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서평은 김파카 님의 <내 방의 작은 식물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입니다. 이 곳에 계시는 분들이라면 많이들 아시는 책이죠. 제7회 브런치북 프로젝트 대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서평 안에도 고백했지만 저는 식물들과 잘 지내시는 분들을 그냥 디폴트로 좋아해요.
같은 해 수상하신 분들 중에는 이미 엄청난 팬덤을 갖고 계신 분들도 있었고 출판하자마자 몇 쇄를 가뿐히 넘겼다는 책들도 있었는데요. 저는 왠지 목소리를 크게 내는 걸 수줍어하는 것 같은 이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책에 애정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꼭 개인적으로라도 서평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작가님은 현재 연이어 두 개의 기획을 진행 중이시라고 들었는데 책들이 또 예쁘게 나와 많은 사랑받기를 기대합니다.
리딩리딩은 멤버십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전문 공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간중간 생략하고, 또 사적인 이야기를 좀 덧붙인 버전의 서평을 올려둡니다.
[서평] 내 방의 작은 식물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
초록의 계절이 오고 있다. 이제 입춘이 지났으니 초록빛은 다시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으로 우리 곁에 올 것이다. 아직은 회갈색의 앙상한 시간이지만, 봄을 기다리며 식물에 관한 책으로 초록빛을 미리 충전하는 건 어떨까. <내 방의 작은 식물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라는 다정한 제목의 책이 있다. 식물은 키우는 게 아니라 같이 잘 지내는 겁니다, 라는 문장이 살며시 마음을 끌었다.
철학을 공부한 눈으로 보자면 이 책은 들뢰즈의 아장스망(새로운 배치, agencement)이란 개념이 싱그럽고 아기자기하게 들어있는 책이다. 들뢰즈는 타자와의 마주침(rencontre), 배치(agencement), 그리고 결합(combinaison)에 주목했는데, 아장스망은 함께 공감하고 공생하며 서로에게 흔적과 주름을 남기는 관계,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함께 변화하는 관계를 말한다. 이 책의 내용을 관통하는 개념 같아서 책을 읽는 내내 풍선처럼 옆에 동동 띄워두고 읽었다. 이 책은 식물과 인간이 만나 부대끼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만들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작고 그리 두껍지 않은 책 안에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가는 조용하고 귀여운 생명들에 대한 시선을 담았다.
우리가 애완동물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반려동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꽤 최근의 일이다. 반려동물만큼이나 반려식물이라는 이름은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가 생각해 본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턱대고 호감을 갖곤 하는데, 식물을 좋아하고 그들과 잘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호감을 넘어서는 뭔가 결이 다른 애정을 느끼곤 한다.
책은 저자의 이야기와 반려식물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들어있는 형식인데, 반려식물들은 모두 자기만의 귀여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듣고 있으면 빙그레 웃음이 난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식물 버전이랄까. “내가 만든 귀여운 창작물이 흙 속에서 뾱-하고 나올 때 맑은 표정으로 함께 웃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소중한 일이다.” 동그란 잎이 귀여운 필레아 페페로미오이데쓰의 말이다. “뿌리가 없는 기분은 왠지 자유롭고 멋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뿌리 없는 인간들이 비슷한 패턴으로 움직이는 걸 보니 어쩐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매일 창 밖의 세상을 구경하며 출근길의 패턴을 파악한 듯한 스파티 필름의 얘기다. 보이지 않는 흙 속에서 부지런히 뭔가를 만들어 내며 조금씩 자라는 식물들은, 단 1cm도 자라지 않는 저 인간이 대체 뭘 키우고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궁금해졌다. 나는 내 안에서 뭘 키우며 어떻게 자라고 있는 걸까.
