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었던 시절 내장산 호수 앞에 자리 잡은 양로원으로 쓰였던 한옥집 기숙사에서 1학년을 보내고, 2학년 때는 학교 뒤 허물어져가는 기숙사에서 살았다.
학교 안기숙사라 휴일에도 식당을 이용할 수는 있었지만 비가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샜고, 여름이면 곰팡이와 쉴 새 없이 출몰하는 모기떼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3학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학교 내 공사 중이던 기숙사가 완공되었고 드디어 제대로 된 기숙사에 입주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진행된 공사라 졸업 전에는 들어가 보나 했는데 다행히 기회가 주어졌다. 시멘트 냄새 폴폴 풍기는 3층짜리 신축 건물. 방마다에 2층짜리 침대가 4개씩. 1~3학년까지 골고루 섞여 배정이 이뤄졌다. 나는 기숙사 입구, 사감실 맞은편 방에서 생활했다.
1학년과 2학년 때에는 사감 선생님이 딱히 없었다. 대신 남자 선생님들이 번갈아가며 한 달 정도씩 돌아가며 기숙사를 담당하셨다.
기숙사가 완공되어 1학년부터 3학년이 한 건물에 모여 살게 되자 옆 건물 남자 기숙사처럼 여자 기숙사에도 정식 사감 선생이 필요했다.
6월인가. 키가 꽤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선생님이 부임했고 사감이 되었다. 영어를 가르친다 했다. 1학년을 담당했던지라 우리 3학년과는 마주칠 일이 없었지만 기숙사 사감이 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얼굴이 새하얗고 항상 곱게 화장을 하고 다니는 사감 선생님은 막 대학을 졸업하고 왔으니 3학년인 우리와는 4~5살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으리라. 3학년 기숙사생들은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조차도 '공주병'스럽다며 괴상하고 과장된 표정으로 흉내 내곤 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블로그
그녀는 빨간 티코를 몰고 다녔는데 운동장에 주차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기숙사 앞에 그 차를 주차했다. 수업이 끝나면 매일 저녁 그 차를 몰고 어딘가 외출했다가 저녁시간 점오시간이 되기 전 들어오곤 했다.
고3에게는 백일주 이벤트가 있다.
기숙사에 거주하는 우리에게는 자칫 ‘퇴거’라는 벌칙이 주어질 수 있지만 1년 중 하루는 이제껏 사감선생님들도 눈감아 주었다고 선배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2학년일 때는 3학년 선배들을 위해 백일주 상을 차리기도 했었다. 암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기숙사만의 전통이기도 했다.
매사 기고만장하고 사감의 말에 하나하나 따지고 들며 말대꾸하는 고3의 멱살을 쥐어 기세를 잡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리숙해 보이는 게 싫었던지 이번 사감은 백일주에 대해서 깐깐했다.
백일주를 마셨던 다음 날, 그러니까 수능 99일 전, 기숙사생들이 등교한 후 기숙사가 빈 틈을 타 방 수색을 했고 침대와 벽 틈 사이, 매트리스 아래, 작은 가방, 서랍 등등에 숨겨둔 빈 술병들을 죄다 찾아내어 복도에 펼쳐두었다.
“감히 학생들이…”
억울했지만 벌점을 받았다. 너도나도 기숙사생이 전부 벌점을 받았으니 규정대로 퇴거시키진 못했다. 대신 우리는 단체로오리걸음으로운동장 3바퀴를 돌았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던 때였는데 그렇게 벌을 받는 동안 우리의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점차 어둠이 눈에 익어 달빛이 내리비추는 얼굴도 하나하나 선명하게 보였다.
맞은편 남자기숙사에서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남학생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남학생들은 백일주를 마시지 않았겠가. 그런데도 저쪽은 평온하고 우리는 이렇게 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하고 화가 났다. 하물며 남자 기숙사 사감은 '양철통' '미친개'라 불리는 선생인데도 순순히 넘어갔는데!
“이렇게 당할 순 없잖아!!!”
그날부터 우리는 소심한 복수를 시작했다. 번갈아가며 사감 선생님이 잠들었을 새벽이면 방문을 세차게 두드린 후 도망쳤다. 사감은 한 명이고 고3 기숙사생은 여러 명이니 우리에게는 한 번인 일이, 사감에게는 밤새 고통의 시간이었을 테다.
그렇게 이틀을 지났다. 만만치 않은 사감은 다른 일을 벌였다.
3학년은 1, 2학년보다 30분 정도 자율학습을 더 하고 하교했다. 다음날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기숙사로 들어가려는데 사달이 났다. 1,2학년생들이 모두 귀사하고 3학년 학생들이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사이 기숙사 현관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잘못했다고 항복하라는 거지?”
"웃기고 있네.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융통성이라고는 코빼기만큼도 없어가지고!"
고3 혈기왕성한 우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애들은 하나로 단결해 마침내 교실로 다시 가자고 했다.
그렇게 빈 교실 2군데와 복도까지 차지한 우리는 아예 그날 밤을 보낼 생각으로 저마다 바닥에 깔 것들을 찾았다.
실내라고 해도 9월의 새벽녘 온도는 꽤 서늘했다. 애들은 오들오들 떨었고, 책상 위에 눕거나 교단에 뻗어버린 애들 사이로 누군가 말했다.
“내일 모의고사에서 우리 모두 백지를 제출하자!”
