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회사 승격발표가 얼마 남지 않은 아침, 알람소리에 눈을 뜬 순간 나는 픽 웃고 말았다. 꿈은 너무나 선명했고, 왜 그런 꿈을 꿨는지 속사정을 알기에 그 순간 부끄러움이 물밀듯 몰려왔다.
꿈에서는 어릴 적 우리 집에 이모삼촌 등 친척들이 다 모였던 때처럼 와글와글한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 엄마와 이모는 젊은 시절의 모습인데, 나와 이모딸인 사촌은 회사에 다니며 애엄마인 지금의 모습이었다.
"엄마, 저 부장 됐어요!"
꿈속에서의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그 소식을 알렸다. '엄마'라고 불렀지만 내 시선은 이모에게로 향해있었다.
'이모, 보셨죠? 제가 이런 사람이에요!'
마치 제삼자의 시선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듯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이모와 사촌을 차례로 돌아보는 나를 보았다.
나는 긴 시간, 어렵게 성취할 것을 앞두고 어쩌면 어린 시절 어느 때, 나에게 모욕이나 창피함을 안겨준 사람에게 떳떳하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속내가 내내 자리 잡고 있어 결국 그런 꿈을 꾼 게 아닐까. 그래서 꽁해있는 나를 누군가에 들킨 것처럼 창피함이 몰려왔다.
나에게는 동갑내기 사촌이 세 명 있다. 뒷집 사는 작은 아빠 아들이자 어린 시절 늘 함께 했던 독수리 오 형제의 멤버, (커서야 성남인 걸 알았지만) 서울사시는 고모의 아들, 그리고 김포공항 근처에 사시는 이모의 딸.
다섯 살이 되기 전부터 귓병을 심하게 앓았던 나는, 농사일이 끝난 겨울이 되면 엄마를 따라 서울에 갔다. 이비인후과 치료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때는 의료보험이 전국적으로 적용되기 전이라 내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면 의료보험을 적용받을 수 없었다. 나는 매번 나이가 같고 성별이 같은 이모 딸, 사촌의 이름을 빌려야 했다.
치료 기간 동안엔 숙식도 이모댁에서 했다.
새캄새캄하고 촌스러운 나와는 달리 반으로 갈라 묶은 사촌의 머리엔 항상 리본핀이 있었고 어느 해에는 꼬불꼬불한 파마스타일이기도 했다. 좀 더 커서 나는 사촌을 '서울깍쟁이'란 별명을 주었는데(물론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쭉 나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나는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 공연히 사촌의 눈치를 보곤 했다. 나로 인해 혼자 쓰던 방을 같이 생활했어야 하니 단 며칠이라도 불편함을 준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동갑인데도 우린 친해지지 못하고 겉돌았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는 겨울방학이라도 사촌은 늘상 학원이며 교회에 나가기 바빴고, 나는 사촌이 던져두고 나간 피아노 학원가방을 조심스레 들어 책상 옆에 가지런히 두었다. 오후면 햇볕이 잘 드는 거실 한켠을 차지한 그랜드피아노를 치는 사촌의 모습은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엄마, 내가 병원에 간 것도 아닌데 약봉투에 왜 내 이름이 쓰여있어!"
내가 병원에 가려고 서울에 온 것도, 그러는 동안에는 사촌의 이름을 빌려 쓴다는 것도 진작 알고 있지만 사촌은 꼭꼭 한 번씩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앙칼진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 지르면서도 이모가 그러지 말라며 혼낼 때면 들리지도 않을 거라며 답하는 사촌의 답을 다 듣곤 했다. 중이염과 이명, 난청이 있는 것이지 말소리가 안 들리는 건 아니었으니.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는 엄마에게 일이 있어 외할머니 손을 잡고이모네 집에 갔다. 사촌의 졸업식은 내가 다닌 학교보다 늦게 진행되었다. 덕분에 도시 학교의 졸업식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떠나는 6학년과 보내는 5학년 학생들,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이 다 모여도 강당의 절반이 비었던 모교와는 달리, 사촌이 다니는 학교의 졸업식은 대단했다.
학교 건물은 여러 동에 4~5층은 되어 보일 정도로 컸고, 그 안을 많은 학생들이 빽빽하게 차고도 남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수업을 했다고 했다. 때문에 그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어서 졸업식은 각 반으로 송출되는 텔레비전을 통해 진행되었다. 학부모들은 복도에서 까치발을 해가며 기웃거렸고, 키가 작은 나는 몇 번 기웃대다가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런 졸업식은 나에게 문화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날이었다.
졸업식을 마치고 이모네 가족과 함께 경양식 식당에 가서 밥을 먹게 되었다.
동그랗고 하얀 접시 위에 두툼한 튀김옷을 입은 돈가스가 정갈하게 놓였고 그 위에 맛깔스러운 갈색 소스가 멋스럽게 뿌려졌다. 돈가스 곁으로 마요네즈로 버무려진 마카로니와 옥수수알이 보이고, 동그랗게 모양을 낸 쌀밥, 양상추와 양배추가 섞인 샐러드에 하얀 소스를 얹은 부재료들이 다닥다닥 배열된 음식이었다.
조도가 낮고 테이블 한가운데 켜둔 촛불은 경양식 식당의 분위기를 한층 고급스럽게 했다.
