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음식 <양념>편
애들 아침밥 메뉴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해주는 김밥.
그런데 요즘 들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비록 재료는 별 거 없지만 갓 지은 새 밥에 들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검은깨와 참깨를 갈아 넣어 고슬고슬 다독거리는 것만으로 군침이 돌았는데 말이다.
실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친정에서 가져다 먹던 통깨가 바닥이 난 것이다.
성인이 열명 남짓 들어가 서있어도 남을 만큼의 아주 큰 냉장고는 엄마의 보물 창고다. 그곳에는 엄마가 여름내 농사지은 곡물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나는 친정에 갈 때마다 그곳을 샅샅이 살피며 살림살이를 챙겼다.
물 끓일 때 넣을 보리차, 옥수수 볶은 것, 고춧가루, 쌀 한 포대, 과일 등등.
7~8년 전 한날한시에 엄마가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아빠가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하시고는 그해부터 논농사를 딱 그만두셨다. 넓디넓은 밭농사도 정리를 하셨다.
그렇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땅뙈기를 다 놓지는 못하셨다. 문제는 그런 작다는 땅에 조금씩 조금씩 뭘 심으면 친정 식구들이 일 년 내내 가져다 먹고도 남을 만큼의 수확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도시 사람들이 주말농장 한다는 걸 보면 소꿉장난으로 느껴질 만큼 '앞마당' 정도라 하기엔 그 땅뙈기들을 모아보면 꽤나 컸다.
"예전 농사에 비하면 이건 일도 아니야."
엄마는 매번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엄마의 몸도 예전에 비할 바 아니도록 노쇠해진 건 계산에 넣지 않으셨다.
올초 예전에 인공관절을 심었던 무릎의 다른 쪽 무릎이 계속 말썽이었다. 그리고 허리도...
계속되는 엄마의 병치레에, 병원 순례까지.
"엄마, 이제 농사짓지 말아요!"
이까짓 거는 농사도 아니라고 했지만, 특히나 밭농사는 모든 일을 쪼그려 앉아서 장시간 해내야만 했다.
자식들의 엄포에 엄마는 이제 올봄에 심은 앞마당의 농작물마저 아랫집 아주머니에게 넘겼다고 했다.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너희들 먹을 걸 해주려고 했는데..."
엄마는 한껏 풀이 죽어있다.
엄마가 농사일에 얼마나 열정적이고 재미있어했고, 그만큼 성취감을 느꼈는지 자식들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 상실감도 클 것이라는 것도 짐작한다.
그렇지만 이제 그런 사정을 따지기엔 엄마의 무릎과 허리는 남아나질 않는 것도 현실...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 것이다.
"앞으로 엄마한테 뭐 달라고들 하지 마."
큰언니의 명령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엄마는 자식들이 달라는 것을 주지 못하면 내내 미안함과 자책을 할 거라는 것을. 그래서 말을 못 하겠다, 아직 엄마의 보물창고인 냉장고에 참깨가 남아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없다면 엄마는 내내 나에게 미안해할 테니 말이다.
시장에 가서 사는 것보다 엄마께 부탁드려 동네서 농사지은 걸 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동네 아주머니들이라면 믿을 수 있기 때문. 또한 웬일인지 시중에서 산 들기름과 참깨는 아무리 해도 고소한 향이 나지 않는다. 병뚜껑을 열었을 때 잠시, 그리고는 황급히 그 냄새가 날아가버리니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참기름, 들기름, 참깨, 들깨 사랑을 버릴 수 없어서 아쉬운 대로 마트에서 통깨를 사들고 왔다. 전보다 더더더 많이 넣어본다.
딸들에게 김밥을 싸주고, 시금치를 무쳐줄 때... 이왕이면 더 고소하고 맛있게 해주고 싶은데 그러려면 우리 엄마의 가슴을 후빌 수도 있다는 생각.
그래서 자꾸만 요즘 김밥 쌀 때마다 영 맘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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