"그래, 이런 상태로 밤을 보냈는데 어떻게 시험을 봐!"
이구동성으로 동의했다. 한 반에 35명쯤 그중 기숙사생은 열 명 남짓. 기숙사생들은 1학년 때는 대부분 학교와 집이 멀어 등하교가 어려워 들어온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고3은 달랐다. 등하교 시간이라도 줄여서 공부하려던 우등생들이 많았다. 백지를 내자고 주동하는 건 나 같은 (성적이 고만고만한) 무리였고, 담담히 팔짱 끼고 눈을 감고 있거나 불안에 떠는 건 우등생 애들이었다.
진짜로 교실 안의 나무 책상 위나 의자,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잠을 잔 우리는 해가 뜨자 뻑적지근한 몸으로 각자의 반으로 갔다. 일부러 세수도 하지 않았고 전날 입었던 교복에 양말과 속옷도 그대로인채였다.
수능을 앞둔 2학기 첫 모의고사는 중요하다. 2교시가 끝나고 교무실이 뒤집어졌다. 답을 쓴 OMR 카드를 걷어가 좌라락 넘겨보던 중 백지상태의 답안지를 본 것이다. 실수한 건가 싶어 같은 애의 1교시 답안지를 찾아보니 역시나였다고 했다.
그 애는 모범생이었다. 2교시 후 그 친구는 교무실로 불려 갔고 그 친구는 전날 밤새 있었던 일에 대해 무덤덤하게 나열했다(고 한다, 나도 들은 말이라)
금세 학교 내에 소문이 돌았고, 말로만 주동하고 행동하지 못한 애들은 잠잠해졌다. 평소 조용하고 공부를 꽤 잘하던 그 친구가 진짜로 그렇게 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거였다.
곧 사감에게로 선생님들의 원성이 몰렸다. 그때 선생님 심부름 때문에 교무실에 간 아이의 말에 의하면, 사감은 하얀 손수건을 꺼내 들고 눈물콧물을 닦아내며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모습에 다른 선생님들은 더 어쩌지 못하고 안절부절.
모의 수학능력평가가 끝나고 저녁식사 전, 교련 선생님은 여자기숙사생들을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전에 사감으로 받았던 벌과는 비할 바 아닌 고강도의 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허벅지에 알이 박히도록 토끼뜀을 뛰고 또 뛰었다. 그러면서 반성했어야 했겠지만 우리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사감에게 어떤 복수를 할지 몰두했다.
다음날 새벽 5시, 기숙사 문이 열리고 어슴푸레한 어둠 사이로 흰 교복 블라우스를 입은 몇몇이 바쁘게 기숙사 앞을 오갔다.기숙사 첫방에 살았던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숙사 앞에 세워진 빨간 마티즈 운전석 쪽으로 아이들이 뭔가를 끼워 넣었다. 질겅질겅 빠르고 열심히 씹어 부풀어진 껌을 모아 티코 운전석 손잡이 안쪽으로 붙어둔 것이다.
그리고 곧 차의 뒤쪽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는데 이미 모아둔 돌멩이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이번에는 나도 껌 씹기를 도왔다. 빠르고 질컥해지도록 씹어 돌멩이가 쌓인 곳에 껌을 뱉었다.
단발 머리를 한 친구가 기숙사에서 목장갑을 챙겨 나왔다. 그 모습을 보자 껌을 씹던 친구들의 턱은 보다 빨라졌다.
그리고 목장갑을 낀 친구가 끈끈한 껌과 돌멩이를 밀가루 반죽하듯 치대 작은 공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티코 배기통에 밀어 넣었다.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꼼꼼하게 땜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날 종일, 과연 저녁에 사감이 차를 몰고 외출을 할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했다. 기숙사생들이 몰리는 식당에서도 소곤소곤 오로지 그 얘기뿐이었다.
드디어! 해가 저물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하교하는 아이들을 태운 스쿨버스가 떠나 적막함이 내려앉은 학교 안. 갑자기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던 소리였기에 우리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쾌거의 환호성을 질러댔다.
걸려든 것이다. 운전석 문을 열려고 손가락을 넣었던 사감의 손에 껌이 붙었다. 아침에 붙여 시간이 지났을뿐더러 9월의 차가워진 저녁공기에 껌을 다소 굳어져 잠시 물컹, 만 한 것 같다.
문제는 배기통. 제법 뭉툭하게 뭉쳐진 껌이 단단히 배기통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던 거다. 사감은 손에 묻은 껌을 떼내며 툴툴, 시동을 걸었다. 여러 번 부릉대던 차는 시동은 안 걸리고 차 안에 매연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배기통을 통과하지 못한 연기는 이내 모터를 다 태우고 만 것이다. 그렇게 첫 출근 기념으로 구입한첫차였을 자동차를 잃고서야 사감은 끝내 우리에게 항복했다.
“졸업할 때까지 너희, 건드리지 않을게.”
그렇게 수능까지 남은 3개월을 사감은 고3 학생들을 터치하지 못했다. 약 일주일 간의 사투 끝에 쟁취한 자유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우리가 한 행동은 하마터면 화재가 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지금은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그 사감께, 죄송할 따름이다.
휘영청 달이 뜬 9월이 되면, 그날 달빛 아래서 기합을 받으면서도 또랑또랑 눈빛이 빛나던 친구들의 모습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