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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ul 15. 2019

뱃속 무지개

엄마가 쓰는 동화 3

지오 뱃속에는 무지개 요정들이 살고 있어요.

뱃속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이 아니라 빨주노초하갈검보, 여덟 가지 색이랍니다.


지오가
말캉말캉 붉은 토마토를 한 입,
아작아작 빨간 김치를 두 입,
새콤달콤 빨갛게 익은 딸기를 세 입 먹으면
지오 뱃속 무지개에 빨간색 불이 반짝반짝 켜져요.
그러면 무지개 요정들은 빨간 꽃을 꽂고 춤을 춘답니다.


지오가
길쭉길쭉 주홍 당근을 한 입,
아삭아삭 귤색 파프리카를 두 입,
새큰달큰 주황색 오렌지를 세 입 먹으면
지오 뱃속 무지개에 주황색 불이 반짝반짝 켜져요.
그러면 무지개 요정들은 주황색 모자를 쓰고 춤을 춘답니다.


지오가
토실토실 샛노란 바나나를 한 입,
쫀득쫀득 누런 옥수수를 두 입,
따끈따끈 노란 달걀부침을 세 입 먹으면
지오 뱃속 무지개에 노란색 불이 반짝반짝 켜져요.
그러면 무지개 요정들은 노란색 스카프를 두르고 춤을 춘답니다.


지오가
와작와작 연녹색 오이를 한 입,
짭조름한 청록빛 미역무침을 두 입,
냠냠짭짭 연둣빛 브로콜리를 세 입 먹으면
지오 뱃속 무지개에 초록색 불이 반짝반짝 켜져요.
그러면 무지개 요정들은 초록색 장갑을 끼고 춤을 춘답니다.


지오가
꼴깍꼴깍 하얀 우유를 한 컵 마시고,
말랑말랑 흰색 두부를 두 입,
노릇노릇 구운 흰 살 생선을 세 입 먹으면
지오 뱃속 무지개에 하얀색 불이 반짝반짝 켜져요.
그러면 무지개 요정들은 하얀색 베일을 쓰고 춤을 춘답니다.


지오가
오독오독 황토색 호두를 한 입,
포슬포슬 다갈색 잡곡빵을 두 입,
보들보들 고동색 불고기를 세 입 먹으면
지오 뱃속 무지개에 갈색 불이 반짝반짝 켜져요.
그러면 무지개 요정들은 갈색 구두를 신고 춤을 춘답니다.


지오가
바삭바삭 깜장색 김을 한 입,
반짝반짝 검게 빛나는 콩자반을 두 입,
모락모락 김이 나는 먹빛 흑미밥을 세 입 먹으면
지오 뱃속 무지개에 검은색 불이 반짝반짝 켜져요.
그러면 무지개 요정들은 검은색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답니다.


지오가
탱글탱글 연보라색 포도를 한 입,
매끈매끈 진보랏빛 가지를 두 입,
동글길쭉 자주색 강낭콩을 넣은 밥을 세 입 먹으면
지오 뱃속 무지개에 보라색 불이 반짝반짝 켜져요.
그러면 무지개 요정들은 보라색 보석을 달고 춤을 춘답니다.


지오가 여덟 가지 색깔의 음식을 골고루 먹어서 팔색 무지개가 뜨면
와아아아-!
무지개 요정들이 신나게 무지개를 타고 놀아요.

요정들이 무지개에서 주르르르륵 미끄러지고
요정들이 무지개에서 방방방 뛰어놀면
무지개는 따뜻해져서 조금씩 녹아 방울방울 떨어지고,
신나게 놀고 나서 배가 고픈 요정들은 바닥에 떨어진 무지개 방울을 톡톡 터뜨려 먹어요.
배가 부르고 행복한 무지개 요정들이 다 함께 손을 맞잡고 “빨주노초하갈검보!” 무지개 노래를 부르면,
아하, 지오 키가 쏘오옥! 무지개 요정들의 엄지손톱만큼 자라난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실 지오는 초록 빛깔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엄마가 브로콜리를 잔뜩 삶아 주신 어느 날.

한숨을 쉬며 브로콜리 무더기를 쳐다보던 지오는, 이제부터 좋아하는 색깔의 음식만 골라 먹기로 결심했어요.
“싫어 싫어. 브로콜리는 싫어. 오이도, 피망도 싫어. 안 먹을래. 난 이제 내가 좋아하는 것만 먹을 거야.”


빨강, 주황, 노랑, 하양… 다른 색깔 불빛들이 몇 번이고 반짝반짝 켜질 동안 초록색 불은 어쩌다 띄엄띄엄 켜질 뿐, 지오 뱃속에서는 팔색 무지개가 완성되는 일이 드물어졌어요. 무지개 요정들은 무지개 방울을 먹지 못해 배가 고팠지요. 배고픈 요정들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니 지오의 키도 더 이상 커지지 못했답니다.


