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꼼땅꼼 Sep 04. 2024

맹장과 맞바꾼 인절미와 사라다 빵

내 인생 메뉴 <주전부리>편


그날은 참 이상했다.


모의고사를 마치고 언니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는데, 보자기에 싼 제법 큰 물건을 들고 나타난 국어선생님은 그곳에 있는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얘들아, 떡 먹어봐, "


인절미였다. 고슬고슬한 콩고물을 뒤집어쓴 떡은 빚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지 아직 뜨스했다. 국어선생님은 교장선생님의 딸이었다. 그 교장선생님은 학교 교문 바로 앞에 살고 계셨고. 그러니까 퇴근길에 친정에 들러 떡을 챙겨 집으로 가시는 길이었다.


이상하다 하는 것은, 평소 국어선생님은 좀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뭘 나눠주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다는 거다.

그런 분이 일부러 정류장 여기저기에 흩어진 학생들을 불러 모아 지금 막 담아 온 떡을, 그것도 그렇게 맛있는 인절미를 나눠주신 거다.



이미지) pixabay

집에서 '떡순이'라 불릴 정도로 떡을 좋아하는 나는, 누우런 콩고물이 풍기는 고소한 향과 쫀득한 떡이 선사하는 달콤한 맛이 좋아 떡을 서너 개는 집어먹었던 것 같다.


곧 버스가 왔다.

떡을 먹던 학생들을 서둘러 옷에 묻은 콩고물을 털어냈고, 버스에 올라탔다.


분명 차멀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딘가 답답한 생각에 자꾸만 신물이 넘어왔다. 가슴팍 가운데가 턱! 막힌 기분. 곧 토할 것 같았지만 참아지는 그런 기분을 느끼며 어찌어찌 언니네 집까지는 잘 도착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기도 했다.


"언니는 야자 있어서 다시 학교 가야 해. 너 자고 있어서 안 깨웠는데, 저녁 어떻게 하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러 가야 했던 여고생었던 언니는 저녁상을 차려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그런데 불현듯 나는 빵이 먹고 싶어졌다.

언니네 학교 앞에서 파는 그 사라다 빵 말이다. (참 옛날 사람)


두툼한 빵을 반으로 갈라 하얀 양배추를 길고 잘게 썰어 햄이나 당근 나부랭이 등을 잘 섞이도록 마요네즈로 버무린 야채를 끼워 넣은. 아! 그 위에 새콤하고도 새빨간 토마토케첩은 필수.


사라다 빵이 먹고 싶다 생각하니 반드시 먹어야만 될 것으로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속이 좀 가라앉은 틈을 타 다시 학교로 가는 언니를 따라 언니네 학교 앞 베이커리까지 갔다.


갈색의 빵과 흰색의 야채와 마요네즈, 간간이 보이는 빨간빛의 햄, 정점을 찍는 케첩까지. 내가 상상하고 원했던 그 사라다 빵이었다.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렇게 어느 때보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학교 갈 수 있겠어?"


큰 언니였다. 밤새 끙끙 앓으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내 옆에서 간호를 해줬다. 새벽녘에야 깊은 잠에 들어서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였단다.


"가야지, 괜찮아졌어."


당연히 지각이었다. 1교시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아침 자율학습 때문에 모두들 등교를 한 시간인지라 버스 안은 한가했다.

때문에 빈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너 왜 이제야 학교에 가?"


마침 버스에 올라 나를 본 담임선생님은, 예상치 못한 만남에 질문을 했지만, 답을 듣기도 전에 내 안색에 놀라셨다. 내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던 거다.


배의 통증은 괜찮아졌다, 쥐어짰다를 반복했다.

나는 괜찮아지면 몸을 일으켜 세워 수업을 들었고, 통증이 몰려오면 책상 위에 엎드렸다가 이내 잠이 들기도 했다.


설핏 잠든 사이 수학선생님의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전날 본 모의고사에 대한 채점을 하는 중이었다.


