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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Sep 03. 2024

한 병 말고 열 병, 청하

내 인생 메뉴 <주류>편


청하 공주.

매우 부끄럽지만 결혼 전 술자리에서 별명이었다. 맥주나 소주, 혹은 소맥을 주로 마셨던 회식 자리에서 고고하게(!) 혼자서 청하를 마신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고고하다는 것은 편견. 소주는 그 특유의 소독약 같은 알코올 냄새 때문에 도무지 마시지 못하겠고, 맥주는 잔의 크기부터 마시는 속도까지,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과는 보조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마시게 된 청하는 소주와 비슷한 모양을 해서, 병이 비슷한 초록색이라 식당에서 조용히 몰래 주문하면 모르고 넘어갈 때가 많았다. 반가웠던 건 청하가 의외로 나와 잘 맞았다는 사실! 


나와는 잘 맞았지만 청하라는 술은 많은 사람들이 즐기지는 않는 듯했다. 소주보다 도수가 낮아 밍밍하다는 말도 했고,  뭔가 달큼한 향과 맛도 있어 제대로 술을 마신 것 같지 않지만 어느새 취해버려 앉은뱅이 술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다음날 숙취는 또 어떻고.

그러기에 청하를 즐겼던 내게 지인들은 '주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알고 보면 그들이 마시는 소주의 양을 따라가지 못했을 것을.






청하 10병 마시고 결혼하자!


지금의 신랑, 그때의 남자친구가 되려던 우리가 두 번째 만났던 날, 낙지볶음에 청하를 마셨다. 신랑은 소주, 맥주, 소맥 등 주종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내 보조를 맞춰주느라 청하를 택했다.  


사보기자로 근무하던 시절이라 회사 내에는 얼굴로, 눈빛으로 아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인사를 나누진 않지만 서로 비켜가는 순간, “아, 저 사람도 나를 아는구나.”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007 작전이라도 펼치듯 나름 회사에서 떨어진 곳의 식당에서 접선했다. 청하를 꽤 많이 마셔 흥건하게 취했지만, 두 번째 만남이기에 나름 긴장했던 탓에 정신만은 또렷했다.


우리는 식당 안쪽의 작은 방에서 밥과 술을 먹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자꾸만 그림자 하나가 서성댔다. 처음에는 방을 잘못 찾은 사람이거나 지나가는 사람쯤으로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꽤 오랫동안, 종종 코를 박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누구세요.”


내가 자꾸 문쪽을 보자 신경이 쓰인 신랑이 문을 열었고, 문 밖에 회사 사람이 서있었다. 제조과의 그룹장님이셨는데, 그룹장님은 물론 그 부서를 취재한 적 있어 부서원 전체를 알기도 했다. 알고 보니 옆방에서 40여 명의 부서원들이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다고 피해온 게!


화장실에 다녀오던 누군가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나를 봤고 회식 자리에서 말을 꺼낸 거다. 꽤 친분이 있었던 그 그룹장님은 궁금함을 안고 손수 확인하러 오셨다.


“와, 술 엄청 많이 마셨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룹장님의 눈망울도 이미 술이 찰랑댔다.


“특이하게 청하네, 청하.”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룹장님도 배우자 분과 청하 10병을 마시고 결혼을 했단다. 마침 우리는 9병의 청하를 마시는 중이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다 결제할 테니, 한 병은 따로 주문해서 여기 남자친구분이 사요! 10병 마시면 결혼할 거야!"


청하 10병.


결혼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술을 좋아하는 커플이었다. 그러니 청하 한 병쯤 더 마시는 건 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날의 그룹장님 말씀 때문이었는지, 이후 한번 헤어졌던 우리는 다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론 꼭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란 건 우리는 알고 있다.


"꿈이 뭐예요?"


처음 만났던 날, 신랑이 내게 질문했다. 나는 그 물음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다 큰 어른에게 '꿈'을 묻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성인이 성인에게 '꿈'을 언급한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나는 성인이 된 후로도 글을 쓰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신춘문예 공모전에도 도전하고, 대학 편입과 대학원 입학을 순차적으로 하며 글 쓰기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루지 못한 것을 얘기하며 꿈을 키워갈 때 주변 사람들은, 심지어 같은 목표와 생각을 가지고 글을 썼던 사람들조차도 이구동성으로 한 마디씩 했다.


"배 부른 소리 하고 있네."


일찌감치 직장을 잡아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받아 사는지라 냉철한 사회생활을 모른다는 핀잔이었다.

