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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Oct 17. 2024

탐스럽고 옹골지구나, 복분자

내 인생 메뉴 <과일>, <주류>편


"엄마, 우리 집은 왜 먹는 농사는 안 지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경작했을 쌀이콩, 들깨, 참깨, 옥수수, 고구마, 고추... 모두 먹는 것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일하다가 중간에 바로! 먹을 순 없어서 한 말이었다. 친구 중에는 사과나무집도 있었고 방울토마토, 참외, (나는 먹지 못하지만) 수박 농사 등 따서 바로 먹을 것들을 재배하는 곳이 왕왕 있었다.


투덜거림 때문은 아니겠지만 몇 년 후 복분자 농사를 시작한 부모님. 한번 나무를 심으면 다년생이라 7~10년은 그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했다. 머리가 아프도록 강한 잎담배의 찐내가 싫었고, 매운 고추를 딴 후 무심코 눈을 문지르는 바람에 생고생한 게 여러 번, 어쩐지 이번 복분자 농사는 반가웠다.


오래 전 밭에서 찍은 사진


산딸기처럼 옹알옹알 생긴 알들로 이뤄진 복분자는, 보랏빛 영롱한 색을 내며 참 알차고 아름다웠다. 잎담배보다 향이 훨씬 좋고, 자루 가득 담았을 때 고추보다 가볍고 해서 나는 복분자 농사가 한결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서울로 떠나오면서 농사일을 돕는 횟수가 줄었기 때문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복분자를 수확할 수 있는 시기는 5월 말에서 6월 중순경으로 한 달이 채 안 됐다. 처음에 동글동글 예쁘고 탐스러웠던 열매는 날이 더워지면서 뭉그러지기 시작했고, 곧 시작되는 장마로 으깨졌다. 우수수 쏟아지는 장맛비에 속절없이 바닥에 나뒹굴기도 했다.

러니 3~4주가량 바짝 집중해서 열매를 수확해야 했다.


날마다 놉(일꾼의 사투리)을 얻는 것은 당연했고 주말이 되기 전 일손을 거들러 오라는 전화는 어렵지 않게 받을 때다.

처음 복분자 수확을 도우러 집에 갔을 때, 나는 밭고랑 첫돌머리에서 한참이나 서서 잘 익고 달큼한 복분자 생과를 주먹 한가득 따서 내 입 속에 몰아넣었다. 생각보다 큰 씨가 많아서 이 사이사이에 끼기도 했지만 무척이나 새콤하니 맛있는 기악이 남았다.


그래, 이렇게 먹으면서 농사도 짓는 거지…


비로소 농사일이 힘든 노동이 아닌, 농촌체험하는 듯 즐거운 일이라 여겨졌다. 그날 저녁, 똥이 시커매서 얼마나 놀랐던지. 복분자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한 채 후다닥 엄마한테 ‘피똥’ 쌌다고 말했다,


"그거 복분자 때문이야.”


아, 그렇군….

복분자는 손끝은 물론, 옷 여기저기에도 보랏빛 물을 들였다. 그 물은 세탁을 해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렇게 일손을 돕고 온 주말이면, 나 역시 엄마처럼 손톱 밑이 까매서 손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그때쯤, 엄마가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꽤 자주 다니셨다. 심장 부정맥으로 꽤 오래 고생하시다가 수술을 하셨던 것인데, 어느 해 6월 용산역으로 마중 나갔다가 나는 엄마를 보고도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엄마가 몹시 지쳐 보이는 데다 삐죽 말라있었다. 꽃무늬가 촘촘히 박힌 옷을 입고 앉은 엄마는 영락없는 시골 할머니였다. 마침내 다가가 엄마의 가방을 들어주려 손을 내밀었을 땐, 엄마 손가락 마디마디, 손끝 손톱이 까맣게 물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복분자 열매의 물이 든 건 줄 알면서도, 창피해하던 내 모습이 내내 치 영화를 보듯 내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시절은 우리 집이 농사짓던 때 중 가장 호황기가 아니었나 싶다. 람들이 '웰빙'이며, '건강'에 집중하기 시작할 때였고 복분자는 생열매로도, 복분자즙으로도, 그리고 담금주로도 여기저기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른 농사를 지을 때와는 달리 복분자는 그날그날 택배차에 실려 팔려나갔다. 그것은 곧 통장에 따박따박 숫자를 찍어냈다. 한창 돈 씨가 마르는 여름에 돈냄새가 난다니 참 반가웠고 그야말로 옹골졌다.