(중략)
책 속에는 “내 꿈을 위해서 나는 지금 못생겨지는 중”이라고 말하는 백성 선인장이 있고 “시간의 빈곤에서 벗어나는 법”을 말하는 더피고사리가 있다. 저자는 말할 수 없이 느린 속도로 천천히 몸을 키워가는 작은 선인장을 보며 ‘느린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류를 깨닫는다. 그리고 마음에 새기게 된다.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서는 느리고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일에 있어 느린 방법이 가장 빠르며, 심지어 느리고 평범한 시간이 쌓이면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저자는 또한 분갈이에서 용기며 독립, 성장의 지혜를 깨닫고, 가지치기에서 인간관계를 다듬는 법을 배운다. 자연의 디자인 원칙은 협업인데 협업을 못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식물들은 각자의 밥그릇이 얼마인지 뿌리의 감으로 알기 때문에 욕심부리는 일이 별로 없는데, 그에 비해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들이 많았다. 식물들 옆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긴 시간을 보내면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 현자의 지혜를 얻게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담백하게 울리는 문장들이 여기저기에 반짝거린다.
우리는 빠르게 속도를 내는 일에는 유능하지만 속도를 늦추는 데는 무능하다. 식물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인생의 속도와 리듬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알게 된다.
식물의 인생을 지탱하는 것은 물과 바람 그리고 흙이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을 지탱하는 세 가지는 무엇일까?
어떤 나무인지보다 건강한 뿌리를 갖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사람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분갈이는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과 무척이나 닮았다. 적절한 시기에 용기를 낸 덕분에 더 크게 자랄 기회를 얻는 모습, 떠날 타이밍을 놓쳐 오래되고 좁은 화분의 영양가 없는 환경 속에서 무기력해지는 모습, 어울리지 않는 화분에 심어져 에너지를 너무 많이 빼앗기는 모습이 그렇다.
(중략)
책 속에는 머리를 싸매고 심각하게 고민할만한 주제도 없고 격한 피 땀 눈물도 없지만, 읽다 보면 인간 존재와 삶이라는 것에 대해 여린 잎처럼 나를 간지럽히는 기분 좋은 성찰이 있다. 묵직함이 부족한 점이 좀 아쉽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꼼꼼히 읽어보니 알겠다. 꾸미지 않아서, 묵직한 얘기를 그냥 가볍게 툭 살짝만 놓고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한 문장을 곱씹으면 그 의미가 엄청나게 확장되는 순간을 나는 여러 번 경험했다. 담담하게 읊조리는 것 같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신을 딱히 꾸미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가 고울 것 같은 작가님과 수줍게 만나 어색하게 풀 뜯어먹고 싶은 마음 같은 게 든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
"내가 식물들을 관찰하며 깨달은 것은 다들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른 전략으로 자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는 것은 다수가 따라가야 할 완벽한 하나의 방법이나 전략은 없다는 뜻이다. (...) 여기저기 움직여서 우연한 색깔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진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120색 색연필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12색 만으로도 믿기지 않는 다양한 색감을 내는 사람이 진짜다." 멱살을 잡고 어려운 철학적 개념을 들이대지 않아도 그저 색연필을 가지고 이런 본질과 조합에 관한 이야기를 담백하게 전하는 문장들을 볼 때, 나는 비눗방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든든한 묵직함을 느끼곤 했다.
무엇보다 일단 책이 너무 예쁘다. 공들여 아기자기하게 만든 책이라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하고 밝아진다. 저자는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직접 쓰고 그린 책이라 책 사이사이에서 꼭 맞는 어여쁜 그림을 만나는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다. 중간중간 갈색 색지와 초록 색지가 들어간 부분은 흙의 색감과 식물의 색감을 담았다는 느낌도 받았다.
힐링이라는 말의 인플레 때문에 왠지 거부감이 드는 단어가 힐링인데, 이 책은 그 말고는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수줍고 포근하고 촉촉한 책이다.
[리딩맵]: 리딩리딩에는 책과 곁들이면 좋을 다양한 반찬들을 추천하는 리딩맵이라는 서비스가 있는데요. 이 책과 관련해서는 리딩리딩 측에 여덟 개의 반찬을 싸드렸는데 여섯 개를 고르셨고, 여기에선 반으로 뚝 잘라서 네 개만 소개합니다.