나는 처음으로 맛볼 맛깔스럽고 신비한 음식에 조금 긴장했다. 그래서 이모네 가족들을 차례로 돌아봤는데, 그날의 주인공인 사촌은 내내 불퉁불퉁했고 이모는 그런 사촌의 눈치를 살피느라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너도 이번에 졸업했지? 졸업 축하해."
언제나 친절하셨던 이모부가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곧 냉랭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내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셨다. 그 틈을 타 외할머니는 시골서 온 내가 주눅 들지 않도록, 외할머니 입장에서 비록 시골서 농사짓고 살지만 큰딸이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고 대변하고 싶으셨던 듯 한 마디를 하셨다.
"졸업식에서 상도 받고 장학금도 받았어. 아주 대단하지."
한껏 고양된 외할머니 목소리 위로 다소 신경질적인 이모의 목소리가 덮였다.
"엄마, 그런 소리 마요! 이번에 장학금 받는 거였는데 10월에 전학 온 애한테 밀려서 그 장학금을 뺏겼잖아. 예전 학교서 못 받을 거 같으니까 부랴부랴 전학 온 거라는데 우리가 얼마나 원통해? 쟤네 학교는 짝잖아. 졸업생이 오십 명은 되니? 그렇게 코딱지만 한 학교에서 상장 하나 못 받으면 그게 바보지."
불과 열세 살이었지만 나는 알았다. 갑자기 나타난 다른 애에 밀려 제 것인 줄 알았던 상을 놓친 딸의 심정을 헤아려 위로의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걸 말이다. 단지 상심한 딸만을 생각하느라 동갑내기 조카를 깎아내리는 배려 깊지 못한 표현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
그렇게 이해는 하면서도 어쩐지 그날 나는 너무 너무나 창피했다. 인프라가 뒤쳐지고 학생 수도 코딱지만 한 시골에서 뭔가를 잘한다고 말하는 건 자랑이나 축하받을 일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일이구나. 나고 자란 고향이 이토록 나를 부끄럽게 하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잘하기로 맘먹었다. '맘먹었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맛있는 음식의 맛도 음미하지 못한 채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 덩어리를 씹어 넘기느라 바빴던 그날을 오래도록, 그렇게 잊지 않고 기억하기로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까진 고향에서 더 살아야 할 테니 같은 리그에서 경쟁할 대학 때부터 사촌을 밟아줄 생각을 했다.
더 좋은 대학에 가야지, 더 좋은 곳에 취직해야지, 더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더 좋은 곳에 살아야지.
잊었다 생각하면서도 중요한 터닝포인트, 혹은 선택의 순간에 내 무의식은 매번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래서 몇 번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도 누가 봐도 괜찮은 것에 손을 뻗었고, 몇 번은 그렇게 간 길이 영 체질에 맞지 않아 그만두기도 했다. 지금 다니는 회사도 처음엔 별 뜻 없이 다니기 시작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부모님의 어깨가 펴지시는 게 보이고 점점 나를 치켜세워주는 친구들을 보며 계속해서 다니게 된 것도 있다. 이제는 그게 내가 아닌, 그 기업에 보내는 찬사라는 걸 알지만 명함을 준 회사의 이름이 어디인가에 따라 보는 눈,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는 걸 충분히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그 힘이 되는 명함을 쉽사리 내던질 수 없다.
이모는 오래전 여러 차례 뇌종양 수술을 받으시고 현재는 혼자서는 생활할 수 없는 몸이 되셨다. 이모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사촌동생의 결혼식에서였는데 식사하시는 이모 곁에 사촌이 붙어 앉아 수발을 들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결혼해서 두 명의 딸을 낳았던 사촌은 꽤 고단한 시집살이를 하며 산다고 들었다. 꼬장꼬장한 사촌의 시모는 때때로 아픈 이모를 들먹이며 가까이 살며 가끔 들여다보는 것도 눈치를 준다는 거다. 게다가 아들이 귀한 집이라 사촌은 아들을 낳기 위해 셋째를 임신 중이었다.
나는 막 한 살이 지난 딸을 품에 안고 이모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했다. 당당하게 잘 사는 멋진 어른이 되면 그날의 이모께 어떤 식으로 상처를 줄까 고민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 이모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신다. 이모께 서운한 건 많지만, 어쩌면 이모의 그 독한 말이 비수가 되어 나를 열등감 덩어리로 살게 하셨다. 그게 비록 내 삶의 1%밖에 되지 않을지언정 살면서 내내 무의식 깊이 새겨져 불을 댕기는 부싯돌이 되었다고 인정한다.
"시댁서 아들 낳아야 한다고 한다면서 셋째까지도 딸이라 어쩌니."
그날 나는 위로하는 척 결국 그 말을 사촌에게 내뱉고 말았다. 당시 그럴 의도는 정말 아니었는데 그 말은 비수가 되어 사촌에게로 날아들었을 테다. 분명 작정한 게 아닌데 어릴 적부터 뭔지 모르게 불편했던 사촌에게, 매 순간 나를 내려보는 것 같은 시선을 가진 사촌에게 한 소심한 복수였으리라. 그러니 이리도 오래도록 내 입에서 나간 그 말이 계속 생각나는 거겠지. 그리고 어쩌면 이번엔 내가 사촌의 가슴에 영영 지우지 못할 말로 생채기를 낸 것 같다.
그 후로 10년 남짓 사촌도, 이모도 뵌 적이 없다. 간간히 엄마를 통해 전해 듣는 소식뿐. 마지막 말은 하지 말걸, 역시 불편한 건 화내고 못된 말을 하는 사람의 몫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