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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수 Oct 16. 2020

경애 씨의 책장

당신에게 나에게 남긴 책들을 





아랍 슈퍼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한 프랑스 할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신기하게도 그냥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눈인사를 하고,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가 너무 얇고 희미해서 한 발짝 더 다가가야 했어. 아주 오래전 할머니 집에 들어갔을 때의 살짝 콤콤한 냄새가 그의 바랜 셔츠에서 나는 것 같았어. 그는 자신의 아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했어. 그리고 죽었다고도 바로 덧붙였지. 이사를 가려는데 그녀가 남긴 짐 중에 한국어로 된 책이 많아서 혹시 받아갈 생각이 없느냐는 거야. 우리는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헤어졌어. 그의 작은 목소리가 귀에서 웅웅 남은 상태로.


그러고는 집으로 가서 고민했어. 현대인으로서 응당 떠오르는 생각들.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혹시 봇짐을 들어달라고 부탁한 할머니를 따라가다 납치를 당했다던 한국의 귀담처럼 어디론가 잡혀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도 아주 잠시 생각했지. 이상하게도 무섭지는 않았어.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매우 가까운 그의 집 주소와 현관 코드까지 적은 긴 메시지가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걸었어. 이래저래 다른 날 약속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오늘 밤도 괜찮으냐고 그가 물어봤어. 지금 본인은 다른 곳에 있지만 그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사 준비로 이 곳에 살고 있지 않으니 돌아갈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우리는 8시 반으로 시간을 정하고 내가 찾아가기로 했지.


정확히 걸어서 3분 거리의 집이었어. 항상 누가 저런 곳에 살고 있을까 라는 작은 의문을 품게 해 주는 건물 중 하나였는데, 코드를 누르고 훈기를 품은 로비를 지나 4층으로 올라가니 바로 그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어. 넓은 거실에는 아직 채 정리되지 못한 짐들이 조금 쌓여있고 한구석에는 열댓 개 정도의 박스에 책들이 담겨있었어. 할아버지는 자신은 한국어를 읽을 수는 있지만 그 의미는 이해하지 못하니까 가능하면 다 가져가 주면 좋겠다고 말했어. 원한다면 몇 번 책을 가지러 와도 된다고. 그가 말한 대로 상자별로 책들이 아주 많이 남아있었거든. 
거실 벽 쪽에 여러 청동 조각들이 있었는데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녀가 아티스트였다고 했어. 조각 작업을 했다고. 그녀의 이름은 경애라고. 할아버지 입에서 나온 경애, 라는 두 글자만은 또렷이 한국어로 발음되었어. 


종교서적과 소설, 시집, 언론 잡지, 교육서. 책들은 무작위로 담겨있었기에 상자 하나하나를 뒤적여 보는 수밖에 없었어. 박경리 토지 같은 시리즈 책들도 다 다른 상자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 세월에 갈변한 바랜 책들부터 아주 최근의 책들까지. 그녀가 다독 가였던 건 확실한 것 같아.


상자를 들추며 한 권 한 권 골라내면서 그와 잠시 이야기했어. 같은 공간에서 내가 책을 고르는 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거든. 30년간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나 상하이에서 공부했던 그들의 딸들의 이야기들을 건조하게 풀어낸 그 시간의 흐름들이 오히려 묵직하게 다가왔어. 왜 이사를 결정했냐는 나의 질문에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지 않냐며 슬쩍 웃는 그를 보면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이의 자취를 본인의 손으로 정리해나가는 기분은 어떨지를 생각했어. 그리고 상상하건대, 마냥 버릴 수 없었던 그녀의 책들을 꼭 한국인에게 전달해주려고 한 그의 마음이 따뜻하고도 아리더라. 조용히 슬프더라.


직접 가져갔던 가방도 모자라서 다른 비닐봉지에 가득 담길 만큼 책을 받아왔어. 다시 찾아와도 된다며 거듭 강조하던 그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비가 가득 쏟아졌어. 축축하게 내려앉은 공기로 낡은 책에선 기억의 냄새가 났어.






1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부끄럽지만 경애씨의 책장에서 받아온 책들을 완독 하지 못했다. 우리 집 한편에 차지하고 있는 경애 씨의 책들. 그 책들을 한 권 한 권 풀어가 보고 싶다. 만난 적 없고 만날 수 없는 당신이 남긴 책들. 지금부터 찬찬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책을 읽었을 경애 씨, 당신을 생각하면서요. 다시 한번, 무연의 당신에게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 동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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