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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Oct 14. 2024

빨간 맛, 딸기

내 인생 메뉴 <과일>편


"갑자기 자전거 타고 싶다."


"아이코, 근데 오늘은 오빠들도 학교 안 가서 다들 나와서 농구한다. 다음에 타자."


지난주 쉬는 날이 많은 때, 큰 애가 말했다.

작년 딱 이맘 때는 꽤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봄부터 시작한 병가가 거의 끝나가는 때라 작년의 10월은 어느 때보다 더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직장에 복귀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자전거 타는 건 가르쳐주자 맘먹었다. 학교 다녀와서 하루 한 명씩 1시간 가까이 자전거를 잡아주며 뛰어다녔다. 배우는 아이들보다 내가 더 힘들다는 건 그때서야 알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알려준 오빠에게 새삼 고마웠다.


앞 야외 농구장에서였다. 아직 중고등 남학생들이 학교나 학원에 있을 시간에 넘어져도 덜 다칠 맨들맨들한 바닥을 달리고 또 달렸다.

침내 두 녀석은 각각 자전거를 혼자 타는 데 성공했다.

아쉽게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혼자 자전거 타기를 하고는 내가 곧바로 직장에 복귀했고, 겨울이 찾아들면서 다시 타지 못했다. 올여름, 한참만에 탔는데도 다행히 큰 애는 잘 탔다. 심지어 출발하는 것부터 혼자서. 작은 애는 아직 못 태워봤는데 이러다 다시 겨울을 맞을 성싶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집에서 학교까지 한 시간 남짓 거리를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저학년일 땐 대부분이 그랬고,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남학생들이 한둘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더니 6학년 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지금도 놀이기구와 비행기 타는 걸 무서워하는 나는, 어린 시절엔 아빠가 태워주는 오토바이나 좌석이 없어서 서서 가야 하는 버스가 너무나 무서웠다. 우리 집은 언덕배기에 있었는데 그래서 출발 때부터 속도가 났다. 나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타고 있던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려서 아빠를 놀래기키도 했고, 많이 혼나기도 했다.

결국은 혼자 결어서 학교에 갔다. 언니오빠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 아빠가 다시 타라고 해도 나는 오토바이에 탈 용기는 없었다.


그런 내가 6학년 때, 오빠와 오빠의 동네 친구들 덕분에 자전거 타기를 배웠다. 이렇게 한 줄로 쓰면 아주 간단하게 타버린 것 같지만, 배우는 중에 속도를 올리는 오빠들의 장난에 뛰어내리는 바람에 무릎이 까지기도 했다. 흔들흔들하던 핸들을 어쩌지 못해 웅덩이에 빠질 뻔 하기도 여러 번.


드디어 배웠지만 내 자전거는 없었다.

아침 안개가 스산하게 낀 가을 어느 날, 좀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그리고 짝이 준비물을 집에 두고 왔다고 해 우리는 각자 남자아이들에게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녀오기로 했다. 걸으면 왕복 1시간 30분은 족히 걸릴 거리였으니.  


(이미지 출처) Pixabay


친구가 사는 동네는 큰 도로 옆으로 있어서 자전거 타기에 수월했다. 다만 버스나 트럭 등 큰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제법 쎈 바람에 자전거와 나는 같이 휘청휘청했다. 아직 자전거를 매우 잘 타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꽤 수월하게 왕복했다.


학교는 큰길에서 T자로 작은 시멘트 길이 교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교문으로 들어가기까지 약 50m 정도의 그 길엔 양쪽 화단에는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비켜! 악!"


큰길에서 교문으로 향하는 좁은 길로 자전거의 핸들을 꺾었을 때, 조금 내리막인 그 길에서는 속도를 줄여야 했다. 머릿속으로는 알겠는데 내 손은 움직이지 않고, 9시에 가까운 시간이라 등교생이 가장 많은 시간이었다.


꽝!!!


외마디 아우성과 함께 그대로 화단 단풍나무에 얼굴을 박으며 꼬꾸라졌다. 그 충격이 얼마나 쎘던지 나는 내 머리통이 박살 나는 줄 알았다. 등교하던 아이들이 놀라 멈춰 선 것은 물론이고, 교문 옆 관사에 사시던 담임선생님이 샘물에서 면도를 하시다 놀라 뛰어오실 정도였다.


