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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Sep 03. 2019

아기 도깨비의 딸기코

엄마가 쓰는 동화 4

“언니, 나 잠깐 가게에 갔다 올게!”

햇살 좋은 일요일 오후. 내일 학교에 가져갈 가방과 준비물을 모두 챙겨 둔 지인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어요. 무슨 과자를 사 먹을까? 공부하는 언니에게도 맛있는 걸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처럼 엄마와 아빠가 먼 곳에 볼 일이 있어 집을 비우시면, 중학교에 다니는 언니가 지인이를 살뜰하게 챙겨 주거든요. 


햇살이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는 길.

타박타박 걸으며 뭘 살지 골똘히 궁리 중이던 지인이의 귓가에 어디선가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으아아아아아아아앙-”

누가 울지? 산보를 나온 아기가 넘어졌나? 


어, 그런데 이상해요. 귀에 꽂은 이어폰 볼륨이 커지듯, 울음소리가 지인이 귓속에서 점점 커지는 게 아니겠어요? 

으아아악. 

머릿속에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리는 것 같은 느낌에 지인이는 머리를 움켜쥐고 울음소리를 찾아 나섰어요. 

저 쪽, 딸기를 키우는 우리 비닐하우스 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뛰어가 보니 두 비닐하우스 사이에 머리는 덥수룩하고 저고리와 바지를 입은 꼬마가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었어요. 

이 동화의 삽화는 주인공인 박지인 어린이가 그려주었습니다 ⓒ 박지인

“얘, 너 어디 다쳤니?”

뒤돌아 보는 꼬마를 보고 지인이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팔짝 뛸 뻔했어요. 글쎄 이 아이는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꼬마는 자기가 더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더니 코맹맹이 소리로 지인이에게 되물었어요.

“어? 나? 나 말이야? 너는 내가 보여?”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보이지. 근데 너 저기… 코가…”

코가 왜 없는지 물어보려던 지인이는 질문을 하려다가 아차 싶었어요. 이걸 물어봐도 되는 걸까요? 사고를 당해 팔을 잃은 친구에게 팔이 왜 없는지 물으면 대답하는 친구가 마음이 아프잖아요. 

아, 역시 잘못 말을 시작한 걸까요. 울음을 잠시 멈췄던 꼬마는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했어요. 지인이 머릿속 자명종도 또다시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어요. 이러다가 나는 코가 아니라 머리가 없어질 것만 같아요!


“너 왜 여기 혼자 있어? 엄마나 아빠는 안 계셔?”

“엄마랑 아빠는 내 일곱 살 생일에 줄 방망이를 만들 나무를 구하러 갔어. 오늘은 안 와. 아마 당분간 집에 안 올 걸.”

생일에 방망이를 준다고? 두드려 맞는 방망이? 그게 생일 선물이라고? 

머릿속에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이 떠올랐지만, 이 꼬맹이의 울음보가 또다시 터지지 않게 하려면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지인이는 이렇게 물었어요. 

“그럼 너 여기 어떻게 혼자서 왔어? 우리 동네에서 못 본 것 같은데... 그래, 넌 이름이 뭐야?” 

“우리 도깨비들은 일곱 살 생일이 되면 이름을 정해. 그래서 아직 이름은 없는데, 다들 나를 딸코라고 불러. 내 코가 딸기코라고… 우, 우우, 근데 형들이… 내 코를… 으아아아아아아앙!”

말하다 말고 다시 꼬마는 울음보를 터뜨렸지만 이번엔 머릿속 자명종 소리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어요. 뭐? 도깨비? 방금 도깨비라고 했지?

(아니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다들 이렇게 웹툰 작가 실력이 되는 건가요) ⓒ 박지인

“너… 도깨비라고?”

“응. 훌쩍, 작약산에 살아. 보통 인간들은 우리를 못 보는데, 너는 신기하다. 훌쩍. 너는 이름이 뭐야?”

“어… 나는 지인이라고 해. 박지인.”

