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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r 08. 2020

누가 누가 더 큰가

엄마가 쓰는 동화 6

“내가 작다고? 무슨 소리야. 네가 더 작지.”

“웃기고 있네. 내훨씬 커.”

“조용히 해 땅꼬마들아. 내가 여기서 제일 커. 내 뾰족한 엉덩이 맛을 봐라!”

땅에 떨어진 도토리들이 데굴데굴 부딪히며 서로 싸우고 있었어요.


아무리 투닥거려도 도저히 결판이 날 기미가 안 보이자, 도토리들은 두리번거리며 다른 친구를 찾았습니다.

“어이! 거기 산비탈에 있는 꼬맹이. 네가 이리 와서 우리 중에 누가 제일 큰지 좀 봐줘.”


뭐? 지금 누구더러 꼬맹이라는 거야?”

산비탈에 떨어져 있던 밤송이가 데굴데굴 굴러왔어요.

데굴데굴, 데굴데굴. 데구르르르르르.

어라? 크네?

조그맣다고 생각했던 밤송이는 가까이서 보니 도토리들보다 훨씬 컸어요.


“누가 꼬맹이라고? 다시 한번 말해 봐.”

“어, 여기서 볼 땐 되게 조그맣게 보였는데.”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면 안 돼.”

밤송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도토리들에게 말했어요.


살짝 기가 죽은 도토리들은 머쓱해졌어요.

그러다가 한 도토리가 나섰어요.

흠... 우리보다 키가 클 진 몰라도 넌 못생겼어. 삐죽삐죽 그게 뭐야.”

“맞아 맞아. 보기 흉해.”

“와하하하하. 삐죽이래요. 못난이래요.”  

지금까지 서로 싸우던 도토리들은 금세 한 마음이 되어 산비탈에서 굴러온 밤송이를 놀리기 시작했어요.


약이 바짝 오른 밤송이가 쩍, 껍질을 벗자 반짝반짝 윤이 나는 탐스러운 밤알이 데구루루 굴러 나왔어요.

어? 안에 예쁜 게 들어있었네?

"쟤 뭐야... 우리들보다 반짝거려."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고 했지. 이 꼬맹이들아.”


“하하하. 너희들 진짜 웃긴다. 꼬맹이가 꼬맹이 보고 꼬맹이래. 다들 땅에 붙어 있는 주제에. 야, 너희들 내려다보느라 내 목이 다 아프다.”

밭두렁에서 길쭉한 파가 매운 냄새를 한껏 풍기며 뻐겼어요.


“하지만 밤톨 말이 맞아.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면 안 돼.”

파 옆에 있던 키 작은 무청이 시든 잎을 꼬아 팔짱을 끼며 말했어요.


“뭐라고? 내가 내려다봐야 하는 난쟁이 주제에 잘난 척은. 에잇. 내 매운맛 좀 봐라.”

파는 입을 쩍 벌려 무에게 매운 입냄새를 하아악 쏘아 줬어요.

아우 냄새.

무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코를 쥐고 얼굴을 돌렸어요.


타닥타닥.

어디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나네요.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게 무와 파를 조금 뽑아오라는 부모님 말씀에 단이가 밭에 나왔군요.

쑤욱. 쑤욱. 앙증맞은 손으로 파를 두 뿌리 뽑아 바구니에 넣습니다.

파는 신이 났어요.

“후후. 드디어 이 몸이 쓰이는군. 이 땅꼬마 녀석들아, 이제 안녕이다.”


낑낑낑.

아휴 힘들어.

땅에 단단히 박혀있는 무가 나오지 않아 단이는 쩔쩔맸어요.

오빠를 불러볼까 했지만 나도 혼자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요.

파가 든 바구니를 팽개치고 양 손으로 무청을 단단히 잡고 영차 영차 여엉차.

쑤우우우욱!

아주 커다랗고 탐스러운 하얀 무가 뽑혔어요.


바구니에 무가 나란히 눕자,

어라?

무는 바구니 밖으로 뿌리가 한참이나 나올 만큼 키가 컸어요.

파는 무보다 훨씬, 훨씬 작고 가늘었지요.

"뭐야... 안 보이는 곳에 그런 게 들어있었을 줄은."

당황한 파는 돌아눕고 말았어요.

“거 봐.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고 했지.”

무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말했어요.


단이가 깡총거리며 내려가고 난 자리에, 아까 팽개쳐진 바구니에서 떨어진 작은 콩알 하나가 데구르르르 굴러 도토리들 앞에 섰어요. 자기들보다 훨씬 작은 콩알을 본 도토리들은 아까 일은 잊고 또다시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어요.

“와하하하. 정말 꼬맹이 중의 꼬맹이다.”

“땅꼬마래요. 쥐똥만 하대요.”


훌쩍, 훌쩍,

가엾게 울고 있는 콩알을, 근처에 있던 돌멩이가 따뜻하게 발아래 품어 주었어요.

“울지 마. 키가 작다고 속상할 이유는 전혀 없어.”


울음을 그치지 않는 콩알을 달래며 돌멩이가 말을 이었어요.

“나는 원래 아주 커다란 바위였어. 내가 몸이 클 때는 큰 대로 재미있는 일이 많았어. 아이들이 내 위에 올라가서 소꿉놀이도 하고, 지나가던 나그네가 나한테 기대 낮잠도 잤지. 나를 무대 삼아 노래를 한 곡 뽑는 사람들도 꽤 있었단다. 정말 즐거웠어. 나는 노래를 좋아하거든.”


