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안녕

<내 마음 아는 사람만 두로와>

by 땅꼼땅꼼
마지막 인사 드립니다.(정년퇴직)
00에서의 36년 7개월을 근무하면서 그간 저의 소중한 삶을 00에서 모든 것을 만들고 이룰 수 있었습니다.

(중략)

그동안 함께했던 선/후배님 재직 중에 혹시라도 말 한마디 잘못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거나 불편한 점 있으셨다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고 좋은 추억만 간직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어 아쉬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11.30일을 마지막으로 27년 동안 함께했던 00를 떠나 새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그동안 함께 일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하고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여러 선배님들의 배려와 지원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주일 사이 4통의 퇴직 인사 메일을 받았다.

근래 들어 월말이면 이렇다.


36년 7개월, 27년...

인생의 한때라고 하기엔 아마도 그분들의 인생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법한 시간들이겠지.


한 선배님의 메일에서는 스스로 해냈음에 벅차오르는 감정이 전해졌다. 옆에 계셨다면 응당 손뼉 쳐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


다른 선배님의 메일에서는 차분함이 느껴졌다.

평소 '솔' 톤으로 비교적 높은 톤으로 말씀하시곤 하던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아쉬움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이미지 출처 : tVN 유퀴즈>


회사에서 선배들이 사라져 간다.

임원을 하셨던 분들도, 진작 퇴사한 줄로만 알았던 분들도, 선명한 색깔은 없지만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시던 분들도, 한때 끗발을 날렸던 선배도, 입사 때부터 봐왔던지라 나이 마흔이 넘은 나를 "00아"라며 이름 불러주시는 선배님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회사에서 자꾸만 어른이 되라고 재촉한다.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게 많고, 선배님들이 지시하고, 알려주는 걸 배우며 일하고 싶은데 말이다.


인생의 뜨거웠던 청춘을 회사에 바쳤을 선배님들,

그 결과가 좋든 그렇지 않아 아쉽든, 몇십 년을 꾸준히, 많은 흔들림 속에서도 묵묵히, 끝내 해내버리심에 존경한다.

이제는... 그 답답하리만치 한길만 바라보는 성실함의 힘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곧 12월이 되면, 재직기간 26년이 꼭 채워진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졸업도 하지 않은 때 덜컥 회사에 입사해 버리면서,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신입 때부터 나는 퇴사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사보를 만들 때, 매월 작성하는 '편집배열표'를 퇴사한 선배에게 물려받아 매월 낱장으로 복사해서 사용했다.


어느 날, 사보배열표 60장을 복사하 복사기 앞에 서서

"딱 이거 다 쓸 때까지만 다녀야지!"

굳은 결심을 했다.


1년에 12장, 60장이니까 딱 5년만 다닐 속셈이었다.


그런데 그 60장은 5년이 아닌 채 2년도 되지 않아 사라졌다. 자꾸만 바뀌는 아이템과 일정 때문에 편집배열표는 월마다 1장만 쓰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계획과 달랐던 건 내 마음이기도 하다.

딱 5년이라고 했지만, 막상 5년이 지나도 나는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다. 물론, 여전히 퇴사를 가슴에 품은 채로 말이다.


"선배님은 어떻게 25년이나 다니셨어요?"


최근 부서원들이나 후배들이 자주 하는 질문 중 하나다.

비법은 없다.

언제든 퇴사해 작가가 되리라는 나만의 출구가 있었던 거.

또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상과 다소 동떨어져 있었기에 주목받지 못했고, 그래서 큰 변화에도 휩쓸리지 않았던 듯하다.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더 글로리>


선배님들의 퇴직 인사를 보며, 이제는 '나는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매번 뛰쳐나가려던 마음이, 자꾸 회사 안으로 잡아당겨진다.

그만큼 이제는 내쳐지는 때가 다가오는 걸 거다.

언젠가 나에게도 퇴사, 회사생활 끝이란 게 있을 거다.

이제는 그걸 잘 받아들이는 연습,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낸 회사생활에서 벗어나 남은 삶을 잘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겠지.



글을 저장해 둔 사이, 또 한 통의 메일이 왔다.


작별 인사

(중략)

우리 모두는 늘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토로하지만, 지나고 보니 0000은 꽤 괜찮은 직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군요. 나가서도 우리 회사와 그 안에서 일하시는 여러분들을 응원하겠습니다.

저는 이번 주말부터 자유인입니다.^^
스마트폰의 평일 알람을 해제하는 기분을 언젠가는 여러분도 느껴보시길 빕니다.
그럼 이만.


진짜 작별 인사다.

홀가분함과 시원섭섭이 묻어나는.


12월의 시작이자 한 주의 시작인 오늘,

작별 메일을 주셨던 선배님들의 퇴임 1일이기도 한 오늘,

과연 알람 해제하고 늦잠 주무셨을지 엉뚱한 궁금함이 생긴다.


"선배님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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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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