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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Aug 27. 2024

그 여름, 수박

내 인생 메뉴 <과일> 편


“얘들아, 과일 뭐 먹고 싶어?”

작은 애가 청포도를 주문했다. 큰 애는 수박. 그러자 작은 애도 수박도 먹고 싶었다고 실토했다. 6월, 아직 철은 아니지만 시장에 가서 있으면 사 오겠노라 했다. 재래시장엔 없는 게 없다.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수박 한 통을 사들고 오는데 그렇게 무거운 줄 미처 몰랐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를 따라 밭에 가는 날이 많았다. 머리 정수리가 는 듯한 뜨거운 여름날,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우리 밭에서 잡초를 뽑았던가, 호미를 들고 뭔가를 심었던가 매번 일은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우리 집 일을 자주 도와주셨던 먼 친척이었던 옥골 할매도 함께였다.


꽤 멀리 떨어진, 그러나 또렷하게 마주한 밭에는 많은 일꾼들이 한창 일하고 있었는데 바로 수박밭이었다. 해질 무렵 그토록 많은 수박을 실은 트럭들이 바삐 떠나고, 20~30명도 넘어 보이는 일꾼들도 저마다 포대자루에 수박을 잔뜩 챙겨서 봉고차를 타고 떠났다. 퇴근인 거다.


그렇게 여름 내내 몇 차례 수박을 따고 큰 트럭에 실어 보내고 나면, 수확의 끝물에는 동네 사람들에게 남은 수박들을 얼마든지 따가도록 허락했다.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었고, 얼마 후엔 밭을 갈아엎어야 했기 때문에 수박은 곧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취급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이고 지고 가는 수박 덕분에 오히려 밭을 정리하는 데는 수월해질 터였다.


엄마와 나, 옥골 할매는 여느 날처럼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날씨 한번 징그럽게 덥고만. 우리 목도 축일 겸 수박 따러 가자."

초등학생인 나보다도 작았던 옥골 할매는, 그러나 땅땅한 골격으로 농사일을 곧잘 하셨다. 더워서 짜증 난 데다 땅을 파도파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에 이력이 난 나는 곧장 옥골 할매를 따라나섰다. 맞은편 수박밭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수박밭의 일꾼들이 일을 마치고 갈 때마다 그랬듯 우리도 잔뜩 수박을 챙겨 올 생각이었다. 그래서 바퀴가 세 개 달린 삼발이까지 끌고 꽤 돌아 돌아가야 했던 그 수박밭으로 갔다.


수박밭에서 맞은편 우리 밭을 바라보자, 쪼그려앉은 엄마는 점처럼 작아 보였다.

땡볕의 여름, 후텁지근한 여름, 장마가 지나간 후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지열 때문에 밭은 하나의 온돌방처럼 푹푹 쪄댔다. 무엇보다 수박이 상처 나지 않도록 아래에 깔았던 짚이 썩는 냄새와 여기저기 곯았거나 깨진 수박의 냄새가 진동했다.


옥골 할매의 손놀림은 무척 빨랐다. 그 많은 수박을 어떻게 집까지 가져가려는지(그 밭에서 우리 동네까지는 걸어서 약 1시간 거리였다 ㅎㄷㄷ), 누가 다 먹으려는지 계산 없이 일단은 주워 담기에 바쁘셨다. 빨리 담고 빨리 벗어나자, 나도 그녀를 따라 크고 멀쩡한 수박으로 골라 포대에 담았다.



그리고 몇 발 더 갔을 때, 지푸라기 속에 동그란 얼굴을 내민 꽤 큰 수박이 보였다. 어린 내 눈에도 분명 상품가치가 있어 보이는데 그렇게 숨어있는 걸 보면, 아마도 일꾼 중 누군가 일을 마치고 가는 길에 챙겨가려고 했다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횡재다 하며 그 수박을 양손으로 끌어안아 가슴께로 올렸다.


그. 순. 간.

촤라라락....!!!!!

아래쪽이 썩었었던 듯 밑 빠진 수박에서 끈끈한 수박 액체와 함께 썩은 내가 진동했다. 막 다 지어진 밥솥을 열면 그 훈기가 얼굴에 와닿듯 그 수박의 썩은 내는 온전히 내 코끝에 와닿았다. 정말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웠다.




