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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Sep 14. 2024

검은 가마솥을 박박 긁으면 구수한 누룽지

내 인생 메뉴 <후식>편


중학교 1학년 때, 학원에 다닌답시고 잠시 시내에서 자취하는 큰언니에게로 가서 산 적이 있다. 버스가 일찍 끊긴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나가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맹장 수술을 하게 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었다.


돌아왔을 때 한옥이었던 우리 집은 벽과 방을 다 헐어내 지붕과 그것을 받치고 서있는 기둥만이 남았었다.

현대화 바람이 불던 때다. 국가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줘 구식이던 농촌의 집을 현대식으로 개조한다고 했다. 이 집, 저 집 온 동네가 시끌시끌 분주했다.


방과 방을 잇는 나무로 된 마루, 봄이면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를 풍기며 똥을 퍼냈던 푸세식 화장실, 큰 검은 가마솥과 회색빛의 작은 냄비가 앞뒤로 걸렸던 부뚜막, 작은 방의 벽장과 그 방을 데워주던 작은 부뚜막이 딸린 부엌. 모두 그때 우리 집에서 사라진 것들이다.

(어린 시절 썼던 일기장도 이때 다 없어졌다 ㅜㅜ)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특히 까만 가마솥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황토흙을 단단하게 치대고 쌓아 올린 부뚜막에는 크고 무거운 검은 가마솥이 걸려있었다. 그 가마솥에는 대체로 물을 가득 넣고 불을 때서 데웠다. 그 물은 하루 일과를 마친 가족들의 씻는 물, 설거지 물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가끔 메주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을 때, 몽실몽실 두부를 만들 때, 모내기나 잎담배 따는 날 일꾼들이 많아 한꺼번에 밥을 해야 할 때 그 솥은 용도를 변경해 사용하곤 했다.


그 솥에서 쌀밥을 다 긁어내고 나면, 누릿누릿한 빛깔에 고소한 향을 풍기는 누룽지(어릴 때는 그걸 ‘깜밥’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까만 밥이라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가 가마솥의 둥그런 모양을 그대로 본뜬 것처럼 커다랗게 떠졌다.


너무도 맛있고 고소한 그 누룽지는 식혀서 그냥 먹어도 맛있었고, 맹물을 부어 남은 열로 잔잔히 끓여 누룽지를 만들어 먹어도 맛있었다.
(사실 어릴 적에는 마른 것은 깜밥, 물에 불린 것은 누룽지라고 불렸었다)


그래서 까만 가마솥이 없어진 게 그때도, 나중에도 두고두고 아쉬웠다.




어린 시절의 입맛 때문인지 나는 누룽지를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고깃집에 고기를 먹다가도 ‘후식은 누룽지와 냉면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곧장 누룽지를 주문하고 이후 고기는 더 이상 먹지 않을 정도다.
언제 먹어도 속이 편안하고, 그 담백하고 고소한 맛은 일품이다.


그런데 일찌감치 집을 떠나 살았던 탓에 엄마는 내 입맛을 다 알진 못하신 듯하다.(물론 나도 엄마의 입맛을 다 알지 못하겠지)

애를 낳고 친정에 가면 엄마는 늘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셨다. 애들 밥 먹는 걸 챙기느라 내가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거였다. 나는 원래 밥 먹는 속도가 느리거니와  무엇보다 부산스럽게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조금 배가 고프더라도 애들을 다 먹인 후 느긋하게 먹는 식사를 좋아한다.
애들의 밥을 다 먹일 때쯤, 큰 대접에 누룽지가 담겨왔다. 내 눈은 커졌다. 누룽지라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애들의 밥을 마저 먹이고 내 그릇에 누룽지를 담뿍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친정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나보다 자식이, 신랑이 먼저였던 엄마는 매번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닌 사과 깡치, 김밥 꽁다리, 남은 음식 등을 드시곤 했는데 나 역시 가족들을 생각해서 누룽지를 집어 들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밥 먹어, 그건 내가 먹을 테니까.”


“나 누룽지 좋아해요.”


그럼에도 엄마는 내가, 딸이 제대로 된 밥을 먹길 바라셨다.


“아, 진짜 내가 누룽지를 좋아한다고!”


“친정에서라도 제대로 먹으라고!”


“누가 요즘 굶고 산다고 그래요? 다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살지!”


끝내 나는 소리를 지르며 따지기까지 했다. 그날만큼은 누룽지 아닌 흰쌀밥 먹으며 엄마의 성에 차는 행동을 할 법도 한데, 나 역시 진짜로(!) 가족을 대신해 누룽지를 드시려는 엄마 모습에 화가 났고, 짜증이 치밀었던 거다.

그렇게 목소리 높일 일도 아니었는데 일이 커졌다.
어떤 식으로 말해도 엄마는 누룽지를 좋아한다는 내 말은 믿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 일 후로는 나는 친정에 가서는 누룽지를 먹진 않는다.
굳이 엄마 마음에 짠한 마음을 남길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정말 고소하고 걸쭉한 누룽지를 매우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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