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요?

<내 인생 음식>

by 땅꼼땅꼼


우리 집은 매주 일요일이면 아점으로 라면을 먹는다. 매끼마다 뭘 먹을까는 모든 엄마의 고민일 테다. 그런 와중에 몇 년 전 동생네서 머물 때 일요일만은 엄마도 좀 쉬자며 라면을 먹는다는 말을 듣고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그때부터 '일요일 = 리면'이라고 정했다.


그런데 하나의 라면으로 통일되지는 않고 제각각이다.


큰애는 시종일관 육개장 라면(사발면 아닌 냄비에 끓이는).

작은애는 면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간단한 반찬과 함께 밥을 달라고 하는 때가 더 많다. 면을 먹는다고 할 땐 짜파게티 혹은 진라면 순한 맛. 그나마 절반을 먹지 못하는 때가 다반사.


나는 신라면이나 진라면 매운맛일 때가 많고 다른 걸 넣지 않고 라면에 계란 2알 깨뜨려 넣어 가능한 라면 본연의 맛으로 먹는 게 좋다.


신랑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그냥 라면보다는 만두나 햄, 파나 양파 등을 추가로 넣는 때가 많다.


이렇게 먹는 것도 다르고, 방식도 다르기에 간단하게 라면으로 때운 일요일 아점일지라도 설거지로는 냄비가 서너 개, 앞접시와 물컵, 숟가락과 젓가락, 김치 담은 종지까지 하면 제대로 한 끼를 차려먹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설거지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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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호되게 아픈 탓일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 때문이었을까. 오늘 아침엔 라면을 끓이는데 갑자기 아빠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머물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꽤 오래전 일이다.

친정에 갔을 때 아빠와 라면을 끓여 먹은 적이 있다. 애들은 너무 어렸고, 엄마는 위염을 앓고 있어서 드시지 못하는지라 아마도 아빠와 둘이 먹으려고 했던 것 같다.

일찌감치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집을 떠나 살았기에 아빠와 그렇게 라면을 삶아본 적이 없었다.


팔팔 기운차게 끓어오르는 물에 라면을 넣고, 가루 스프와 건더기 스프를 넣었다. 그리고 계란 톡톡. 그때 아빠가 다가와 아직 익지 않은 계란이 잘게 풀어져 국물과 희석되도록 휘휘 저으셨다, 그리고 언제 준비하셨는지 초록초록 파도 냄비 속에 쏙.


라면과 계란만 넣은 깔끔한 맛을 좋아하는 나는 일순간 인상이 찌푸려졌던 것 같다. 그렇지만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고 내 식성이자 봉지에 쓰여있는 조리법대로 2~3분 정도 더 익힌 후 불을 끄고 냄비를 조심히 식탁 위로 옮겼다.


"푹 퍼지게 좀 더 익혀야 보드랍지."

"그렇게 하면 넘 퍼져서 싫어요."

"그러냐, 나는 그렇게 먹어야 보드랍던데."


붇은 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먹다 보면 자연스레 붇게 되니 천천히 드시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빠 말씀에 달갑지 않게 대꾸하고는 먹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 짧은 순간이, 라면을 끓일 때면 혹은 어디선가 라면 냄새가 날 때면 심심찮게 찾아왔다.

또한 붇은 라면을 볼 때면 퍼졌다는 생각보다는 동그랗게 오므라진 입술로 '보드랍지'라고 말하는 아빠의 표현이 더 먼저 떠올랐다..


젊을 적 아빠라면 그런 타협 따윈 없었을 테다. 그저 아빠가 드시고 싶은 대로 조리했을 테고, 내가 싫은 내색을 하더라도 결국 아빠 입맛대로 만드셨을 테다.


그런데 그날 조심스럽게 건넨 그 목소리가 아빠의 늙고, 힘 빠지는 모습의 시작이었다고 기억한다. 뭘 하더라도 하나하나 자식들의 눈치를 봤고, 엄마에겐 큰소리를 칠지언정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의견조차 내뱉지 못하셨다.

그렇게 아빠의 어깨가 작아지셨고, 뒷모습에 힘이 빠지시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다녔던 3년 동안 기숙사를 3번 이사했다.

학교 내 기숙사 공간이 부족해 학교 재단 이사장이 사회공헌으로 운영하던 양로원(우리가 입학했을 땐 비워졌었다)에서 1학년생끼리 1년. 2학년엔 학교 뒤편에 있는 기존 기숙사. 그리고 3학년 때 드디어 완공된 신축 기숙사에서.

그렇게 3년 동안 학교의 기숙사를 모두 옮겨 다니며 산 건 딱 우리 동기생이 유일했다.


1학년 때 머물렀던 기숙사는 학교에서도 꽤 떨어져 매일 아침 스쿨버스가 와서 태워갔다. 마을에서도 거리고 꽤 있어서 10분 정도 찻길을 걸어가면 구멍가게 하나가 나오는 게 유일했다.


(이미지 출처 : NAVER)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에 귀사 할 때 가방에 제각각 먹을 것들을 싸왔는데 그때 빠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봉지라면이었다.


살 빼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여고생일지라도 스쿨버스가 기숙사에 도착하면 이 방, 저 방 할 것 없이 전기 포트에 물을 담고 끓이기 시작했다.

기숙사 안에서는 취사금지였으므로 똑바른 조리도구 하나 없었지만 유일하게 허락된 전기포트 하나면 충분했다.


물이 끓는 동안 전기포트를 둘러싸고 앉아 각자 꺼낸 봉지라면을 뜯어 스프를 꺼낸 후 면을 잘게 바스러트리기 시작. 산산조각 나면 집어 먹을 때 힘들고, 너무 크게 조각내면 잘 안 익을 수 있기에 그 중간점을 잘 찾아야 했다.


물이 끓으면 봉지 속에 물을 붓고 조심스레 주둥이를 오므리고 라면이 익기를 기다린다. 그동안 주둥이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성미 급한 친구는 꼭 있었다.

몇 분 후 라면을 먹기 시작하면, 학교에서 저녁 급식도 먹었던 기숙사들이지만 걸신들린 것처럼 왜 그리 맛있게 먹었던지.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성인이 되어 알게 되었다.

우리가 냄비가 없어 봉지에 끓는 물을 부어 먹는 그 라면은 군인들이나 돈 없는 자취생들이 먹는 방식이었다는 걸.


라면 조각 하나라도 놓칠세라 손에 힘줘가며 젓가락질을 했던 그 여고생 시절, 전기포트에 빙 둘러앉아 물이 끓기를 기다리던 친구들의 눈망울이 선하다.




어제 읽었던 <혼밥판사>에 읽은 거다.


우리가 먹는 라면은 일본에서 왔다. 일본에 라면이 널리 퍼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패전 후 일본에 미국의 원조 밀가루가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에 그걸로 라면을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았다. 라면의 인기가 높아지자 인스턴 라면이 개발되었다........(중략)........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은 1963년 삼양식품에서 나온 '삼양라면'이다. 국민들의 관심이 대단해서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라면을 맛보고서 "고춧가루와 양념을 더 넣어서 맵고 짜게 만들라"리고 조언했다고 한다.


라면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만화 <둘리>에 나오는 마이콜이 불렀던 노래가 자꾸 맴돈다. 원래 글을 시작할 때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했던 "라면 먹고 갈래요?"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꼬불꼬불 꼬불꼬불 맛 좋은 라면

라면이 있기에 세상 살만 나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라면 #일요일은내가요리사

#둘리 #후루룩짭짭 #봄날은간다

#라면먹고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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