“지인이? 예쁜 이름이네. 나도 빨리 예쁜 새 이름을 갖고 싶어. 딸코라고 부르는 것 정말 너무너무 너어무 싫어. 내 코가 딸기코라서 붙은 별명인데, 오늘도 동네 형들이 너무너무 놀려서… 훌쩍, 이런 못생긴 코 그냥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훌쩍, 햇귀 형이 정말 자기 방망이로 내 코를 뚝 떨어뜨렸지 뭐야.”    

아기 도깨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어요. 


“저런. 속상했겠다. 그럼 어떻게 해? 다시 붙일 순 없어?”

“… 훌쩍, 햇귀형은 열 살이라서 요술이 하루밖에 안 가. 내 코는 내일이면 다시 붙을 거야. 근데 문제는... 훌쩍, 우리 집을 못 찾겠어. 우리는 냄새로 집을 찾는데, 내가 울면서 너무 멀리 뛰어나와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으아아아아아앙!”

“음… 작약산이면 여기서 제법 먼데… 그래도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울지 마.”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 도깨비를 위해 지인이는 온실 안에 들어가 딸기꽃을 한 송이 따 왔어요. 엄마 아빠한테는 죄송한 일이지만, 지인이는 딸기코 때문에 속상한 아기 도깨비에게 이 조그맣고 예쁜 꽃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울지 마. 이거 딸기꽃이야. 본 적 있어? 예쁘지? 너 줄게.”  

꽃을 좋아하는 아기 도깨비는 가까스로 울음을 그치고 조그만 손에 꽃을 받아 들었어요.

“예쁘네… 안에 별이 든 것 같아.”

지인이가 덥수룩한 아기 도깨비 머리에 하얀 꽃을 꽂아주자, 딸코의 얼굴에는 그제야 배시시 웃음꽃이 피어났어요.  

(딸기꽃은 이렇게 생겼답니다.)

“너 딸기꽃 꽃말이 뭔지 알아?”

“꽃말? 그게 뭐야?” 

“음… 세상에 있는 꽃들은 각각 그 꽃이 담고 있는 의미가 있거든. 그걸 꽃말이라고 해.” 

“그래?”

“응. 딸기꽃 꽃말은 존중, 사랑, 우정이야. 네 코가 조금 다르게 생겼어도 나는 너를 존중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

“존중? 그건 뭐야?”

아… 꼬맹이의 울음 자명종이 울리지 않는데도 지인이 머리는 왜 지끈지끈 아파지기 시작하는 걸까요. 하지만 지인이는 더듬더듬 최선을 다해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어.. 그건 설명하기 좀 힘든데.. 음, 그러니까, 네 코가 어떻게 생겼든 상관없이 너는 너 자체로 귀하거든. 그러니까… 아, 이 세상에 있는 생명들은 다 아름답고 소중한 거라고 배웠어. 그러니까… 다른 도깨비들이 네 코를 놀리지 않고 네 코도 나름대로 귀엽고 개성이 있다고 하면, 그건 네 코를 존중하고 너도 존중하는 거야.”

“아! 우리 할머니는 내 코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코라고 했어. 할머니는 나를 존중하는 거네?”

“응, 존중하고 사랑하시는 거야. 딸기꽃 꽃말처럼.”

지인이와 아기 도깨비는 서로 마주 보고 방긋 웃었어요.

딸기꽃을 머리에 꽂고 방긋 웃는 딸코 ⓒ 박지인

“딸기도 좀 줄까? 우리 엄마 아빠가 키우시는 딸기 엄청 맛있어.”

“나 딸기 한 번도 안 먹어 봤는데… 그거 맛있는 거야?”

“딸기를 한 번도 안 먹어봤다고? 진짜?”

“응. 산에서 산딸기를 본 적은 있는데, 우리 도깨비들은 빨간색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 나는 빨간색이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빨간색을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도깨비들이 많아. 특히 우리 할머니. 빨간색이 너무 무섭대. 그래서 새빨갛게 익은 산딸기가 보이면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멀찌감치 돌아가셔. 나 그래도 딸기맛 과자는 먹어본 적 있어. 우리 엄마 아빠가 가끔 사람들 옷을 입고 장에 놀러 가는데, 집에 올 때 인간들 과자를 사 오곤 하거든. 엄마랑 아빠는 장에 가서 메밀묵에 막걸리 마시는 걸 제일 좋아해. 나도 시장 되게 가보고 싶은데, 아직 어려서 못 가. 너는 가 본 적 있어?”

