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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Apr 27. 2021

소수가 아닌 모두를 위한 도서관

Ludington Library (Bryn Mawr, PA)

C-Program에서는 올해 집중해서 취재하고 싶은 곳으로 도서관을 꼽았습니다. 공공 공간인 도서관과 협업하면서 어린이 공간과 청소년 공간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 가운데서 저희 해외 특파원들은 도서관이나 교육 환경이 어떻게 ‘universal, inclusive, accessible’해질 수 있는지에 관한 다양한 외국 사례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사실 예전부터 뮌헨에 궁금했던 도서관이 하나 있어서 그곳을 취재하고 싶었는데, 지금 독일은 코로나 확산 억제를 위한 야간 통행금지 등 재봉쇄조치가 시작되고 있는 상황이라 공공 도서관들도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예요. 제가 가보고 싶었던 도서관은 아래에 보시는 Internationale Jugendbibliothek(International Youth Library).

Internationale Jugendbibliothek (MÜNCHEN). 코로나 물러가면 득달같이 가볼 예정. (사진 출처: ijb.de)

독일에서 살면서 참 신기하고 좋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바로 예전에 성으로 지어졌던 아름다운 건물들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공건물로 사용하는 예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 도서관도 그렇고, 저희 동네에 있는 인터내셔널 스쿨도 그렇고, 또 독일 내의 많은 유스 호스텔들이 오래된 성을 건물로 사용하고 있어요. 한 사회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아름답고 좋은 공간을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내어주고, 아이들이 그 안에서 공부하고 잠자면서 역사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일은 참 근사한 것 같아요.  


어쨌든 이 공간은 코로나가 물러가는 날을 기약하기로 하고, 대신에 다른 도서관 한 곳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지금껏 살면서 가장 좋아했던 동네 도서관, 미국 필라델피아 브린모어에 있는 루딩턴 라이브러리입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두 가지 양해를 구할 사항이 있는데요.

 

1) 우선은 제가 집에 들어앉아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글이라 포인트에 딱딱 들어맞는 사진들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나마 제가 찍어두었던 사진들도 거의 날아가버려서 (날 잡고 외장하드들까지 다 뒤졌는데 딱 브린모어에 살던 시절의 사진들이 통째로 실종... 엉엉) 온라인에 있는 사진들을 최대한 활용할 거예요. 이번 글의 사진은 주로 도서관 페이스북 계정과 도서관 보도자료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쉬운 점이 많아요. 입구의 모습이라든가, 로비의 분위기라든가, 어린이 서가의 물리적 구성이라든가, ‘universal, inclusive, accessible’이라는 키워드와 관련해서 보여드리고 싶은 부분들이 많이 떠오르는데 말이죠.


2) 두 번째는 제가 머리가 나쁘다는 점입니다. 저는 보스턴 쪽에 5년, 필라델피아에 5년 살았는데 그래서 애정을 갖고 드나들었던 공공 도서관이 두 군데 있어요. 하나는 렉싱턴에 있는 Cary Memorial Library(아래 왼쪽), 다른 하나는 Ludington Library(오른쪽). 다시 가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 보니 두 군데의 기억들이 섞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이 글이 루딩턴 라이브러리를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 도서관에서의 경험과 필요한 사례를 소개하는 글이기 때문에, 기억이 섞이는 일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사진 출처: carylibraryfoundation.org (left), © Marilee Wolf (right)

그럼 시작해 볼까요.


‘universal, inclusive, accessible’이란?


우선은 ‘universal, inclusive, accessible’이라는 키워드부터 약간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요. 한마디로 말하면 '누구든 배제되지 않도록 하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연령, 성별, 능력 (혹은 배움의 속도), 사회문화적 배경, 장애 여부를 따지지 않고 모든 이들을 환영하는가 하는 점이 포인트죠. 다른 말로 하면 아기에서부터 어르신들까지, 배움의 정도와 관계없이(특히 요즘엔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즉 디지털 문해력도 중요하겠죠), 또 어떤 국가·사회·언어·문화적 배경을 가졌든지에 상관없이, 또 어디가 얼마나 불편한지에 관계없이, 그 모두를 아우르는 디자인을 고민하고 구현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요.


우리가 보통 ‘inclusive’라는 키워드를 받으면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뭔가 ‘정상적, 혹은 평균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전제로 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차별받는 소수를 아우르는 일이 필요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휠체어 리프트 같은, 소수만을 위한 특수한 시설을 고려하는 쪽으로 가기 쉽죠.