무지개 요정들 중에서 가장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가장 신나게 춤을 추는 연두 아가씨는 며칠 동안 자기가 좋아하는 보드라운 초록 장갑을 끼지 못해 속이 상했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연두 아가씨는 지오의 꿈속에 찾아가기로 했어요.


“지오야, 지오야. 초록색 음식을 좀 먹어줘. 나는 신나게 춤도 추고 싶고 노래도 부르고 싶어. 네가 요즘 녹색 음식을 가리는 바람에 무지개 요정들이 배가 고파.”

“오늘 네 동생 연오의 뱃속 무지개는 몇 번이나 켜졌는지 몰라. 이대로 가다가는 연오의 키가 지오 너보다 더 커질지도 몰라.”


마음씨가 착한 지오는 배고픈 요정들이 가엾어 초록색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귀여운 동생 연오의 키도 얼른 컸으면 좋겠지만, 나보다 더 크는 건 여러모로 좀 곤란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흠, 오이도 피망도 싫어.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 그렇지! 지오한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지오는
말랑말랑 연두색 젤리를 한 입,
할짝할짝 초록색 민트 아이스크림을 두 입,
야금야금 청록색 마카롱을 세 입 먹었어요.


“이제 연두 아가씨가 신나게 춤을 추었겠지?”
지오는 만족한 얼굴로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실망한 듯 어깨가 축 처진 연두 아가씨가 다시 꿈에 나타난 게 아니겠어요.

“지오야. 오늘도 나는 춤을 추지 못했어. 뱃속 무지개는 그렇게 일부러 넣은 색소로는 켜지지 않아. 네가 내일 녹색 채소들을 많이 먹어주면, 내가 친구들과 함께 네 꿈에 나와서 예쁜 춤을 보여줄게.”


다음날 일어난 지오는 연두 아가씨가 추는 춤이 무척 궁금했어요.
그리고 연두 아가씨와 무지개 요정들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눈을 딱 감고
와작와작 연녹색 오이를 한 입,
짭조름한 청록빛 미역무침을 두 입,
냠냠짭짭 연둣빛 브로콜리를 세 입,
울퉁불퉁 녹색 피망을 네 입,
동글동글 연초록 완두콩을 다섯 입.
어… 녹색 채소들을 먹으니까 기분이 상큼하고 은근히 맛도 있네?


그날 밤 지오 꿈에는 예쁘게 치장한 연두 아가씨와 초록 장갑을 낀 무지개 요정들이 나타났어요.
요정들은 장갑 낀 손을 맞잡고 둥글게 둥글게 돌며 즐겁게 춤을 추었고, 그 가운데에 싱그런 잎사귀 드레스를 입고 초록빛 에메랄드가 박힌 머리띠를 한 연두 아가씨가 반짝이는 연둣빛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아주 신나게 춤을 추었답니다.


꿈속에서 행복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는 지오의 키가 쑥 쑥, 오늘은 무지개 요정들의 손 한 뼘만큼이나 커지고 있어요.




* 편식하는 습관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외국에 살고 있는 저희 아이들에게 색깔과 소리, 질감을 나타내는 예쁜 우리말 표현들을 알려주고 싶어 쓴 이야기예요. 뭐, 더불어 편식하는 습관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해 봐 준다면 고맙겠죠. 사실 저희 아이들은 오이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아빠를 닮아 그런지 둘 다 오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빠는 오이를 편식하는 아이들을 보며 몹시 뿌듯해합니다. 이 무엇.)
그래도,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을 보면 눈에 불꽃이 화르륵 켜지지만 브로콜리도 콩도 올리브도 버섯도 엄청나게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이 참 예쁘고 고맙습니다.

뭐, 조금씩 편식을 해도 좋으니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좋겠어요.  


* 연두 아가씨의 모티브가 된 박연두 어린이가 예쁜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귀여움이 넘치는 토마토와 딸기, 네모반듯한 김치, 구름 같은 날개와 소매 끝의 디테일, 그리고 예쁜 신발! 저는 그림들을 전해 받고 너무 기뻐 몹쓸 춤을 추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빨간색 색종이를 꺼내어 뒷면에 그림을 그렸다는 귀여움에 엄마 미소가 만발 :-)

토마토, 김치, 딸기! ⓒ 박연두
뱃속 무지개에 빨간 불이 반짝! 빨간 꽃을 꽂고 춤추는 무지개 요정 ⓒ 박연두
예이히 (몹쓸 춤을 추는 저의 모습. 나름 그루브 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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