1. 플랜테리어
플랜트와 인테리어의 합성어. 실내 인테리어 효과는 물론 습도 조절이나 공기 정화, 힐링까지 선사하는 플랜테리어가 주목받고 있다. 실내에 자연이 깃든 아늑한 공간을 꾸미고 싶은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나고 있는 것. 저자는 "밀레니얼 세대가 식물에 관심이 많고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깨끗한 공기가 당연하지 않고, 건강하게 흐르는 강과 바다가 당연하지 않기 때문(p. 204)"이라고 말한다. 또한 화분들은 "인테리어 요소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진짜 인테리어 소품으로 취급하면 우리 집에서 한철만 살다 조용히 떠날 것(p. 144)"이라는 중요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는다. 플랜테리어가 정말 효과를 보려면, 저자가 "식물을 위해 한 행동들(환기라든가 습도 조절, 밤에는 조명을 켜지 않고 적절한 수면을 취하는 것 등)은 나의 건강에도 좋았다(p. 152)"고 했던 말의 뜻을 곱씹어 본다면 좋겠다.
2. 책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 정지혜 2020
저자인 김파카님이 직접 추천한 리딩맵입니다.
김파카: 무기력과 번아웃으로부터 한 인간을 구해준 것은 아이돌 덕질이었다는 정지혜 작가의 에세이예요. 식물이라는 것이 사실, 사는데 뭔가 큰 도움이 되지도 않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요. 제가 식물을 키우면서, 가까이 지내면서 깨달은 것도 '좋아하는 마음이 한 인간을 조금은 괜찮은 사람으로 바꿔준다'는 것이에요. 작은 식물들을 아끼고 관심을 갖다 보면 이 좋아하는 마음이 하루하루를 조금 더 생기 있게 해주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무기력하고 뭘 해야 될지 모르겠고 지칠 때 아주 조그만 의지를 생기게 해주는 건 이런 작은 것들에서 시작하는 것 같고요. 꼭 식물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마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을 찾아서 맑은 날 햇빛을 쬐는 것 같은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아주아주 좋을 것 같아요.
3. 잼프로젝트의 김파카
저자가 운영하는 유튜브 계정. 식물을 보살피는 다양한 팁과 함께 눈에 띄는 것은 아이패드로 식물 드로잉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점. 반려식물을 들이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다면 드로잉으로 마음속에 식물을 심어 보는 건 어떨까.
https://www.youtube.com/watch?v=mFf9eLZXokc
4. 다큐멘터리 <서울나무, 파리나무> OST 2019
KBS 스페셜 <서울나무, 파리나무>(연출: 이후락 피디, 2019)는 이제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나무의 삶과 비밀에 주목하여 방송 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파리 나무들에 비해 서울 나무가 볼품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에 심어진 나무들의 절규를 듣고, 수목관리학의 과학적 성과를 통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한국 나무의 아름다움을 되찾고자 한다."라는 작품 설명이 붙어있는 다큐멘터리.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서 우리와 함께 지내는 나무들에 주목하고 그들의 삶과 존엄과 품위를 생각했던 기획 의도가 이 책의 주제와 초록빛으로 맞닿아있다. "나무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무에 대해 공부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랑은 이해를 의미한다."라는 알렉스 샤이고의 말은 이 다큐와 이 작은 책을 따뜻하게 관통하고 있다.
해당 영상은 저작권 문제로 무료 제공이 어렵지만 다큐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들은 아래 링크에서 들을 수 있다.
다큐멘터리 음악을 맡은 음악감독 박인우와 프로듀싱 팀 슈퍼싸운드에서 '나무'라는 아이템에 어울리는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고민을 거듭해 만든 곡들이라고 한다. 나무 재질의 언플러그드 어쿠스틱 악기들 위주로 전체 편성의 틀을 잡고, 멀티 악기 연주자 권병호가 나무와 관련된 각종 특수 악기들을 레코딩에 동원해 다채로운 사운드를 더했다고. '나무다운’ 곡들의 느낌이 궁금하시다면 즐겨보시길. 청명하고 싱그러운 사운드를 듣는 것만으로 잠시 햇살이 비치는 숲을 거니는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bpa63fdCh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