뭔가 잘못됐음을 확실히 알았다. 너무도 아팠기에 창피하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들었을 땐 쌍코피가 터져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옷까지 뚝뚝 떨어진 피가 짙은 자국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이들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면도를 하던 선생님이 달려와 내 머리를 뒤로 젖혔다. 코피가 목구멍으로 역류하며 끄억끄억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비릿한 피냄새는 입으로 새어든 코피의 맛인지, 어딘가 터졌을 입안에서 나는 맛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참을 수돗가에서 지혈을 하고, 세수와 옷을 닦아내고 나니 그제야 자전거가 생각났다. 자전거가 없는 나는 송택이라는 친구에게 빌려서 탄 것이었다. 양쪽 콧구멍에 화장지를 욱여넣고 다시 화단으로 갔을 땐, 앞바퀴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고 가느다랗지만 땡땡하게 바퀴를 잡아주던 쇠로 된 것들은 너덜너덜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큰 일이었다.


정신 차리고 나니 그게 가장 걱정이 되었다. 먼저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 자전거를 학교 앞 자전거포에 맡겼다. 아저씨는 어쩌다 이런 거냐며 호들갑을 떨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전거를 고치는 데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얼굴이 왜 그러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경운기를 탄 아빠가 오고 계셨다. 그때만 해도 동네에선 경운기나 오토바이를 자동차 같은 운송수단으로 여겼다.


"달리기 하다가 넘어져서 모래에 얼굴을 갈았어요."


실은 멀찍이서 아빠의 모습이 보일 때부터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다, 쌍코피가 터진 것도 문제였지만 단풍나무껍질에 야무지게 갈아버린 얼굴은 심하게 상처가 났고, 군데군데 빠르게 멍이 들기도 했으니.


아빠는 조심하지 그랬냐며 한마디 하셨지만 순순히 넘어갔다.

휴, 다행이다.


일주일이 지나면서는 송택이를 피하기 시작했다. 열흘쯤 지나자 송택이도 집에서 혼나는 모양이었다.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며칠째 안 보이니 친구에게 빌려줬다는 말도 거짓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을 터. 속앓이를 했을 친구에게 여전히 미안했다.


"너 얼굴 어쩌다 다쳤어?"


사고가 있고 며칠 후,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을 때 아빠는 다시 내게 물으셨다. 틀림없이 크게 혼날 것 같아 대답도 못하고 숨죽였다.


"다쳤으면 다쳤다고 말을 했어야지. 흉 지면 어떻게 할라고. 그리고 친구꺼 자전거 망가뜨렸으면 빨리 말하고 고쳐줘야지 뭐 하는 거여."


친구는 윗동네 살고 있었다. 그 고장에서 나고 자란 우리 아빠나 친구의 아빠나 형님동생하는 사이, 그날 동네 가게에서 술 한잔 하다가 내막을 알게 된 것이다. 렇듯 언젠가는 들통날 일에 나는 매일매일 걱정만 하고 있었고.


평소였더라면 엄청 크게 혼났을 테다.

그런데, 단풍나무에 부딪쳐 쌍코피를 흘린 후부터 내게 신기한 일이 생겼다. 고개를 푹 숙여 어느 각도쯤 되면 2~3분 후 코피가 흐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간색의 코피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스러움과 측은함을 안겨준다.

그걸 몇 번 경험해 본 나는, 소리치며 혼내는 아빠를 피하고 보자는 심산으로 또다시 같은 행동을 해보았다.

역시나, 코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니 아빠는 더는 혼내지 못했다.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고개를 푹 숙이고 각도를 틀면 잠시 후 코피가 쏟아지는 현상은 이어졌다. 시험을 망친 다음 날, 공부하기 싫은 날, 혼날 일이 있을 때 나는 그런 식으로 코피를 쏟곤 했다.