그런데 살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생애에 걸쳐 어딘가 불편한 곳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실 정상이나 평균은 누가 정하는 걸까요. 그렇게 특정 소수만을 고려하는 식의 접근은 오히려 효율도 떨어지고 새로운 선을 긋는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애초에 모두를 골고루 고려하고 배려하는 디자인을 고민하면,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조화롭게 섞일  있는 공간이 된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휠체어 리프트 대신에 경사면을 설치하면 어떨까요? 휠체어뿐 아니라 차를 끄는 사람들, 무거운 책이며 용품들이 실린 카트를 끄는 사서들과 스태프들, 무릎이 좋지 않아 계단이 조금 불편하신 어른들 누구에게나 혜택이   있겠죠. 비상구나 화장실, 안내 데스크 등의 표지나 사인을 단어로만 표시하지 않고 눈에 띄는 색깔, 직관적으로   있는 아이콘이나 그림을 함께 사용한다면요? 해당 국가의 언어가 낯선 외국인,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  아니라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이들까지 고루 혜택을 받을  아니라 사실  불편이 없는 사람들 눈에도   띄어 좋을 거예요.  소수를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는 디자인 쪽으로   사용자들이 파편화되지 않고  조화롭게 모일  있으며, 모두에게 유용성이 공통적으로 증가한다는 .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필 부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물리적인 공간의 디자인뿐 아니라 그 안의 콘텐츠나 소프트웨어적인 측면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보통 ‘inclusive, accessible’ 같은 키워드를 받으면 우리는 또 대체적으로 물리적 공간만을 생각하기 쉬운데요. 하지만 공간뿐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갈 제품들, 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질 프로그램이나 서비스까지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그 키워드를 동일하게 적용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큐레이션이나 컬렉션 같은 것을 고민할 때도 누군가가 배제되지 않는 다양하고 유연한 셀렉션과 배치가 필요하고요. 콘텐츠 자체도 멀티콘텐츠 포맷으로 간다면 훨씬 좋겠죠. 도서관 분위기 자체도 누구든 환대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그런 심리적 측면의 배려도 필요하고요.


그럼 이런 키워드들을 염두에 두고 이제 본격적으로 루딩턴 라이브러리를 소개합니다.


입장의 구간, 환대의 분위기


이 도서관은 문이 두 군데 있는데요. 하나는 윗 사진에서 보시듯 차도와 직접 닿는 쪽이고요. 그 반대쪽으로 주차장으로 쓰는 야드와 연결된 문이 또 하나 있어요. 제 기억으로는 그 어느 쪽 문에도 계단이며 턱 하나 없이 그라운드 레벨로 지어져 있습니다. (케리 메모리얼 라이브러리는 오래된 건물이라 계단이 높지만 오른쪽으로 긴 램프가 보입니다.) 주차장 쪽에서 들어오는 문으로 입장하면, 각종 소식지들을 빼볼 수 있기도 하고 잠시 앉아 있을 수 있는 긴 벤치로도 쓸 수 있는 낮은 장이 깔끔히 놓인 꽤 넓은 공간이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면 그곳에서 기다리면 딱 좋을.  


거기서 자동문을 한 차례 통과하면 도서관 로비로 통하는 긴 램프, 즉 경사면을 만나게 됩니다. 폭이 넓고 각도는 낮은 꽤 긴 경사면이라, 당시 한 살을 조금 넘겼던 제 아이가 놀이터에 온 표정으로 긴 경사도로를 왔다 갔다 하던 기억이 있네요. 그 긴 경사면을 따라 양쪽 벽면에는 갤러리처럼 유리 케이스가 길게 설치되어 있는데요. 매번 새로운 작품들이 걸려있곤 하던 그 전시에서는 눈길을 사로잡는 로컬 아티스트의 작품들 뿐 아니라 브린모어 지역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특히 소장 욕구 불러일으키는 사랑스러운 어린이들의 작품들을 구경하며 도서관 안으로 즐겁게 걸음을 옮기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 작품이 정말로 예술작품 대우를 받으며 근사하게 전시된 우리 동네 도서관, 생각만 해도 자꾸 가고 싶겠죠?  