울음을 그친 아기 도깨비는 조잘조잘, 아주 수다쟁이였어요. 


지인이는 딸코의 손을 잡고 온실 안으로 들어가 탐스럽게 잘 익은 딸기 하나를 따서 내밀었어요.

“자, 먹어봐.”   

호기심 많은 얼굴로 딸기를 들고 요리조리 살피던 딸코가 입에 쏙 넣고 오물오물 씹더니, 해님처럼 환하게 방긋 웃었어요. 

“우와!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건 초콜릿 이후로 처음이야!”

“저 쪽으로 가면 딸기에 초콜릿 찍어먹을 수도 있어.”

“뭐라고!!!!!”

잔뜩 흥분한 딸코가, 엄마 아빠가 한쪽에 정성스레 마련해 놓은 체험장 쪽으로 가면서 우아아아아 소리를 질렀어요. 엄마 아빠 딸기가 맛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지인이는 늘 자랑스러웠지만 도깨비에게까지 인정받다니, 지인이는 어깨가 으쓱해졌어요. 그런데 엄마 아빠한테 얘기하면 믿어주실까?  


“지인아! 지인아!”

저런, 딸코와 딸기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이 훌쩍 가버린 것도 몰랐네요. 도깨비 마을 얘기며, 딸코네 가족들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했거든요! 걱정이 된 언니가 지인이를 찾아 나섰나 봐요. 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지인이도 딸코도 깜짝 놀랐지 뭐예요. 지인이는 냉큼 밖으로 나가 언니를 불렀어요.  

“언니! 나 여기 있어!”

“너 왜 거기 들어가 있어? 가게 간다더니… 아유, 걱정했잖아.”


자초지종을 들은 언니가 반신반의한 얼굴로 지인이 손을 잡고 온실 안으로 들어왔어요.

코가 없는 꼬마 도깨비를 본 순간 언니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지만, 곧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어요. 

“안녕! 나는 지인이 언니야. 시은이라고 해. 반가워.”

“누나도 내가 보여요? 이 집 사람들은 신기하네… 햇귀형이 코를 없애면서 내가 사람들에게 보이게 해 놨나?”

“근데 너 집에 못 들어가서 어떡하니? 집에 걱정하실 어른은 안 계셔?”

“엄마 아빠는 오늘 안 와요. 내 방망이 나무도 구할 겸, 며칠 다니면서 친척들과 친구들도 만난다고 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까 내가 저녁이 되어도 안 들어오면 우리 할머니가 냄새로 나를 찾으러 올 것 같아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래? 그럼 다행이네. 저녁이 되면 날이 많이 추우니까 여기 온실에 있는 게 좋겠다. 뭐 필요한 건 없니? 옷이 춥진 않아?”

“네. 안 추워요. 도깨비들은 추위에 강하거든요.”


“언니, 얘가 우리 엄마 아빠 딸기가 맛있다고 해서 좀 줬는데 괜찮겠지?”

“그럼 그럼. 뭐 더 먹을래? 너희 배 안 고프니?”

딸기를 먹긴 했지만 살짝 배가 고파지던 참에, 언니가 토스트를 만들어 주기로 했어요. 

토스트가 뭐야? 빵이라고? 나 크림빵 먹어봤는데! 

인간의 음식을 맛볼 생각에 기분이 한껏 들뜬 딸코는 딸기꽃길 사이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돌아다녔어요. 크림빵의 기억을 떠올리며 침을 흘리는 꼬마 도깨비를 위해서 언니는 뽀얀 생크림을 얹은 딸기 컵케이크와 바삭하게 구워 생잼을 듬뿍 바른 토스트를 내 왔어요. 


이렇게나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냄새를 맡을 수 없다니! 가짜 코라도 만들어 줄까? 장난기가 발동한 지인이가 컵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 한 알에 잼을 발라서 딸코의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꾸욱 눌러 붙였어요. 

“하하! 진짜 딸기코다!”

빨간 딸기코를 붙인 아기 도깨비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귀엽고 행복해 보였어요. 

언니 전화기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딸코도 하하하 웃었어요.

