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하절기 교복을 차려입고, 식당에 들러 아침을 먹고 교실로 향할 때, 기숙사 건물 옆 언덕에는 남학생들이 줄줄줄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었다.
당시 남학생 기숙사 사감은 '양철진'이라는 이름보다는 '양철통'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수학 선생님이었다. 학생들 사이에 노총각 히스테리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자자했으므로 그날도 괜히 애들을 잡는(!) 줄로만 알았다.
까맣고 매끄럽게 닦인 아스팔트 위에 굳게 쥔 맨주먹은 자잘하고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돌멩이들이 파고 들어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아침부터 지글지글 타오르는 7월의 햇살은 엎드린 남학생들의 등에 여지없이 꽂혔다. 그 태양으로 인해 점차 끓어오르는 지열은 남학생들의 얼굴을 붉게 만들고 있을 터다.
교실에 들어서서야 남학생들의 이른 아침 행해진 기합의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어젯밤 포도밭에 도둑이 들었대. 참다 참다 포도 주인이 학교로 쳐들어왔다나 봐."
고등학교 앞에는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변하는 널따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 오른쪽으로 조금만 비켜 보면 꽤큰 포도밭이 여름에는 초록빛을 선사했었다.
"어? 어쩌지."
친구들의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오금이 저려왔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전날 밤 꽤 늦은 시간, 나와 단짝 난희, 그리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친구 하나까지. 우리 셋은 위아래로 검은 옷을 차려입고 학교 앞 청포도 밭에 서리를 하러 갔었다. 각자 세 송이씩만 따 가지고 방 아이들과 몰래 먹기로 했던 거다.
(방에는 1~3학년이 골고루 섞여 8명이 살았다)
보동보동 살이 오른 포도는, 그러나 아직은 덜 익은 듯 한 알 따서 입에 넣으니 코끝이 찡하도록 신맛이 전해졌다. 눈을 질끔 감았다 떴다.
"다음 주에 다시 올까?"
"아니, 그냥 오늘 따자!
간 큰 행동을 하고 있지만 그걸 두 번 할 자신은 없었던 나는 그날 그 숙제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어둠 속에서 속닥거리며 우리는 그나마 가장 땡땡하고 탱글한 포도송이를 고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학교 앞 포도밭은 그 해 풍년이었다. 송이도 잔뜩 달렸고, 그 알도 참 동글고 알찼다. 세 송이씩이라고 했지만 그 양이 생각보다 많아 티셔츠를 앞으로 잡아당겨 다부지게 쥐고 가야만 했다.
"누구세요?"
포도를 다 따고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앞쪽에서 사람인 듯한 형체가 움직였다. 포도밭주인이면 어쩌려고 그렇게 물었는지. 뒷일을 생각할 새도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학교 학생, 기숙사생이었다.
"맛있게 먹어라!"
평소 남학생들과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난희가 남학생 무리 중에 아는 이가 있었던지 말을 건넸다. 우리는 좁은 밭고랑에서 서로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비켜 지나갔다.
역시나 엎드려 있는 애들은 전날밤 포도밭고랑에서 마주친 남학생들이었다. 이번엔 기숙사 사감의 히스테리가 아닌 진짜 잘못해서 받는 체벌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우리 차례인가.
포도 서리를 계획했을 때부터 아예 생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막상 맞딱들이니 두려워졌다.
오전 내내 수업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나 저제나 매를 든, 담임일지 사감일지 모르는 선생님이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섰다.
점심시간, 기숙사생들에게 배식하는 식당에서 줄을 선 난희는 어제오늘 얼굴을 본 그 남학생을 발견하곤 씩씩하게 다가갔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평소에도 거침없는 난희의 성격상 확인하는 게 속 편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뭐라 뭐라 몇 마디를 나눈 난희는 돌아왔다. 그 모습이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장수의 모습처럼 그렇게 위풍당당할 수 없었다.
"우리 봤단 얘기는 안 했대."
난희가 건네준 그 말 한마디에 긴장했던 다리가 풀리며 후들거렸다. 생각보다 꽤 의리 있는 녀석들이군. 다행이다. 비로소 점심밥도 편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었다.
청포도보단 샤인머스켓이 눈에 띄는 요즘이다. 그래도 그 탱글탱글한 알맹이와 초록한 색감은 매번 청포도 추억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