그날이다.

그날 이후 나는 절대 수박을 먹지도, 만지지도, 사실 보는 것도 싫어한다. 증오할 정도로.

여름날 버스를 타면 수박을 그물망에 싸서 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내 옆에 앉거나 서면 나는 그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거나 다음 버스를 탈 정도였다. 여름날 회사 식당에서 과일 후식으로 수박이 나오는 날에는 나는 식당 입구서부터 그 냄새를 알아차리고 그날은 굶거나 혼자 외식을 했다.


심리적인 알레르기라고 누군가 말해줬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동료들과 우르르 모친상을 당한 한 동료의 장례식장에 갔을 때다. 조문을 마치고 나와 간단하게 맥주 한 잔 하자고 호프집에 갔다. 과일샐러드와 치킨 등을 주문했고, 나는 의심 없이 과일샐러드를 먹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잃었다. 당황한 동료들은 나를 들쳐업고 조문 갔었던 그 병원의 응급실로 뛰어야만 했다. 마요네즈로 버무려진 과일 샐러드 속에 수박이 빼꼼 숨겨 있었던 거다.




결혼 전, 고향집에 갔을 때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우리 집은 노상 농사일로 바빴다. 농사 규모가 컸고 그래서 거의 매번 품삯 일꾼들이 있었다. 엄마는 일도 해야 했고 일꾼들의 밥과 때꺼리('새참'의 방언)도 챙겨야 해서 정신없으셨다.

“다들 목말라하니까 수박 좀 썰어서 비닐하우스로 가져오니라.”

아마도 잎담배 농사철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너무도 바쁜 마음에 내게 그렇게 말했다.


“엄마! 내가 어떻게 수박을 만져? 나 수박 알레르기 있는 거 몰라?!”

나는 온갖 짜증과 신경질을 모아 모아 엄마에게 대꾸했다. 수박 알레르기가 생긴 게 엄마와 일하러 갔다가 옥골 할매를 따라가서였다고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내 알레르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서운했다.

결국 바쁜 엄마가 신발을 꿰어 신고 와서 수박을 잘라 챙겨갔다. 그때 정신없이 움직이는 탓에 수박을 자르던 칼이 엄마 손을 베진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민첩하고 불안했다.

그렇게 결혼 전까지 나는 철저하게 수박을 외면했고, 식구들도 나에게 수박에 대해서는 권하거나 심부름도 시키지 않았다.


그랬는데... 결혼하고 애를 낳았더니 상황이 달라졌다.

여름날, 서너 살 된 큰 애가 열이 펄펄 끓는데 도무지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 했다. 물도 마시지 않으니 금방 탈수현상이 났다.

"수박이 단 맛이 있고, 수분이 많아서 먹이면 열감기에는 딱 좋은데."

전화기 너머로 친정 엄마가 매우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나는 또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내가 수박 알레르기 있는 거 기억 못 하시냐고 말이다. 혹시나 하고 말씀을 꺼낸 엄마는 무안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수박 얘기만 나오면 엄마는 그야말로 나에게 죄인이셨다.

그런데 결국 큰 애의 열감기가 심해지자 나는 마트로 달려갔다. 꽤 큰 수박을 사고, 그걸 내 손으로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렇게 큰 애에게 수박을 먹이며 어서 수분이 온몸에 퍼져 나가기를, 열이 떨어지기를 빌었다.


우리 집은 여름이라도 수박을 자주 먹진 않는다. 내가 여전히 싫어하고 못 먹으니 수박을 사 오는 일은 거의 없어 말이다. 그래도 이날처럼 두 딸의 과일 메뉴가 일치할 때는 사 오긴 한다. 그리고 수박을 썰 때마다, 아이들에게 줄 때마다 엄마한테 소리쳤던 그날들이 스르르 눈앞에서 펼쳐진다. 매번 부모님보다 자식들이 먼저인 나다. 그래서 죄송하면서도 또다시 같은 실수를 한다.

 



엄마는 잊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수박은 그런 음식이다.

먼 훗날 수박을 보면 가슴이 아려올, 숙연해질 그런 음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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