“이거 마음에 드는데? 나 딸기가 정말 좋아.”

“너는 싫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딸코라는 이름도 참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해.”   

“그런가…? 흠… 어? 어?”

“왜 그래?”

“냄새가 나! 나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아기 도깨비가 진짜 딸기로 만든 코를 마음에 들어하자 찰싹, 딸기코가 들러붙었어요. 그리고 진짜 코처럼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어요! 


“뭐야, 너도 요술을 부릴 수 있는 거야?”

“아니, 그게… 나는 아직 어려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어. 일곱 살이 되면 방망이를 선물 받고 작은 요술부터 배우기 시작하거든. 근데 나는 기분이 아주 좋거나 아주 슬플 때, 가끔 내 힘이 통제가 안 될 때가 있어. 오늘도 단숨에 너무 멀리 달려온 것도 그렇고. 할머니가 나는 특별한 아가라고 늘 조심하라고 그랬는데.” 

“어쨌든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면 집에 찾아갈 수도 있겠네?”

“킁킁… 응!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잘 됐다!!!”

“근데 있지, 내 진짜 코보다 이 코가 더 좋은 것 같아. 코에서 계속 맛있는 딸기 냄새가 나. 으하하.” 

딸기코를 실룩거리는 아기 도깨비를 보고 시은이와 지인이 자매는 딸기꽃처럼 예쁘게 웃었어요.


딸코가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작약산으로 돌아가고 난 뒤, 지인이는 딸기코를 한 수다쟁이 아기 도깨비가 항상 궁금하고 보고 싶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자주 보고 싶었지만, 딸코 말로는 아기 도깨비들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인간들을 만나 얘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대요. 딸코를 만났다는 사실을 말하면 작약산에서 오손도손 살고 있는 도깨비들에게 행여라도 피해가 갈까 봐, 지인이는 언니랑 둘만 아는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어요. 사랑하는 엄마에게도 친한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어요. 아빠 엄마 얼굴을 볼 때마다 이야기가 목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고개를 돌려 딸코가 춤을 추며 돌아다니던 온실 속 길을 보면서 꾹 참았어요. 


딸코가 돌아가고 나서 보름쯤 지난 어느 날. 

딸코를 만났던 날처럼 해님이 부드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하굣길이었어요. 지인이는 한복 차림의 꼬마 둘이 길가에 서서 뭔가 잔뜩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진짜 딸기로 만든 코는 아니지만 귀엽고 뭉툭한 딸기코가 달린 아이, 딸코가 분명했어요! 

“어? 딸코야!!!!!!! 너 딸코지?”

“거 봐. 우리가 보일 거라고 그랬지!”

딸코가 지인이 손을 덥석 붙잡고 반가워하면서, 옆에 있는 포동포동한 아기 도깨비에게 뻐기듯이 말했어요. 

지인이는 정말로, 정말로 반갑고 기뻤어요.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할머니한테 인간들 만나고 왔다고 혼나거나 그러진 않았어?”

“응. 괜찮았어. 할머니가 빨간 딸기로 만든 내 코를 보고 기겁하시긴 했지만, 얘기를 듣고 고맙다고 하셨어. 내가 너 보고 싶다고 울어서 우리 할머니가 요술로 가끔 너 보여줬거든. 그랬더니 어제는 할머니가 고맙다고, 믿을만한 아이 같으니 가서 인사하고 와도 된다고 그래서 온 거야.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얘가 너무 느려서 좀 시간이 걸렸어. 얘는 나랑 제일 친한 친군데 얘도 아직 이름이 없어. 하도 많이 먹어서 다들 머깨비라고 불러. 네가 붙여 준 내 딸기코는 하루가 지나서 툭 떨어지자마자 얘가 먹어버렸어.”

기다렸다는 듯 수다를 늘어놓는 딸코 옆에서 토실토실한 아기 도깨비가 수줍은 듯이 지인이에게 눈인사를 건넸어요. 

“얘가 딸기 더 먹고 싶다고 하도 노래를 불러서 내가 데리고 왔어. 얘네 엄마 아빠는 인간들을 좋아해서 허락해 주셨거든. 대신에 우리 한 시간밖에 못 만나. 머깨비네 엄마가 방망이로 요술 걸어놨거든. 아 맞다. 이것 봐. 나 생일 지나서 방망이 생겼다?” 

