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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Sep 12. 2024

비가 오면 생각나는, 막걸리

내 인생 메뉴 <주류>편


큰 애를 출산하고 산후조리원 대신 집에서 몸조리를 했다.

한 달 후 집으로 와주던 산후조리사가 오지 않게 되자 그때부터 시어머님과 같이 살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그렇게 10년 남짓 큰 애와 작은 애를 키워주셨다.


어머님과는 사이가 좋아서 저녁에 반주를 곁들이는 때가 왕왕 있었다. 그때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머님께서 놀라며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너는 도대체 언제 적 사람이냐?"


친정엄마보다 한 살밖에 적지 않은 시어머님이신데, 어머님과 같은 세대를 살았다고 도 무방할 정도로 내가 자라온 환경은 한 세대 정도 늦게 흘렀다.




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는 정말 깡촌이었다. 집과 집 사이를 연결하는 길도 좁았을뿐더러 대부분 흙길이었던지라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황톳빛 흙탕물이 여기저기 튀었다.


마을에는 아직도 우물이 있다, 다만 사용하지 않을 뿐


마을에는 우물이 2개가 있었다.

둥근 플라스틱 김치통을 줄에 매달아 그 우물 안에 담가두면 1년 내내 김치맛이 그대로 보존된다고 했다. 아마 요즘 김치냉장고의 원리가 우물을 연구해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

저녁 무렵이면 그 우물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식구들이 먹을 물을 길어 올려 챙겨 온 통에 담는 사람, 그 와중에 김치통을 우물에서 꺼내기 위해 줄을 당겨 올리느라 매달린 사람, 그 좁고 둥그런 우물에 사람들의 머리가 득시글 거렸다.

그럼에도 남의 집 김치를 훔쳐먹지도 않았고, 고만고만하게 생긴 김치통인데도 헷갈려하지도 않았다.  


우물 옆에는 막걸리를 배달하시는 효자언니네 집이 있었다. 그 집의 큰 딸이기도 하고, 큰언니와 친구라 여전히 이름을 기억한다. 어린 시절 아빠의 술 심바람(심부름을 그렇게 말씀하셨었다)을 많이 한 때문이기도 하고.


우물이 바로 옆이라 집 마당이 곧잘 보였는데, 마당에는 항상 하얀색 네모난 빈 술통들이 즐비했다. 아저씨는 그 술통에 막걸리를 가득 채워 오래된 자전거에 싣고 옆동네로 술배달을 다니셨다.


학교 끝나고 걸어오는 길에 빈 술통만 싣고 마을로 돌아가시는 아저씨를 본 적이 여러 번. 아저씨는 술을 팔고 오시는 건지, 함께 드시고 오는 건지 타고 가는 자전거가 비틀비틀. 매번 불안 불안했다. 아마 그때 음주단속이 있었더라면 백 퍼센트 걸리셨을 것 같다.ㅎㅎ


농사철이 되면 자주 나와 동생은 노란색 주전자를 들고 대문을 열고 나와 효자언니네로 갔다. 술 받아오라는 심부름이었다.

효자언니네 마당에서 서서 "술이요."라고 외치면 효자언니의 아버지든, 어머니든 느릿하게 고무신을 꿰어 신고 나오셨다.

그러곤 마당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아주 큰 통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든 막걸리가 잘 섞이도록 장대로 여러 번 휘휘 저으셨다. 그때마다 막걸리는 작은 회용돌이를 만들었다. 코끝에 닿는 술냄새는 싫었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보드라워 보여 손을 담그고 싶은 욕구가 자꾸만 치솟을 정도였다.


주전자에 술을 담아주면 동생과 나는 그걸 들고 언덕 위에 있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체구의 우리는 번갈아가며 들어도 자꾸만 앞으로 삐죽 튀어나온 주전자 주둥이에서 쿡쿡 쏟아지는 막걸리를 막지 못했다.  

