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태어났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뭐가 유명한가 싶은데 가을이면 내장산의 아기단풍 소문을 듣고 꽤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그 내장산으로 가는 길에 고등학교 모교가 있다. 그리고 좀 더 달려가다 보면 꽤 크고 아주 깊은 내장호수와 마주하게 되는데, 그 호수 초입에서 멀지 않은 곳에 슬레이트 지붕을 인 한옥집을 볼 수 있다.
(불과 작년까지도 있었으니, 아직도 있으리라는 믿음!)
바로 고등학교 1학년 때 살았던 기숙사다.
시내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한 이사장은 내가 다닌 고등학교 외에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형편이 어려운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을 위한 시설도 몇 개 운영했다고 들었다. 내가 입학했을 때는 이사장의 나이도 지긋할 정도. 그래선지 하나둘 그러한 양로시설들을 정리하고 딱 하나만 남아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나둘 노환으로 떠나시면서 비게 된 양로원은, 학교 안에 있는 오래되고 낡은 기숙사의 신축 공사로 갈 곳 없는 1학년 학생들의 기숙사가 되었다.
기숙사생 중에는 시내 사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드넓은 논과 밭이 있는 농촌이나 소나 돼지를 키우는 산골에서 왔다. 시내에서 막차가 8시면 끊기는 지역 특성상 기본적인 등하교를 위해 모인 학생들이었다.
기숙사생들은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빨랫감을 담은 큰 가방을 들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 5시까지는 다시 귀소해야 했다.
다들 정이 많고 순수해서 일요일이면 그저 잘 빨아진 교복만 챙겨 오진 않았다. 대부분 과일이나 과자, 라면 등 일주일 동안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나눠먹을 것들을 싸들고 왔다. 그렇게 모인 먹거리는 거의 뷔페식이 따로 없을 정도로 종류도 다양하고 푸짐했다.
문제는 석가탄신일, 어린이날, 개교기념일처럼 주중 가운데 낀 하루짜리 휴일이었다. 매일아침 스쿨버스가 기숙사 마당으로 와서 기숙사생들을 실어가야 할 만큼 학교와 우리의 기숙사에는 거리가 꽤 있었다. 쉬는 날에는 스쿨버스 아저씨도 쉬어야 했으므로 우리는 학교 식당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 해의 석가탄신일.
그날은 날도 좋고 한낮에는 땀이 살짝 스밀 정도의 초여름 날씨였다. 주중 중간에 쉬는 하루이기에 집에 다녀오기도 애매했고, 5월 초 있을 중간고사를 준비한답시고 기숙사에 몇몇이 남았다.
(사실 그때가 시골에서는 가장 일손이 필요한 때라 집에 가기 싫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기숙사에 남은 학생들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봉지라면을 뜯었다. 잘게 부순 봉지라면 속에 스프와 양념스프를 넣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물 붓기.
봉지라면은 항상 감질맛 나게 아쉽다. 익혀야 하기에 잘게 부순 탓에 조각조각난 면발을 집에 올리다 보면 어느새 끝.
고향에선 허천나게'라는 표현으로 그 애달픔을 표현하곤 했는데, 정말 봉지라면은 항상 우리를 더욱더 허천나게 애간장을 태웠다.
"배가 하나도 안 부르다."
괄괄한 목소리에 남자 같은 성격을 지닌, 그래서 오히려 여자 선배들에게 인기가 많은 친구가 말했다.
사실 그랬다. 신물이 날 정도로 스프를 뿌린 생라면, 잘게 부숴 봉지에 물 부어 먹는 봉지라면은 입학 후에 이틀에 한 번꼴로 많이 먹었다. 새로운 음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야 해가 중천으로 오르는 한낮일 뿐이었다. 갖가지 과일이며 반찬, 간식을 든 친구들이 오려면 무려 대여섯 시간이나 남았다.
아점은 이렇게 때운다 치더라도, 2~3시쯤 되면 우리는 배고플 거고 무엇보다 허출할 성싶었다. 한창 자라나는 나이가 아닌가.
