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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수 Sep 25. 2020

살고 싶다는 농담.

마음속의 감사를 담아.

너는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사니?


석사 시절,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그때 나는 실제로 무척이나 바빴다. 프랑스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늘던 그때.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 들으랴, 소논문으로 가득 찬 과제 하랴, 석사논문 준비하랴, 월세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하랴. 그리고 남는 모든 시간을 털어 여러 프로젝트해보랴, 이 애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사는 거지?라는 악의 없는 호기심. 사람은 칼을 들지 않고도 사람을 너무도 쉽게 상처 입힌다. 아직도 그의 표정과 목소리, 억양 조차도 생생하게 뇌리에 박혀 있는데, 그 시기에는 그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었다. 나는 여전히 바쁘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아마 어딘가 고장 나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몇 년이 흐르고, 지금은 몇 년만큼 무뎌진 내가 있다. 누군가 또다시 같은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그러면 어쩜 그리 세상을 쉽게 사니?’라고 웃으며 말해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청춘은 고달프다.

우리, 상대평가는 하지 말자. 누구든, 자신만의 괴로움과 아픔, 슬픔, 우울을 가득 지니고 살고 있을 터이다. 달려도 달려도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따라오는 가난이건, 이게 고독한 건지 외로운 건지도 구별되지 않는 타지 생활이건, 사랑하는 사람이 최악의 형태로 떠나가버렸건, 생각보다 좋지 않은 성적을 받아서, 원하는 곳에 취업이 되질 않아서, 그 원인은 사람만큼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걸 사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는 청춘을 평가하는, ‘옳은’ 삶의 길을 제시하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날이 좋은 날, 버스를 기다리며 반짝이는 센 강을 바라보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 저곳에 뛰어내리면 예쁘게 죽을 수 있겠구나’라고 홀린 듯 생각하다가 무서워졌다. 무뎌지다 무뎌지다 속이 곪아가는지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지식을 책과 논문으로 밖에 접하지 못했던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길은 책이었다. 마침 서점에 가면 수많은 청춘과 힐링과 관련된 베스트셀러가 가득했던 시기였다. 내 속의 끈적거리는 우울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시험 삼아 이 책 저 책 읽어보았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지 않았고, 12가지 법칙은 보이지도 않았다. 위로는커녕 더 서글퍼졌다.


당신의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허지웅답기


며칠 전, 구독 중인 밀리의 서재에 허지웅 작가님의 책이 올라왔다. 허지웅 하면 작가로 보다도 연예인에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녀사냥에서 시니컬하게 코멘트를 달던 사람. 조금 마르고, 무덤덤한, 말을 잘하는 사람. 그 정도의 가벼운 무게였던 사람이 별안간 그득 무거워졌다. 유튜브 채널 '허지웅답기' 덕분이었다. 한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며 한 번 들어보라며 링크를 보내줬다. 백수, 가난, 결혼, 가족, 병마, 사랑. 사람들이 보내온 온갖 고민을 듣고 허지웅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채널 내내 그는 묵묵하다. 조용히 듣고 있지만 굳게 다문 입술과 구겨진 미간에서 얼마나 신중히 듣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어떠한 질문이건, 어떠한 고민이건, 진지하고 묵묵하게 고민을 하고 입을 연다. 마음속까지 고민을 가져갔다가 푹 담그고 꺼내 주는 듯했다. 진심으로 듣고 진심으로 답했다. 그것만으로 고마웠다. 왜냐하면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사실 나와 같았으니까. 모든 질문들, 모든 생들이 조금씩은 닮아있었으므로, 내 삶을 묵묵히 바라봐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의 에세이집을 보았을 때 매우 반가웠다. 글로 만난 적은 처음이었기에 궁금해졌다. 무거울까, 시니컬할까, 유머러스할까. 혹여 실망하지는 않을까도 생각했다. 먼저 책 소개의 카드 뉴스가 눈에 띄었다.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조금 의외였다. 사람의 삶을 비교할 것 같지 않았는데. 또 수많은 위로의 책들처럼 억지 위로를 하려나. 못난 방어적인 태도가 먼저 나왔다. 그렇게 약간은 삐딱하게 읽기 시작한 책은, 밤이 돌아와 잠을 미뤄둬야할 정도로 좋았다. 


딱 사람의 온도만큼 따뜻한 책


이 에세이는, 다시금 허지웅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병을 마주하고 느꼈던 절망, 죽는 게 차라리 나을듯한 아픔의 경험들과,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영화와 배우의 리뷰를 통해 삶과 살아감을 이야기한다. 온도로 따지면 그는 뜨겁지 않다. 오히려 미지근함에 가깝다. 나는 너희보다 힘든 일을 겪었고, 겪어보니 삶은 아름다운 것이고, 그러므로 너희는 살아야 한다 따위의 작위적인 정열의 글도 아니고, 지금의 불행은 잠시이고, 지나갈 것이고, 모든 것은 괜찮아질 것이다고 말하는 어쭙잖은 위로가 아니다.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사실 천장이 얼마나 숨이 막히고 바닥은 얼마나 차가운지를 말한다. 세상은 숨쉬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더럽고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의 무게만큼 모두의 무게가 참으로 무겁다는 것을 이해해준다. 그게 참 따뜻하다. 딱 사람 온도, 36.5도만큼의 따뜻함이다그는 책을 통해 조심스럽게 우리를 설득시키려한다. 그래도 우리 조금만 더 살아봅시다. 그리고 기왕 살아가는 거, 가능하면 아프지 말고 살아갑시다,라고.


20대의 청년들이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기에 그를 위해 살아간다고 했다. 배고프고 서글펐던 청춘을 그대들이 겪지 않기를. 애정과 진심을 담아 기도해주는 듯하다. 나는 가능하면 많은 청춘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푸르다 못해 시린 봄을 지나고 있을 신이 꼭 읽어보기를. 그래서 죽고 싶다는 농담보다 살고 싶다는 말을 웃으며 던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했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했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태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당신이 '라라 랜드'에 무너져 내렸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 그래서 망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으면 한다. 시간을 돌아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디 평안하기를.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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