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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Sep 09. 2024

오늘따라 가시가 많네, 삼치구이

내 인생 메뉴 <반찬>편



입사 후 줄곧 홍보 업무만 해오다 15년 만에 조직문화를 담당한 적이 있다. 결코 짧지 않은 회사 생활을 해왔던 나는 나름 업무에는 잔뼈가 굵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때다. 그러나 1년 남짓의 그 시간은, 이후 현재까지 약 25년간의 직장생활을 통틀어 돌아봤을 때 가장 힘들고 자존감이 박박 갈렸던 때로 손꼽을 수 있다.


조직문화.

유연하고 젊은, 다양성을 지닌 사람들을 포용하자는 의미이지만, 정작 10년 전 내가 속한 조직문화 부서는 그렇지는 못했다. 그저 상사가 말하는 대로, 경영진이 원하는 방향대로 임직원들을 잡아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당시 경영진의 마인드는 그리 부드럽지 못했다. 생각이 굳었고 그래서 일명 MZ세대로 변해가는 세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경영진을 모신 나의 상사는 매우 꼼꼼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하게 모든 걸 체크했고, 대표이사의 눈치를 많이 보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나는 대표이사의 신년사나 창립기념사, 분기 경영현황설명회 등의 메시지 작성과 임직원과 함께하는 소통행사를 담당했었다.


철저히 문과였던 나는 전자 제품을 다루는 회사의 제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한 숫자 감각도 떨어져서 분기 설명회 때 점(,) 하나로 바뀌는 실적의 단위에 애먹어야 했기에 메시지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임직원과의 소통간담회는 보통 일주일에 1회 정도의 주기로 진행되었다. 현장사원, 수상 임직원, 여성 리더, 해외현채인, 사업부별 임원 및 부서장 등 그때그때마다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진행했다.


소통간담회를 준비하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철칙이 있었다. 바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챙기되 절대 대표이사의 눈에 띄지 말 것! 의전에 절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의전에 살고 의전에 죽는 대표이사였다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세세히 챙겨야 할 것들에는 간담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이력 정리는 물론, 대화가 중간에 끊어져 어색하지 않도록 사전 질문을 던져주는 것도 속했다. 또한 대표이사가 그 시점에 특히나 강조하는 경영방향의 키워드는 반드시 숙지하도록 알려주는 것도 내 역할이었다.


주로 중식은 회사 VIP식당에서, 석식은 외부 식당에서 진행되었다. 외부 식당은 체크할 것이 더 많았다.

주차장이 반드시 있을 것(물론 좁아서도 안된다), 대화에 소음이 섞이지 않도록 단독룸으로 예약할 것. 허리나 다리가 아픈 임원들을 위해 좌식이 아닌 의자가 있는 식당이어야만 했다. 그뿐인가. 화장실이나 잠깐의 통화 등으로 자리를 오갈 때 움직임에 용이하도록 의자와 벽 사이도 널찍한지 빠짐없이 챙겨야 했다. (임원들의 게걸음, 그러니까 옆으로 이동하는 건 '없어 보인다'는 게 그 이유)

특히 간담회 전날에는 기미 상궁처럼 그날 메뉴로 나올 음식들을 먼저 맛보기도 했고 순서대로 사진에 담아 보고서를 올려야만 했다.


점점 대표이사 메시지를 작성하는 것보다 소통간담회를 준비하는 품이 더 들었다. 처음 작성했던 매뉴얼은 간담회가 끝날 때마다 사례가 담긴 Lesson & Learn이 늘면서 점차 두께쌓아갔다.




그날은 회사 식당에서 중식 간담회가 진행되었다.  

나는 VIP 식당의 식사 준비상태를 체크했고, 참석자들의 출석을 확인했다. 그리고 날처럼 우렁각시마냥 식당 문 뒤에 숨어 대표이사와 (나의 상사인) 임원이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문을 닫았다.

여기까지가 그날의 내 역할.


그리고 나도 선약이 된 동료들과 어울려 식당에 갔다.

회사 밖 일본식 라멘집.