글로 먹고 살기엔 희망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아가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글 쓰는 작가가 되는 거요."


조심스럽게, 그러나 너무나 소중하게 꺼내보인 내 꿈에 대해 신랑의 눈빛은 더욱 또랑또랑해진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건축사 공부를 할 겁니다."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하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서로 꿈을 가진 상대방에 감탄했고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동갑임에도 황송할 정도로 서로를 '존경한다'라고 말한다.

그게 청하 10병보다도 더 강력한 결혼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혼과 임신, 출산, 육아 등으로 이제 나에게 청하는 한 잔만 마셔도 머리가 핑그르르 돌아서 마실 수도 없는 도수의 술이다. 그만큼 술이 약해졌다는 말.


그래도 편의점 냉장고에 나열된 청하를 볼 때마다, 가수 청하를 텔레비전에서 볼 때도 나에게는 추억 어린 술이다.


신랑과 함께 타고 가는 차 안에서 종종 크리스토퍼와 청하의 콜라보 노래인 ‘When I get old’를 들을 때도 항상 빠지지 않는 추억담.





하를 마셨는데 18만 원이라고요?


신입사원 때부터 7년간 근무한 서울사무소 옆에는 남대문 시장이 있다. 남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사본 적은 많지 않지만 갈치조림 골목, 횟집, 포장마차가 즐비하게 서있는 골목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오래전 내가 속한 팀의 팀장이 승진을 하고 조직을 키워나가니 좋긴 한데, 본사인 수원으로 근무지를 이동하시면서 서울사무소의 직원 몇몇을 데리고 내려갔다. 그중 나도 있었는데 우리는 마치 외딴섬으로 유배라도 가는 듯 몹시도 불안했고 슬퍼했다. 우리가 사랑했고 즐겼던 장소를 떠나야 한다는 서운함과, 우리 몇을 내주고 서울사무소에 살아남은 부서장을 포함한 몇몇의 선배들 때문에 속상했다.  


당시 선두를 서야 했던 부장님과는 나는 ‘한 청승’에 코드가 맞았다. 수원으로 가는 날을 앞두고 우리는 있는 청승, 없는 청승을 다 꺼내보였는데 마지막 종지부는 남대문 포장마차였다.


포장마차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때는 서민적이고 운치 있지만 사실은 안주값이 꽤 비싼 고급 식당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카드 결제는 노, 현금으로만 결제되는 곳(15년도 더 전일이라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은행알 구이, 산낙지, 파전 등등 여러 안주를 맘껏 시켜서 먹고 청하를 곁들였다. 우리의 청승 중 하나는 가게 주인이 병을 치우지도 못하게 쭉 나래비 세우는 일이었는데 무려 8병이 넘었다.


“어, 술값이 꽤 나왔는데요."

(하고픈 말은 이랬지만 이런 똑바른 발음은 아니었을 테다.)


“야, 뭐가 문제야. 상관없어!”


또다시 부어라, 마셔라.


우리는 은행 ATM에 다녀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런데 술에 취하니 100m 인근에 있는  ATM기기를 도무지 찾지 못하겠다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수원에서 근무하는 한 부장님께 전화를 했다.


혀가 비틀어지고, 뒤틀린 채로 말했다.


“야, 너 여기로 와서 술값 계산 좀 해.”


나는 물론 부장님의 뒤에 숨어 숨죽이고 상황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1시간 남짓 지나 수원에 계셨던 부장님이 진짜 우리 앞에 나타났다.


1시간 남짓의 시간이 흘렀으니 나래비 세운 술병은 2병 더 늘어 10병이 되어있었고.


“이런 미친년들!”


수원에서 올라온 부장님은 우리의 상태를 보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것이 한심과 걱정, 이 위험한 세상에 여자 둘이!!라는 모든 감정의 함축적 표현이라는 걸 만땅으로 취한 그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포장마차에서 18만 얼마얼마. 그 액수를 기억하기에 나는 절대 포장마차가 서민적인 곳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도 아마 노래방에 갔었지, 아마?




얼마 전 청하 10병을 마셨다는 말을 들은 후배가 말했다.


“와, 3L를 어떻게 마시지”


“야, 무슨 3L야”


“청하 한 병에 300ml니까 10병이면 3L죠.”


“아, 맞네.”


둘이 마셨어도 1.5L가 되는 그 많은 청하. 이제는 청하를, 아니 음주를 예전만큼 하지 못하는 건 아쉬움일까, 미련일까.


한때 꽤 마셨던 술 덕분에 이제는 술생각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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