.


뒷마당에 하얀 사과꽃이 만개했습니다. 지난 겨울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을 잘라내지 못한 덕택에 이웃 담장 너머까지 뻗었군요. 화려하고 찬란한 사과꽃이 진 자리에 열매들이 매달릴 겁니다. 사과 나무는 너무 많은 꽃을 피운 탓에 채 영글지 못하고 떨어질 열매들을 아슬아슬 매달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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