"00번 틀린 녀석들 나와!"


아이들이 줄 서서 교단 앞으로 나갔고, 하나씩 차례로 칠판에 기대 서면 곧이어 '박! 박! 박!' 선생님의 매로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좀 괜찮아서 눈을 뜰까 싶었지만 분명 나의 수학 성적은 그다지일 것이 틀림없었기에 다시 눈을 찔끔 감았다.

 

"쟤 이번 시험 완전 망쳤나 봐."

"그러게, 근데 너무 꾀병 같다."


쉬는 시간, 친구들은 여전히 엎드린 내가 잠든 줄 알고 험담을 했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나는 진짜 아팠다.


오후에는 양호실로 갔다. 내가 다닌 중학교의 양호실은 온돌바닥이었는데 으스스했던 몸이 오히려 달구어지며 통증도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는 건 내 착각!

오후 5시쯤 되자 도무지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을 오시게 했다. 들판에서 일하다 학교로 달려온 엄마의 옷에는 황토색 흙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배가 아픈데도 그런 엄마가 창피하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엄마 등에 고개를 묻은 채 학교를 빠져나왔다.


엄마는 나를 업고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의 의원으로 갔다.

의사는 내 배를 여기저기 눌러보고, 다리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해보더니


"맹장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참 싱거운 진료였다.

엄마는 다시 나를 업고,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택시를 잡아타고 아산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내 고향에선 가장 큰 병원이고 그곳에만 응급실이 있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참았다고요? 참을성이 좋은 거야, 미련한 거야."


흔히 맹장염이라 불리는 충수염이었다.

다만 급성 충수염은 아니었어서,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충수돌기가 막혔다 뚫렸다를 반복하며, 막혔을 때는 통증이 오고 뚫렸을 때는 통증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날 바로 응급수술을 했다.

전날 인절미를 먹고 배가 아프다 느낀 게 오후 2시경이었으니 꼬박 28시간 후에 수술실에 들어간 것이다.




수술이 끝난 후 5일 동안 입원해 있었다.

그동안 반 친구들이 병문안을 차례로 왔다 갔다. 학생 수가 얼마 되지 않는 학교에서 수술과 입원은 굉장히 큰 화제였다.


"나는 네가 시험을 못 봐서 꾀병 부리는 줄 알았어."

"너를 미워해서 미안해."


아이들은 손편지까지 써서 나를 위로했고, 자신들의 잘못을 실토했다. 친구들이 정말 순수했고, 그 시절 여중생이라서 가능했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새삼 그 친구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병실에는 마침 같은 날 오후에 차례로 맹장 수술을 한 초6 동생, 중1이었던 나, 그리고 한 살 많은 언니가 들어왔다. 우리는 단지 5일 남짓이었지만 비슷한 나이와 처지로 인해 금세 친친해졌다. 수술 후 아무도 먹지 못하고 복도를 걷는 운동을 해야 할 때도 우리는 서로의 링거대를 끌어주었다.

첫 방귀가 나올 때 박수로 축하해 줬던 기억도 새록새록!


퇴원 이후에도 한 살 많은 언니와는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펜팔친구를 했었다. 아직도 친정에 가면 서랍에 보관된 그 편지를 꺼내보기도 한다.




여전히 인절미를 좋아한다. 물론 사라다 빵도!

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우리 가족이라 베이커리에 잘 가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사라다 빵은 좀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송사부? 얼마 전 홈플러스에 있는 송사부에서 그걸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워했던지. 역시 마요네즈의 느끼한 맛과 케첩의 시큼하고 자극적인 맛은 하얀색과 빨간색의 상반되는 만큼 묘한 조화가 있다.



https://brunch.co.kr/@jinmeirong/19


https://brunch.co.kr/@jinmeirong/18


https://brunch.co.kr/@jinmeirong/17




작가의 이전글 내 생애 첫 기억, 포슬포슬 카스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