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50 포기만 할 거야. 배추도 병들고 물짜서 없어."
*물짜다 : 물건의 내용과 질이 형편없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 전라도 방언
엄마는 통화할 때마다 올해 김장은 적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어느 때는 50 포기였다가 또 어느 날은 80 포기라고 하셨다.
다리와 허리 통증이 심해지며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엄마를 보며 자식들이 뜯어말리는 통에 공식적으로는 50 포기이나, 엄마 마음속엔 80 포기인 듯싶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해마다 김장 포기수가 줄어드는 것에 안도할 뿐.
우리 집(정확히는 친정)은 김장을 큰 비닐하우스 안에서 한다. 추위와 눈비 등이 내려도 피할 수 있을뿐더러 수도시설이 있어 몇 날며칠 배추를 씻고 건져서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말, 올해는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든 느낌이었다.
김장 양념을 버무릴 때도 같은 느낌.
그런데...
아침에 이웃집 김장 품앗이를 다녀온 엄마는, 그 집의 남은 절임배추를 달고 오셨다. 아침에 해둔 양념이 부족해지더라도 마당 냉장창고에 가면 또 만들 수 있는 고춧가루며 재료들이 있으니 걱정할 바도 아니었다.
그렇게 저렇게 대충 봐도 이번에도 100 포기는 넘은 듯하다.
그뿐인가.
큰언니가 좋아하는 무김치, 오빠가 좋아하는 파김치에 갓도 넣어야 하고. 아빠를 위한 백김치까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애순이는 늘상 말했다.
"금명이는 푹 익은 신김치를 좋아하고, 은명이는 방금 담근 새김치를 좋아하고. 내가 못살아 못살아."
말로는 '못 산다'하면서 김치 자르는 칼을 든 어깨는 춤을 추고 있었다.
작가가 우리 친정엄마를 만나고 쓴 줄 착각할 만큼 똑같다. 그보다도 그게 대한민국의 엄마들의 일반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김장이 끝나고 나면 김치통이며 양념을 담았던 통들을 비롯해 김장했던 비닐하우스 바닥에 물청소까지 마쳐야 진정으로 김장이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만 해도 대략 2시간 남짓, 아이구 허리야...
아! 하나 더 있다.
동네에 김장김치 배달하기!
각 가구마다 몇 명이 사는지, 친척이나 친밀도에 따라 그 양이 좀 달라진다. 그러나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대부분인 동네라 대개 3~4쪽이기가 쉽다.
일 년에 한 번, 이렇게 동네를 삥 돌다 보면 동네 사정이 조금
보인다.
동네 어르신들 중 작년말과 올해 사이, 누가 돌아가셨고,
누군가는 노환이나 병원 때문에 도시의 자녀 집으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뿐만 아니라 누구네 집에 바람나서 아줌마가 집을 나갔다더라, 누구네는 시내에 집을 사서 옮겼다더라 하는, 김장할 때 품앗이온 아줌마들이 나눈 대화 속 주인공들의 현황도 살필 수 있다.
이제는 동네가 한 집 건너 한 집씩 빈집이다.
그리고 빈집은 점점 담이 허물고, 잡초가 무성해지면서 볼썽사납게 된다.
그래도 올해는 다섯 가구나 이사 들어왔다는 반가운 소식도 있다. 성인이 되어 밥벌이를 위해 타지로 나갔던 자녀들이 나이 들어 귀농한 경우가 대부분. 혹은 이런저런 사연을 들고 온 아예 외지인도 있다.
"엄마, 이 집도 갖다 줘요?"
2~3년 전에 이사 온 외지인의 집에 올해 처음 김치 배달을 갔다. 시골 어르신들은 이사 온 외지인에 대해 처음엔 경계를 하는 편이다.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겁먹는 거다.
아마 그런 이유로 외지인은 이사 왔을 때는 '시골의 텃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싶다.
이제 또 한 군데 배달해야 하는 곳이 늘었다.
생각해 보면, 동네에 배달하는 김치만 해도 20 포기는 족히 될 테니 처음부터 엄마의 '50 포기' 계획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친정에 오면, 나는 아이 둘을 가진 엄마나 나이 마흔의 어른이 아닌 엄마아빠 심부름을 다니고 동네 어른들에게 떡이나 감 같은 걸 얻어먹는 천상 어린아이가 되고 만다.
이제 진짜 김장김치 끝!
저녁엔 김장김치를 곁들인 보쌈(작은 언니 솜씨), 방어회와 치킨(신랑이 사 온 거), 복어회(김장 때마다 시어머니께서 보내주시는)로 다 같이 둘러앉았다.
김장하지 말라고 그렇게 뜯어말려도 하는 엄마지만,
그런 엄마 덕분에 여름 생신 외에 한 번 더 가족들이 마주 보는 시간이 생겼다.
우리도 이렇게 서로 안부 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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