 

나도 회사 인트라넷 알뜰시장에 '부모님이 직접 농사지은'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kg 단위로 판매를 했다. 그렇게 바로바로 통장에 현금이 찍하는 것이 놀라웠다. 진작  이랬다면 그렇게 후덜 거리는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았어도 됐을 거라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탐스럽다, 예쁘다


년 이맘때였나.

정기검진을 받으러 서울에 오신 엄마는

꼭 쥔 주먹을 펴지 않았다.

밥 먹는 내내 숟가락을 앙 움켜쥐고 계셨다.


기차를 기다리며 엄마 손을 만지작하자

그때서야 수줍은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말하셨다.

 "사방이 복분자 물이 들어 시컴시컴해.

  부끄럽고만 뭘 만져."

엄마의 말처럼 손톱 밑이 까맸다.

손바닥의 지문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


올봄 찬 날씨 탓인지

열매가 크지 않다고 한숨짓던 부모님은,

수확할 때가 되자 오히려 동네에서 열매도 가장 크고,

빛깔도 곱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장미처럼 가시가 있어 팔목이며,

가끔은 얼굴에 생채기를 내는데도

꽁꽁땅꼼 담아지는 복분자 열매에 신나신 모양이다.


탐스럽다, 예쁘다.

울 부모님 웃게 해 줘서.


오래 전 밭에서 찍은 사진


 시절, 일기장 한 귀퉁이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었다.





복분자 농사를 하셨을 때, 엄마는 집에서 복분자주를 담그셨다. 판매용은 아니었지만 알음알음 아는 분들이 한 병씩 사가는 통에 해마다 담금술의 양은 점점 늘어났다.


엄마의 복분자주는, 아쉽게도(?) 너무 맛있다.

그 핑계로 와 동생은 자취방에서 2L의 꽤 많은 양을 앉은자리에서 비우곤 했다. 그 많은 술을  먹고 나면 우리는 몽롱하게 취해 이런 고민, 저런 고민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싸우기도 하고, 그걸 화해하기 위해 다음날 또다시 복분자주를 마시기도 여러 번.


동네에 막 새로 생긴 광명수산에서 회를 떠다 먹기도 했고, 음식 솜씨 좋은 동생이 후라락 만들어낸 안주에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소소하지만 행복했건 시간이었다.


엄마는 복분자주를 담글 때 항아리를 사용하셨다. 어린아이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항아리 앞에 빙 둘러서서 담금주의 뚜껑을 열고 콸콸 쏟아붓다 보면, 자꾸만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에 취할 정도였다.


몇 개월 잘 익혀 김장할 때 즈음에 가서 컵으로 살짝 떠서 마시곤 했는데, 시중에서 사 먹는 복분자주는 그저 달기만 한 음료로 생각될 정도로 톡 쏘면서도 진한 복분자주가 완성되었다.



복분자는 애증의 과일이다.

우리 집에 실로 오랜만에 윤택한 돈 냄새를 풍기게 해 준 고마운 존재. 동시에 심장 부정맥을 앓으면서도 해마다 더 많은 농사를 지으셔야 했던 엄마, 그리고 아빠를 보게 한.


이제는 복분자 농사를 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더 이상 손끝이 시커메지는 일은 겪지 않는다. 그럼에도 간혹 엄마의 복분자주가 그립다. 어쩌면 동생과 마주 앉아 복분자주를 따라 마시던 그 시절, 그 순간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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