약간 긴장한 듯한 빨간 볼의 머깨비와는 달리, 딸코의 조그만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왔어요. 


한 시간밖에 없다고? 

다시 만나면 하고 싶은 얘기도, 하고 싶은 것도 정말 많았는데! 

무엇부터 해야 하지? 지인이 맘이 바빠졌어요. 

우선, 가게에 가서 가지고 있던 용돈을 모두 털어서 초콜릿과 젤리 등 군것질거리를 샀어요. 

색색의 젤리를 본 딸코와 머깨비의 눈이 사탕처럼 빛났어요. 


다음은? 아빠 엄마가 일하고 계신 온실로 달려갔어요.

“엄마, 저 딸기 좀 따 가도 돼요? 정말 소중한 친구가 먹을 건데 맛있는 딸기로 한 바구니만 주세요.”

“친구 누구?”

“그게… 있어요. 새로 사귄 친군데 이름은 비밀이에요.”

엄마는 활짝 웃으시더니 크고 예쁜 딸기로 한 바구니를 금방 채워 건네주셨어요. 


바구니를 받아서 딸코와 머깨비가 있는 놀이터로 달려갔더니 머깨비는 바닥에 주저앉아 젤리를 한 입 가득 물고 있었고, 딸코는 꺄아 꺄아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어요. 

“얘들아! 딸기 가져왔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인이가 소리치자 머깨비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어요. 딸코도 미끄럼틀에서 내려와 딸기 앞으로 콩콩 뛰어왔어요.  

“우리 엄마가 특별히 맛있는 걸로 골라 주셨어. 먹어 봐.”

머깨비는 빨리 딸기를 집어 들고 싶지만 한편으론 좀 수줍기도 해서 포동포동한 양 손을 맞잡았다가 떼었다가 어쩔 줄 몰라했어요.  

“괜찮아 어서 먹어. 너는 빨간색 무섭지 않니?”

“얘는 맛있는 거면 빨간색이고 뭐고 상관없는 애야. 심지어 어떤 등산객이 흘리고 간 양갱도 허겁지겁 먹었다니깐? 우리 할머니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팥인데, 그 얘기를 듣고 아주 기겁을 하셨지 뭐야.” 

커다란 딸기를 입에 한가득 넣은 머깨비의 눈이 놀라움으로 한껏 커졌다가 이내 만족감으로 가늘어졌어요. 

딸코도 기분 좋게 딸기를 한 입 가득 오물오물, 맛나게 먹었어요. 

“아, 정말 맛있다.”


몇 분 남았지? 30분! 지인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게 너무 아쉬웠어요.    

“너희 또 뭐 하고 싶은 거 없니?”

“응, 나는 괜찮아. 가게도 가 봤고, 그네도 미끄럼도 실컷 타 봤어. 너랑 얘기나 더 하다가 갈래.”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한 딸코와는 달리, 머깨비는 양 볼 가득 딸기를 입에 물고는 머뭇거리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어요.

“너 뭐 하고 싶은 거 있구나? 어서 말해 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저… 저기… 나 재 하 벼마 가.. 믄 안 대요?”

“야! 뭐라는 거야. 입에 있는 거 다 먹고 말해.”

딸코의 재촉에 양 볼에 가득한 딸기를 급하게 꿀꺽 삼킨 머깨비는 양 볼을 빨갛게 붉히며 어렵게 말을 꺼냈어요. 

“저.. 저기… 그러니까.. 나 재, 잼 한 병만 가져가면 안 돼요?”

“뭐?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지인이는 아기 도깨비들과 함께 다시 온실로 향했어요. 아빠가 우리 딸 또 왔네, 하면서 지인이를 꼭 안아서 높이 들어 올려 주셨어요. 

“엄마,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 잼 한 병만 주시면 안 돼요?”

“우리 딸이 오늘은 비밀이 많네. 물론 괜찮지. 아까 그 친구 줄 거야?”

“…네.”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오라고 해. 지인이가 새로 사귄 소중한 친구가 누군지 엄마 아빠도 궁금하네.”  