"정말요? 그렇게 큰 바위였다고요?"


“응. 하지만 지금 이렇게 작은 돌멩이가 되니 작은 대로 또 즐거워. 발에 차여 여기저기 굴러다닐 수도 있고, 키가 작아지니까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것들이 보여서 좋아. 열심히 먹이를 옮기는 개미들의 행렬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새싹이 피어나는 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거든. 저번에는 단이 오빠 한이가 떨어뜨리고 간 유리구슬이 햇빛을 받아 무지개 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느라 하루가 금방 지나갔지. 오늘도 이렇게 너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참 좋구나.”  


“하지만 저는 이렇게나 작고 보잘것없어요.”

콩알이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말하자, 돌멩이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어요.

“그렇지 않아. 정말 중요한 건 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하는 거야.”


“제 안에 든 것이라고요?”

“그래. 나는 오래오래 살아서 제법 많은 걸 보아왔단다. 세상에는 겉모습이 크기만 하고 속이 텅 빈 녀석들도 있고, 아주 작지만 그 안에서 놀랄 만큼 커다란 것이 자라는 녀석들도 있지.”

“이렇게 작기만 한 제 안에도 뭐가 들어있을까요?”

“그럼. 너도 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곧 보게 될 거야. 내 말을 믿고 한 숨 푹 자렴.”  


그 뒤로 콩알과 돌멩이는 좋은 친구가 되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돌멩이는 호랑이며 도깨비가 나오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콩알은 귀여운 목소리로 돌멩이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지요.


촉촉하게 내린 가을비로 땅이 푹신푹신해진 어느 날, 콩알이 탄성을 질렀어요.

“돌멩이님! 제 몸이 간질간질해요.”

“그래. 때가 되었나 보구나. 이제 네 안에서 예쁜 것들이 나올 거야.”


하룻밤, 이틀 밤, 사흘 밤을 자고 나니 콩에서 예쁜 싹이 돋았어요.

“돌멩이님! 이것 보세요. 저에게 작은 날개가 생겼어요.”

“하하하. 정말 예쁘구나! 축하해. 이제 잘만 하면 네 키가 나보다도 훨씬 커질걸.”

“제가 돌멩이님보다 커진다고요? 세상에. 믿을 수 없어요.”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 가을에 싹이 나면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한단다. 낙엽을 푹신하게 잘 덮고 힘을 내 보자. 그리고 내년 봄이 되면 저 나뭇가지에 줄기를 잘 감고 키를 쑥쑥 키워 보는 거야. 내가 여기서 지켜보면서 도와줄게. ”


콩알도 돌멩이도 가끔 입을 꾹 다물고 신음소리를 내며 참아야 할 만큼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어요.

힘든 겨울을 잘 이겨낸 콩알은 돌멩이보다도, 단이보다도, 단이 오빠 한이보다도 키가 큰 콩줄기가 되었지요.

“제 키가 이렇게 커지다니 꿈만 같아요.”

“네 키도 크지만, 정말 큰 것은 힘들 때가 있어도 즐겁게 노래를 부르던 단단한 네 마음이란다.”

돌멩이가 인자한 얼굴로 콩줄기를 올려다보며 말했어요.


바삭바삭한 노란 햇볕이 내려쬐던 날.

콩알은 작은 요정들의 부채 같기도 하고 귀여운 나비 같기도 한, 백색과 자색의 예쁜 꽃들을 피웠답니다.  

콩줄기가 꽃들과 함께 부르는 합창을 흐뭇하게 감상하던 돌멩이가 나지막하게 읊조렸어요.


“저렇게 예쁘고 귀한 것이 들어있는 줄 그 심술꾸러기 도토리 녀석들은 꿈에도 몰랐겠지. 사실 그 놈들 안에도 아주 크고 멋진 나무가 들어있는데… 잘난 척만 하다가 모두 돼지 먹이가 되어 버렸지.”




* 굉장히 오래전에 썼던 동화를 한 편 꺼내봤습니다.


제 첫 아이는 키가 작은 편입니다. 볼 때마다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 있는 독일 꼬마들 속에서 월등히 작은 키를 자랑하지요. 인종이 달라서 겪게 되는 껄끄러움이 분명 있을 텐데 키까지 작아서 혹시 학교 생활이 힘들게 되지는 않을까,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미리 돈 주고 사서 하고 있던 때에 썼던 동화입니다.


겉으로는 비실비실 바짝 마른 것 같아도, 잎을 당겨보면 그 아래에서 선명하게 예쁜 오렌지색의 당근이 커다랗게 쑤욱 나올 수 있다는 그런 얘기를 해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함부로 비교하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는 마음을 단단하게 가져 주었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엄마가 어떤 교훈 같은 것을 머리에 담고 쓰면 얘기가 너무 뻔해져서 재미없다는 것을, 쓰면서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크허허허허. (그래서 이 이야기에 이어 바로 썼던 동화가 <냐무냐무 왕국 이야기>입니다. 마음대로 막 쓰고 싶은 대로 썼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쓰면서 가장 재미있었어요.)  

https://brunch.co.kr/@jinmin111/13


그래도 키 재기 좋아하는 도토리 삼 형제와 까칠한 밤탱이, 화생방 공격에 능한 쪽파와 속이 단단한 무 콤비, 삐약거리는 콩알이와 돌멩이 할아버지를 귀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구니를 들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김단 어린이가 그린 그림입니다.

선물처럼 보이는 완두콩이야기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

그냥 동그라미인데 이렇게 귀여울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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