주문한 음식은 나왔는데 도무지 먹을 틈을 주지 않았다. 연속 질문이 담긴 메신저가 도착했다.


- 000, 저 친구의 전공은 뭐지?


- 000, 저 친구 고향은?


- 000, 언제 승격이 지?


"아니, 시작했음 됐지 뭘 그리 계속 물어!"


같이 밥을 먹는 동료들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테다.

대화에도 집중하지 못해 그저 미안한 마음이었다.


<오늘따라 생선에 가시가 많다.>


결정타였다. 휴대폰 메신저 창에 뜬 저 말을 보고 나는 그만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마침표가 찍힌 저 한 줄의 행간 사이에 생략된 상사의 말은 무엇일까, 두뇌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이날 나온 등 푸른 생선이 맛이 없다는 의미였을까. 참석했던 누군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다는 말이었을까. 대표이사가 싫어하는 생선이었나? 오늘따라 가시를 발라내기가 귀찮았던 것일까.

온갖 상황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선 가시까지도 뭐라 하네? 얼른 가서 빼뜨려."


같이 밥을 먹던 동료들의 원성과 비웃음이 들려왔다.

진짜 어쩌라는 메시지였을까.



예상했던 대로 간담회가 끝나고 상사가 호출했다.

생선 가시를 발라내느라 온신경을 집중한 나머지 누군가 대표이사의 말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질문에도 제때 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단다.

생선들이 연탄 불 위에서 펄쩍펄쩍 뛸 노릇이었다.


즉시 사내식당으로 가서 영양사 님을 만났다. 죄인(?)인 생선의 존재를 파악해야 했다.


삼치구이요. 전에도 종종 나왔던 건데? 매번 나오면 물리시니까 띄어서 나오는데, 오늘 오랜만에 내놓았더니..."


영양사도 기막혀했다.

어쨌든 삼치구이, 넌 오늘부로 간담회 메뉴에서 아웃!

매뉴얼에 추가되었다.






10년 전 일이지만, 조직문화를 하면서 가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조직문화가 좋아질 수도 있겠구나 싶은 순간들이 꽤 있었다.


생선 가시 하나 때문에 Lesson & Learn을 해야 했고,

참석자 중 누군가 경쟁사의 휴대폰을 쓰고 있었는데 그걸 사전에 확인하지 못했다고 해서 한밤중 상사로부터 폭언을 들어야 했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때의 상사께 고마운 마음은 또 있다.

해봤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홍보로만 한정될 수 있는 내 이력에, 그토록 미세하고 타이트한 업무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라면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 또한 조금은 '매의 눈'이 되어 후배들이 어떤 행사나 출장을 준비할 때 자꾸만 체크하게 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또한 대표이사의 메시지를 작성하며 회사의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이나마 배우게 되었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또다시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아니, 밥 한 끼 먹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런 것까지 확인해야 하는지 진짜 모르겠어요."


지금은 다른 회사에 다니는 선배님과 저녁식사를 하며 끊임없이 신세한탄과 푸념을 한 적이 있다. 석식 간담회가 진행되는 식당을 돌아보고, 기미 상궁처럼 밥을 먹어보고 보고해야 하는 일에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때였다.


"밥 한 끼라고 하면 대단하진 않지. 근데 대표이사의 밥 한 끼는 그저 밥 한 끼일까.

대표이사의 시급을 생각해 봐. 그 시간에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 안에서 뭔가를 묻고 얻어가고, 그런 시간이 불편하면 어떨까.

그 시간을 편안하고 의미 있게 만들 수 있게 준비하는 게 바로 네 역할이야. 네가 스스로 네 일의 가치를 만들어가야지."


대~~앵~~~ 크게 한방 맞고 말았다.

선배님의 말씀 덕분에 조금은 위안을 얻고, 내가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긴 했지만 여전히 저 생선 가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좋은 경험은 경험인 거고, 잊히지 않는 기억은 기억이니까.

시간이 좀 더 러 생선 가시가 훈훈한(?) 기억으로 희석될 날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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