우리 밥 얻어먹으러 가자!
동네 어귀이기는 하지만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서 그간 슈퍼 외에는 왕래가 없었던 곳이다. 장난스레 내뱉은 누군가의 말에, 그날 기숙사에 남은 다섯 명은 그날 '꼭 해야만 할 일'로 여기고 꼼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단 불쌍하게 보여야 해, 새 옷이나 멀쩡한 옷 말고 뜯어진 옷이나 구멍 난 양말을 신어! 새 신발도 안돼, 삼색 슬리퍼 신어. 그 모자 너무 정상이야! 거기에 펜으로 좀 지저분한 모양을 만들어!
급기야 양로원으로 쓰였던 탓에 마루가 있었는데, 마루를 닦던 오래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수건 걸레를 목에 둘러멨다.
바지도 없어 보이게(!) 한쪽은 걷어올리고 한쪽은 정상적으로 입었다. 누군가 찾아온 엄마 걸로 보이는 빨간 바탕에 지도가 그려진 손수건까지 머리에 동여맸다.
그날 우리의 전략은 비렁뱅이! 그것이었다.
이제 밥을 얻어 담을 그릇을 준비할 차례.
평소 학교에서 돌아와 봉지라면을 해 먹었던 탓에 작은 그릇들은 있었다. 아직 귀소 하지 않은 친구들의 그릇까지 몽땅 챙겨 들고 드디어 대문을 나섰다.
아, 그때 카메라가 있었더라면.
(대학생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휴대폰을 썼다)
구걸에 나선 우리 5명의 모양새는 그야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불쌍하게 보이게끔 나름 꾸민다고 꾸몄는데 불쌍함보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어른들이 우리를 불쌍하게 봐줄 거야!"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문제.
시골에서 봄날은 논 일, 밭 일 하기 딱 좋은 때다. 동네 속으로 들어가 숟가락으로 양은 냄비를 쳐대고 소리를 질러대도 집은 대부분 비어있었다. 애먼 개만 컹컹 짖어댄 탓에 도망간 것도 여러 번이었다.
포기할까.
이렇게 꾸미기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ㅠㅠ
가만히 있었으면 배라도 안 고팠을 텐데, 마을 안으로 걸어오고 소리 질러댄 탓에 우리의 배는 곯아있었다.
"너네 현주 친구 아니니?"
기적 같은 목소리다. 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철제 대문이 열리더니 한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며 우리를 불러 세운 것이다.
손짓하는 아주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니 기숙사에서도 옆 방에 살던 현주라는 아이가 거실에 앉아있었다.
"오늘 마침 현주 할머니의 생신이거든. 동네 어르신들 모시고 식사하는데 잘됐다, 너희들도 오고,"
대박!
찾아 찾아 헤매다 발견한 집이 잔칫집이라니! 그것도 기숙사생 동창의 집! 현주는 그제야 집에도 못 가고 기숙사에 우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부침개며 떡을 들고 나와 상을 차려줬다. 그러나 잔치가 거의 끝나가는 탓에 먹을 것이 거의 동났다,
그나마 잔뜩 남은 게 잡채.
잡채가 얼마나 호사스러운 음식인지 그날 처음 알았다.
우리는 부랴부랴 젓가락을 놀렸고, 장난기 많은 두서 명의 친구는 그날의 콘셉트를 유지한다며 손으로 음식들을 집어먹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모두의 입술이 반질반질해질 정도로 잡채를 먹고 또 먹었다. 나는 그때 검고 푸슬푸슬한 것이 목이버섯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두둑해진 배를 하고 염치없게도 현주의 방에 나란 나란히 누워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특선 영화까지 챙겨보고서야 기숙사로 돌아왔다.
"너네 종일 굶은 거 아냐?!"
5시가 넘어 귀소한 아이들이 하나둘 보자기를 풀어놨다. 아, 이를 어쩐담. 그 음식들을 먹기에는 우리의 뱃속에서는 아까 먹은 잡채가 점점 몸집을 불려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