엄마, 나도 정말 그러고 싶단 말이에요. 근데 그럴 수가 없는 친구예요. 

대답을 하기 곤란한 지인이는 대신에 배시시 웃으며 엄마가 건네주시는, 특별히 딸기를 듬뿍 넣어 만든 달콤한 잼이 담긴 병을 소중하게 받았어요. 


머깨비는 연신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아 신난다, 하면서 잼을 양손에 꼭 쥐었어요.

“아, 맞다.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내가 작은 소원 하나 들어줄게. 할머니가 그러라고 하셨어. 나 이제 방망이 생겨서 요술 연습하고 있거든. 나 제법 잘해.”

“소원? 나는 그냥 이렇게 너를 가끔 만나서 놀고 싶은데, 그건 안 돼?”

“아, 그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른 도깨비들이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몰래 만나면 더 혼나거든. 우리 아빠 코는 도깨비들 중에서도 으뜸이라, 인간들의 냄새를 금방 알아채실 거야.”

딸코가 속상한 얼굴로 말했어요. 지인이도 무척 속상했지만, 이해하기로 했어요. 

어린이들을 위해 어른들이 규칙을 정하고 법을 만드는 것처럼, 어른 도깨비들도 꼬마 도깨비들을 위해 그렇게 정했을 테니까요. 


“그래도 할머니한테 잘 말해 볼게. 할머니가 너를 가끔 보시더니 마음에 드신 것 같아.”

“근데 내 모습을 본다고? 너 대체 뭘 어디까지 본 거야?”

지인이는 퍼뜩 부끄러워졌어요.

“아… 걱정 마. 요술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건 우리 할머니처럼 나이가 삼백 살 넘은 도깨비만 가능한데, 할머니가 판단해서 아주 잠깐씩만 보여주셔. 할머니가 그러는데, 인간들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무리해서 요술로 보는 도깨비는 수명이 줄어든다고 했어. 우리 할머니는 진짜 여러 가지 요술을 할 줄 알아. 나도 빨리 할머니처럼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 참, 우리 시간이 별로 없지! 암튼, 다른 소원은 없어?”

“음… 그럼, 울 언니가 이제 고등학교 올라가서 가족들이랑 떨어져 지내게 됐는데, 외롭지 않고 건강하게 공부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  

“아… 미안해. 수호 마술은 아직 내 나이로는 어려운데. 해본 적도 없고. 어떡하지? 내가 아직 작은 것 밖에 할 수가 없어. 지난번 딸기코처럼 붙였다가 뗀다든가… 또…”


약간 기가 죽은 듯 딸코의 목소리가 작아졌어요. 지인이는 딸코가 자신 있게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을 빌어서 딸코의 어깨를 으쓱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뭐가 있을까? 음... 그래, 생각났다!

“아, 나 소원 있어! 지난번에 내가 너 주려고 딸기꽃을 한 송이 꺾었잖아. 거기에 새로운 꽃을 하나 붙여 줄 수 있어?”

딸기꽃 한 송이도 딸들처럼 예뻐하시는 엄마 아빠한테 죄송스럽던 지인이의 마음을 과연 딸코가 가볍게 해 줄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그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어! 근데 정말 그게 소원이야?”

“응. 실은 나 그 꽃을 꺾어서 마음이 좀 무거웠거든.”

“그럼 좋아.” 

딸코가 싱긋 웃으며 방망이를 꺼내 땅바닥에 살짝 내리치며 입 속으로 뭔가 중얼거렸어요.  

“됐어. 내가 집으로 떠나거든 네가 꽃을 꺾은 자리에 가 봐.”


딸코가 집에 간다는 말에 지인이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몇 분 남았지? 7분! 으앙!

지인이는 이제 돌아가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 딸코에게 기억이 될 만한 선물을 하고 싶었어요. 

우선 목에 매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딸코의 목에 둘러 주었어요. 

“지인아, 난 괜찮아. 우리는 추위에 강하다니까.”

“그게 아니라, 나를 기억하라고 주는 선물이야. 그리고, …” 

스카프를 킁킁거리며 지인이 냄새다, 딸기 냄새도 나, 하고 조잘거리는 딸코 옆에서 지인이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종이와 필통을 꺼내 딸코에게 줄 그림을 정성껏 그렸어요. 


