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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Oct 04. 2024

몰래한 사랑, 무화과

내 인생 메뉴 <과일> 편


시장과 마트에 무화과가 잔뜩 나왔다.

9월 초였나. 유명한 빵집 성심당에서 무화과 시루가 나온다는 대대적인 홍보물을 본 적 있고...


(이미지 출처) 성심당 SNS


그럼에도 나는 무화과를 돈 주고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누군가 마른 무화과를 주면 모를까 생 무화과는 한두 번 먹어본 기억 밖에 없다.

무른 식감과 내 맛도, 네 맛도 아닌 애매모호한 맛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마른 무화과에서는 단맛이 난다.






그럼에도 무화과에 자꾸 눈길에 가는 이유는, 아빠다.


빼짝 마르신 몸으로 봄이면 모를 심고, 여름이면 약을 치고, 가을이면 추수를 해야 했던 아빠는, 낭만이라곤 1도 없는 분이었다. 오히려 성마른 성격이라 자주 큰소리를 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더운 여름 한낮 낮잠을 주무실라치면 꼭 전축을 틀어 트로트 가요를 들으셨다. 마당에서 소일거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 집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볼륨을 높이고 노래를 들으셨다.


송대관, 현철, 주현미, 김지애 등등.


당시 내로라하는 트로트 가수들의 모음곡이었다. 더 신기한 것은 우리 집에 전축이 있었다는 것! 안방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넙죽하고 새까만 전축은, 뚜껑을 열어 LP판을 끼워 넣고 Play 버튼을 누르면 뱅글뱅글 두세 바퀴 돌다가 이내 그 간드러진 트로트 음악을 쏟아냈다.


어린 내가 그 노래들의 가사를 다 외울 정도로 아빠는 노래를  듣고 또 들으셨다. 아마 아빠의 노동요였던 듯. 그래서 무화과 과일을 보면 가수 김지애가 부른 <몰래한 사랑>이 떠오른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당시 여자로선 하기 힘든 쇼트커트를 하고,  무스나 스프레이로 한치의 움직임이 없도록 고정한 그녀의 머리스타일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조명을 받아 매끄럽고 힘 있어 보였다. 그래서 여느 여자 가수들의 여리함과는 달리 강인하고 강단 있어 보였다.


https://youtu.be/wFgrvX_1gkg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전혀 '몰래'할 것 같지 않는 <몰래한 사랑>을 부르는 그녀. 그 노랫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싶구나



(이미지 출처).Pixabay


그땐 너무 어려 노랫말의 뜻도 모르겠고, 무화과도 몰랐다.

이제와 무화과를 보며 우리 아빠에게도 애절한 시절이 있었겠지 싶다.

그게 어린 시절의 치기이거나 풋사랑일지라도.






노래 듣는 모습은 수없이 봤지만 노래 부르시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아빠의 목이 쇠었다. 매월 있는 모임에 다는 참석하지 못하시고 3개월에 한 번쯤 참석하시는 서울 모임에 다녀오신 후다.


아빠를 놀릴 생각에 농담으로 "노래방에라도 가셔서 마이크를 안 놓고 부르셨나~" 했는데 아빠는 쑥스러워하시며 "그렇다"라고 답하셔서 가족들이 모두 놀라 자빠질 뻔했다.


서울이 싫다고 하셨지만, 고향 친구들이 모두 서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서울에서 모임을 하셨던 아빠. 그렇게 한두 번 오가시면서 어쩌면 도시에서 살고 싶으셨던 적도 있으리라.

그러기엔 고향집 바로 아래엔 할머니가 살고 계셨고, 끝도 보이지 않는 들판과 밭뙤기를 어쩌지 못하셨을지도.


(이미지 출처) Pixabay


길눈 어둡던 아빠가 서울 모임에 발길을 끊은 건 코로나19 때문. 마침 딱 그때 하시던 동네 이장일도 임기를 다해 손놓으셨다. 그게 이유였을까.

그해 봄, 아빠에게 뇌경색이 왔고 기억도, 말도 많이 어눌해지셨다. 약 복용 상태에 따라 전혀 딴판인 사람이 된다.


안방에 누워 트로트 노래를 들으시던 모습이 선하다.

주무시는 듯 하지만 발가락을 까딱대시던 그 모습.

여전히 들어보지 못한 울 아빠의 노래도 궁금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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