그런데 이런!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집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서 작은 언니와 자취를 하던 시절엔  시도 때도 없이 이제는 의도하지 않은 코피가 났다. 한번 쏟아지면 쉽사리 멈추지도 않았다. 그때가 막 박찬호 선수가 LA다저스로 넘어가 새벽에 야구를 중계방송했다. 야구방송이 시작할 때부터 흘린 코피는, 곽티슈 한 통을 다 쓰도록 멈추지 않아 새벽녘 잠에서 깬 작은 언니가 나를 업고 응급실에 가기도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서울대입구역에 있는 꽤 큰 이비인후과에 갔다. 수술은 한 시간, 약 6시간 정도 안정을 취한 후 퇴원한다는 당일입원이었다.


"코 뼈가 엄청 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축농증을 앓았는데 코뼈가 휘어 콧구멍의 크기가 달라지는 비중격 만곡증까지 겪으면서 점점 부비동염이 심해진 것이다. 때로 내 코안에서 눅직한 고름의 냄새가 날 때도 있을 정도.

아마도 단풍나무에 박았을 때의 충격 때문이었으리라.  


부분 마취였던지라 수술하는 내내 나는 깨어있었다. 그리고 의사가 아주 힘들여 어떤 기구론가 내 코뼈를 바르게 세울 때, 뼈가 내는 그 끼익 거림을 듣고야 말았다. 세상에 그렇게 아프고 힘겨울 수가.

그렇게 수술한 후 코 안에는 각각 100장의 패킹솜이 극악무도하게, 아주 단단하게 박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혈이 되지 않아 코피가 나고, 위험해진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콧구멍에 패킹솜 100개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지만 직접 경험했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쁘지 않은 코가 아주 엉망이었다.

코주부도 이런 코주부가 없었지만 당장 월요일부터 출근을 해야 했기에 마스크를 끼고 나갔다.

양쪽 코가 막혔으니 입으로 숨을 쉬어야 했다. 오히려 마스크로 인해 입이 마르는 것은 예방되었으나, 문제는 물을 마시거나 뭘 먹을 때 도무지 삼켜지지가 않았다. 삼키려고  하면 숨이 턱턱 막혔다.


식당에서 밥 먹는 건 곤혹스러웠다. 한 숟가락을 뜰 때마다 마스크를 올렸다 내렸다 해야 했다. 마스크를 끼고 앉은 채 오랫동안 오물오물 씹는 것도 정말 쉽지 않았다.

새삼 평소에 느끼지도 못하는 숨 쉬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숨 쉬는 건 비단 코나 입 어느 한 군데가 아닌 양쪽이 다 사용된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일주일 간 찬바람을 맞아가며 퇴근길엔 수술했던 병원에 들러 패킹솜을 갈아 끼웠다. 여전히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콧 속에 밀어 넣는 패킹솜 때문에 힘겨웠지만 그나마 개수가 줄어드는 걸 보니 점점 나아지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일주일 동안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먹지 못했다.

냄새를 맡지 못하니 음식들의 맛도 느껴지지 않았고, 먹고픈 욕구도 생기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Pixabay


퇴근길, 집 앞에는 매일 용달차에 과일을 싣고 와서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따라 빨간색의 딸기가 매혹적인 자태로 자꾸만 나를 불렀다.


딸기 한 바구니를 사 와 단숨에 물에 씻었다. 여전히 패킹솜에 외부 공기가 차단된 내 코는 그 달콤하고 다디단 딸기향을 맡지 못했다. 찬물로 여러 번 헹구고 한 입에 쏙! 드디어 내 입안에 담긴 딸기는 적절한 무름으로 쉽사리 씹히며 많은 숨을 쉬거나 뱉지 않아도 되었다.

여전히 딸기의 향은 나지 않은데, 다소 차갑기까지 할 정도로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딸기의 육즙은 그 맛이 아닌, 그 시원한 감각에 그간 답답했던 마음이 해소되는 듯 뻥 뚫리는 느낌을 선사했다.


평생 먹어봤던 딸기 중 가장 시원했던(맛은 끝까지 느끼지 못했으므로) 때로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딸기를 보면, 코피를 흘리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다행히 그 수술이 잘되어 이후론 코피가 나지 않는다. 아주 가끔 코피가 아쉬운(!) 순간이 있기도 하지만 다시는 그 매운, 빨간 맛을 보지 않으리라.

그저 잘 먹고, 건강한 것이 최고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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