“우와. 너무너무 좋아. 이게 너고 이게 나야?”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딸코를 보니 배시시 웃음이 났어요. 

저 쪽에서 형광펜을 꺼내 살짝 맛을 보고 있는 머깨비가 보였지만, 그냥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어요. 

“응, 밑에 이름도 써 줄게. 아, 너 이제 일곱 살 생일 지났으니 이름 새로 생겼겠다!!! 뭐야?”

“응, 나 있잖아, 너를 만나고 딸기도 맛있게 먹고 나서 딸코라는 이름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어. 내 코는 하나뿐이고 할머니도 엄마 아빠도 내 코를 귀여워하시니까, 나도 좋아해 보려고. 그래서 그냥 이름을 딸코로 해 달라고 했어.”

“정말? 진짜야? 최고다!”


지인이는 정말 행복한 마음으로 밑에 날짜를 쓰고 '지인이와 딸코'라고 정성껏 적었어요.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것 같아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던 지인이는 방긋 웃으며 그림 속의 딸코 머리에 딸기꽃을 하나 덧붙여 그렸어요. 

“이제 됐다. 잘 간직해 줘.” 

“고마워 지인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다시 만나러 올게. 시은이 누나한테도 인사 전해 줘. 내가 요술 연습도 열심히 해서 꼭… ” 

말을 다 마치치 못 했는데 머깨비네 엄마의 요술 때문인지 딸코와 머깨비는 지인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어요. 

허전한 마음에 지인이는 엉엉 울고 말았답니다. 


그 날부터 지인이는 딸코가 다시 붙여 준 구석 자리 딸기꽃 앞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어요. 뒤늦게 홀로 핀 꽃이었지만 조그만 열매가 맺혔을 때는 얼마나 기뻤던지! 여기에서 열리는 딸기는 꼭 내가 먹을 거예요, 하고 엄마 아빠께 다짐을 받고 매일매일 딸기가 크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시간이 지나 딸코가 붙여 준 딸기꽃 자리에는 보석처럼 빨갛고 탐스러운 딸기가 열렸어요. 오래오래 두고 보고 싶었지만, 더 두면 상할지도 모르니까 이제 따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딸기를 땄는데… 


어? 이게 웬일일까요! 

세상에!

조심스럽게 따서 손에 올린 딸기는 빨간 루비에 조그만 다이아몬드가 씨처럼 콕콕 박힌 딸기 모양의 보석이 되어 있지 않겠어요! 


“딸코야 고마워. 너도 나한테 예쁜 선물을 남기고 갔구나.” 

귀여운 아기 도깨비가 남기고 간 선물, 보석 딸기를 손에 꼭 쥐고 지인이는 행복하게 행복하게 웃었답니다. 



*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경북 상주에서 딸기농사를 짓고 있는 선배 부부가 있습니다. 

처음엔 그저 가볍게 도깨비 얘기를 써 보고 싶었어요. 딸기코가 달린 아기 도깨비면 귀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아예 배경을 언니 오빠네 딸기정원으로 잡았습니다. (원래 지인의 아이들을 몰래 등장시키는 것을 즐깁니다.)   

실은 오빠 생일날 1부를 올리고, 언니 생일에 2부를 올리려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으나 중간에 저희 집 인터넷이 연결되는 바람에 (으하하) 2부는 쓰이지 않았다는 슬픈 스토리. 

동화의 배경이 된 곳은 딸기도 너무 맛있고, 딸기잼도 한 입 먹으면 입에 무지개가 뜨는 맛이랍니다. 

딸기를 선물드렸을 때 지금껏 먹어 본 딸기 중에 가장 맛있었다는 인사를 받았었어요. 

이미 매스컴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고 여러모로 유명한 곳이지만, 살포시 주소를 남겨 봅니다. 
예쁜 그림을 세 장이나 그려준 지인이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아, 참고로 머깨비는 딸기도 딸기잼도 너무나 좋아하는 귀여운 먹보, 저희 집 막내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따 왔습니다.  

https://strawberrygarden.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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