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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Sep 20. 2024

다방 커피, 눈치가 그렇게 없어서야

내 인생 메뉴 <음료>편


입사했을 땐 토요일까지 6일 근무,

(정식 입사일은 월요일이었는데 전 주 토요일에 미리 나가 인사를 했었다.)

1~2년 정도 지나 토요일엔 근무하지 않는 주 5일 근무제.

그럼에도 심심찮게 주말 근무를 해야 할 때가 있었다.


조직문화 업무를 담당하던 시절, 내 뒤통수 쪽으로 비서 업무를 하던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 뒤편으로 당시 임원의 자리가 꽤 넓은 공간으로 있었다.  


그때는 뭔 일이 그리도 많은지 5일 근무임에도 주말 출근은 당연했다. 나는 가능한 일찌감치 출근해서 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래야 토요일 오후부터 다음날까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고 푹 쉴 수도 있기 때문.


여느 토요일처럼 이른 시간에 출근하니 사무실은 텅 비어있고 형광등도 모두 꺼져있었다. 내 책상이 있는 쪽으로 형광등의 전원 버튼을 올려 조명을 켜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가벼운 차림을 한 임원도 출근했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인사를 나눈 후 일에 열중했다. 잠시 후 인기척이 들리더니 그 임원께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 대리, 커피 마시나.


“커피요? 저는 커피 안 마시는데요.”


노란색의 길쭉한 봉지에 담긴 커피믹스를 들고 내 자리 쪽으로 오던 임원의 발걸음이 내 대답에 장애물이라도 만난 듯 엉거주춤 멈췄다. 그리고는 조금 방향을 틀어 내 뒤에 있는 비서의 자리로 가서 책상 위를 기웃거리며 공연히 서랍도 열어보고 했다.

나는 힐끗 눈길을 주고는 바로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옮겼다.


비서 자리에서 잠시 휘적휘적하던 임원은 손에 종이컵을 들고 정수기 쪽으로 갔다. 그리고 커피알이 담겼던 노란 비닐을 반으로 접어 안의 액체를 휘휘 저으며 내 자리 쪽으로 걸어왔다. 내 옆자리의 부장은 아직 출근 전이었으니 그 빈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버렸다.


"원래 커피 안 마시나.


“네, 저는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 우리 와이프도 가슴이 뛰어서 커피를 못 마신다고 하더라.”


이렇게 시작한 대화는 두런두런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출근한 목적이 있으니 재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하고 싶은데, 상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아이고, **(비서 이름)가 없으니 싱겁네.”


컵에 든 커피를 말끔하게 비운 임원은 그렇게 말하며 드디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시간이 좀 지나 동료들과 얘기를 하다가 그날 있었던 일을 말했다. 나는 얼른 일을 마치고 퇴근하고 싶었는데 자꾸만 임원이 말을 거는 바람에 퇴근이 늦어졌다는 불평을 했다. 그런데 이구동성으로 쏟아진 동료들의 반응은 예상밖이었다.


"아이고, 비서가 출근 안 했으니 너한테 커피 타달라는 말이잖아.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 회사 생활을 어찌 한담.


응? 그게 그런 거였어? 설마 그랬을라고.  그렇게까지 확대해석을 하지....?

아닐 거라고 부정은 했지만 어정쩡하게 걸으며 내 주변을 맴돌던 임원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커피가 싱겁다는 말도 그런 의미였나?

아, 사회생활 잘하고 싶은데 벌써 글렀다. 태어나길 이렇게 생겨먹어서야 ㅋㅋㅋ 웃고 만다.




그리고 얼마 전, 그 얘길 나눴던 동료를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먹고 커피숍에 갔다.


"커피 못 마시지? 다른 거 시켜."


"아, 저 커피 마셔요. 처음엔 바닐라라떼 이런 거 마셨는데 오히려 느끼하고 달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아메리카노만 마셔요."


"으이구! 진작에 좀 그러지."

 

점심 외식을 할 때면 으레 식당 근처의 카페에 들른다. 커피가 아닌 걸 주문하면 커피에 비해 늦게 나와 일행이 같이 기다려야 했다. 가격적인 측면에서도 내가 계산할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남들이 사줄 땐 확연히 값이 더 나가는 음료를 주문하기가 미안할 정도. 그런 이유로 한 번 두 번 커피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대학을 다닐 때 다양한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벼룩시장 신문에서 남대문시장의 한 카페에서 알바를 구한다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갔다.

예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나는, 당시 화장도 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이었다. 대학생임에도 그러한 겉모습 때문에 사실 청소년 회수권을 내고 다녀도 한번 걸리지 않았다.


스타벅스나 투썸플레이스 등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아직 들어서기 전이다.

피숍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조금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깊숙이 꺼지는 소파가 있는 가게였다. 음악이 소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자욱한 안개 같은 담배연기가 카페 전체에 매캐하게 퍼져있었다.


두고두고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곳은 진한 화장을 하고 손님 옆에 앉아 커피를 따르며 말동무를 하는 다방이었던 듯하다.


주인은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나이, 고향, 가족관계, 학교 등등 인적사항에 대한 것들. 그리고 조용조용하게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돌아가라고 했다. 어쩌면 내 촌스러운 모습에 속으로 웃으며 돌려보냈던 것도 같다.


돈이 궁해 한 번 더 말해볼까 고민도 했지만 나는 뒤돌아 나왔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각종 영화나 범죄 드라마, 뉴스를 보면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새삼 그 카페의 주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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