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아는 사람만 두로와>
태어나고 19년을 자랐던 고향을 떠나 대학 진학을 위해 자리 잡았던 곳은 경기도 광명.
나보다 일곱 살 많은 큰언니가 먼저 올라와 서울 생활을 시작했고, 뒤이어 작은 언니, 내가 합류했으니 나는 거주지에 대한 고민은 일절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알았다.
얼마 전,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동네에 다시 갔다.
평일 퇴근 무렵, 광명까지 가는 길은 막히고도 또 막혔다. 신랑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2시간 남짓, 드디어 광명시민체육관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해야 할 일'에 참석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차량의 꼬리는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순간이다.
그 줄에 합류했을 뿐인데 왈칵!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차올랐다.
주차장 옆으로 난 인도를 걸으며 엄청 엄청 울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던 거다.
대학생이던 시절, 나는 큰언니가 구해줬던 저 집에 살게 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언니가 결혼을 하고 멀지 않은 곳에 신혼집을 차렸다.
흔한 표현으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때, 작은 언니가 장기간 지방으로 출장 가는 바람에 나는 2주 넘도록 용돈을 받지 못했었다.
큰언니네 형편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내일의 버스회수권을 살 돈이 없고, 점심 먹을 돈이 없었던 나는 큰 용기를 내어 큰 언니네에 갔다.
살던 집과 언니네 집 가운데쯤에 바로 이 광명시민체육관이 자리했다. 언니로 향할 때만 해도 다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다.
막상 용돈 얘기를 꺼내려는데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언니의 신혼살림이 어렵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고, 형부의 월급은 쥐꼬리만큼이라고 그것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큰언니의 가지처럼 마른 양팔 사이로 볼록 솟은 임신한 배가 보였다.
"형부, 저 차비 좀 주세요."
차비만이라도 받으면 먹는 건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던 참이었다. 굶어도 됐으니.
그런데 나는 쭈뼛쭈뼛 끝내 그 말을 못 하고 언니네 집을 나왔다. 아파트 1층으로 배웅하던 형부는 그날따라 더 많은 말을, 빈틈없이 꽉 채웠다. 아마도 민망함을 숨기려 한 걸 테다.
집으로 가기 위해 다시 왔던 길을 걷던 나는, 대성통곡하듯 울음을 쏟아냈다. 끝내 말을 못 했다는 자책과 언니네는 왜 이리 가난할까, 형부는 왜 모른 척을 할까 하는 서운함이 얽히고설킨 울음이었다.
다행히 큰 차도여서 지나가는 차소리로 내 울음소리는 묻혔다. 그날 양길가에 심어진 은행잎은 왜 이리도 쌩쌩하던지... 사실 녹색의 은행잎을 봐도 이 일이 떠오른다.
언니, 오랜만에 일 보러 광명 왔어!
반가움 반, 그날의 감정 반 섞여 큰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3~4년 전쯤 광명을 비롯해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고추 농사를 짓는 형부에게로 내려간 언니는, 반가웠던지 곧바로 답신을 보내왔다.
"이 길 들어오는데 눈물이 확 나더라.
언니한텐 말한 적 없었지만, 언니네에서 집에 갈 때 이 길 지나며 엄청 울었거든."
"용돈 때문이었겠지."
슬쩍 꺼낸 얘기에 단번에 정답을 맞히는 큰언니. 그만큼 그 시절 큰언니는 용돈 한번 쥐어주지 못한 게 내내 미안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부모도 아닌 형제자매인데, 이제 막 신혼살림 차린 사정이 더 안 좋았던 언니였을 텐데...
정말 내가 평생 살아도 모를 K장녀의 무게다.
그래서 원망이 없다.
오히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 한 스푼이구나, 이렇게 술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살림이 조금은 나아진 지금이라 다행인 마음이다.
당분간 '해야 할 일' 때문에 몇 번은 더 광명에 갈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입 밖으로, 언니에게 얘길 했으니 그 길을 지날 때 코끝이 찡하거나 눈물이 나는, 신파적인 감정은 사그라들듯 하다..
젊을 적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돈 받고도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시절을 살아내며 쌓은 감정들은 감사한 큰 재산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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