이러다 얼마 남지 않게 될 것 같은 불안감에도 도대체 막걸리는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한 모금만 먹어볼까."


주전자 주둥이에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을 갖다 댔다. 들척지근하고 시큼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콱 들이닥쳤다. 맛을 느낄 새도 없이 꿀꺽. 두 살 어린 동생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지 입맛을 다셨다.


그날을 시작으로 막걸리 심바람을 나가는 날이면 우리는 몰래몰래 막걸리를 한두 모금씩 마셨다. 효자언니네서 우리 집까지의 거리가 멀지도 않은 데다 골목골목마다 집 대문들이 나있어 우리의 범죄는 쉽지 않았다. 때문에 취하도록 마셔볼 기회까진 오지 않았다.

아쉬운 건 아닌데 아쉽다. ㅎㅎㅎ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남짓 걸렸다.

학교 끝나고 걸어가다 보면 어쩌다 운 좋게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거나 아는 집 오토바이를 타기도 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많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리만큼 장대비가 쏟아졌고 동네에서 학교까지 난 작은 도로 옆에 있는 논에서 물이 넘쳐 도로로 마구 들이쳐댔다.

도로는 구불구불하게 나있었는데 집에 올 때까지 2번 정도 다리를 건너야 했다. 도로에 물이 들어찼으니 다리에도 범람한 것은 당연. 흙탕물 때문에 다리의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큰 다리도 아닌데도 그날은 물살이 몹시 쎄서 건널 수가 없었다. 자칫 물살에 휩쓸려갈 것 같은 두려움에 이도저도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다리 앞에 아이들이 몰려 서있게 되었다.


그때다.

비가 오는 날임에도 여느 날처럼 이웃동네로 술배달을  다녀오셨는지 우리 무리 뒤로  효자언니네 아버지가 서계셨다. 그날은 술도 마시지 않으셨나 보다. 평소보다 붉지 않은 얼굴이 다소 낯설었다.


"얘들아, 이거 하나씩 들어.

  그리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건너는 거다!"


아저씨가 우리들에게 건네준 것은 그 크고 하얀 술통이었다. 키가 크고 몸피가 컸던 아저씨는 입은 옷 그대로 잘 보이지도 않는 다리 위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그리고 다리 중간쯤에 중심을 잡고 서셨는데 거센 물살에 아저씨의 몸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술통을 배 아래에 깔고 나한테 한 명씩 와!"


(이미지 출처) 민속나라 블로그


아저씨의 목소리는 빗소리를 꿰뚫을 정도로 우렁찼다. 겁먹은 아이들은 그래도 하나둘 술통을 배에 갖다 대며 앞으로 걸어 아저씨에게로 갔다.

빈 술통은 튜브 역할을 하며 우리의 몸을 물 위에 띄울 수 있게 해 줬다. 그때마다 아저씨는 사람과 술통을 한 번에 잡아끌어 다리 반대편으로 하나씩 옮겨다 주었다.


아저씨는 온몸이 젖었다. 비인지 땀인지 모를 물이 아저씨 머리부터 줄줄 쏟아졌고, 두 발은 이미 물속에 있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었고.


대략 10명 남짓인 아이들을 그렇게 몇 번이고 움직여 옮겨놓으셨다. 그 와중에 아저씨가 물살에 휩쓸리지는 않을지 반대편으로 건너고도 두 손 꼭 쥐고 응원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아저씨는 그간 봐왔던 술꾼 효자언니네 아버지가 아니었다. 마치 만화영화 속 영웅처럼 그렇게 용감하고도 듬직해 보일 수 없었다.





베트남에 파견 나가 계신 분께 연락이 왔다. 그곳에는 연일 비가 계속 내려 홍보 경보까지 발령된 상태란다. 호텔 창밖으로 보이던 논밭이 물에 잠겨 농사짓는 분들이 걱정된다고.


오늘, 한국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그래서 막걸리, 아저씨가 생각났다.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능력은 대단하지만, 자연의 큰 힘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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