    

경사면을 올라가면 왼쪽으로는 탁 트인 로비, 중앙 뒤편으로는 데스크, 오른쪽으로는 1층 서가가 펼쳐지는데요. 이 건물의 특징은 건물 전체가 통유리를 최대한 활용해 열려있는 느낌과 채광을 극대화했다는 점이에요. 스태프들이 친절한 거야 말할 것도 없지만 공간 자체가 주는 따뜻함과 환대의 분위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건 대체로 문턱이 없고 막힌 느낌이 없는 건물의 구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해요. 게다가 어디로든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아래 오른쪽 사진에서 보시듯 어린이 서가인 이층에서도 일층 서가를 내려다볼 수 있게 통유리가 역할을 톡톡히 하는 구조입니다. 이렇게 서로 통해있고 열려있는 느낌이, 저에게는 건물 자체가 저를 팔 벌려 따뜻하고 포근하게 받아주는 느낌이라 좋았습니다.

내가 바로 통유리다!!! 사진출처: brynmawrpa.org (left), © Kounee Suh (right)
주민들을 모으는 공간(feat. 재미있는 이벤트), 다양한 소음 레벨


밝게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 도서관 로비에는 다양한 높낮이의 소파며 테이블, 의자들이 공간을 포근하게 채우고 있었는데요. 제가 여기에서 가장 좋아했던 모습은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이곳에서 만나 밝게 웃으시며 브리지 같은 게임을 즐기시는 모습이었어요. 하루는 어마어마하게 승부욕을 불태우시며 화기애애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어르신들 테이블 왼쪽 옆으로, 각각 백인과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두 분이 교재 같은 걸 들여다보면서 서로 language exchange(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영어 표현을 그냥 썼습니다)를 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게임 테이블 오른쪽으로는 아마도 과외 공부를 하는 것 같은 어린이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선생님이 앉아서 함께 학교 숙제를 살피며 공부하고 있었고요. 저는 그렇게 다양한 연령대와 배경을 가진 주민들이 함께 모여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더라고요. 도서관을 자주 들락날락하면서 보니 그곳엔 갓난아이들을 데리고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아이 엄마들도 많았고 뭔가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북클럽 같은 것도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 사람들 뒤로 통유리를 통해 환하게 비쳐들던 노란 햇살이 너무 따뜻한 분위기를 내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도서관은 그저 책이 쌓여있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 즐거운 시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공간, ‘모이는 공간, 모여드는 공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요? 괜찮은 공간을 단순히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이겠지요. 하지만 이 도서관은 재미있는 이벤트와 프로그램들로, 단순히 몸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모으고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들을 잠깐 보실까요.

사진 출처: Ludington Library Facebook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 라이브로 진행한 프로그램인데요. 70년대 퀴즈쇼, 보이밴드 역사 퀴즈, 90년대 퀴즈쇼, 이런 걸 기획해서 당시 노래도 틀고 그 당시에 유행하던 물건도 맞추고 얽힌 에피소드들도 나누고 그러는 모양이에요. 답글을 보니 호응이 엄청나더라고요. 우리 아빠가 자기 오빠랑 같이 게임하면서 진짜 미친 듯이 웃었다는 등,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라는 등, 주민들끼리도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서로 더 가까워지는 것 같고요.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을 함께 모으려는 노력, 점점 대화와 웃음이 없어지기 쉬운 가족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아이디어. 좋지 않나요? 이런 걸 오프라인으로 했다고 생각해보면, 주민들은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부쩍 가까워졌을 것 같아요. 비슷한 시기를 거쳐 온 사람들끼리 추억을 소환하기도 하며 대화를 즐겼겠죠. 어른들은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온 시절의 생생한 얘기를 살짝 역사 공부하듯이 재미있게 접하고요. 도서관을 중심으로 이렇게 모여 웃을 수 있는 시간, 삶의 조각들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저는 참 좋아 보였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고 귀여워서 꼭 소개하고 싶었던 이벤트는 매년 부활절이면 마트에 등장하는 Peeps를 이용한 콘테스트인데요. Peeps는 마시멜로 병아리와 토끼로 유명한 제품입니다. 제가 20년 전에 (쿨럭)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 부활절에 한 친구가 제 기숙사 방문 앞에 Peeps 한 상자를 선물로 놓아준 적이 있어요. 당시엔 이 충격적인 제품을 처음 접하고 이 달아빠진 노랑 병아리들을 어떻게 처치하지... 하고 고민이 컸었답니다. 어쨌든 그렇게 미국인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할 이 제품을 가지고 콘테스트를 열고 있네요. 연령대별로 참가할 수 있고 가족 단위로도 참가할 수 있어요. 아래 사진처럼 도서관을 재현한 응모작도 있었고, 1776년 조지 워싱턴이 댈라웨어 강을 건너던 광경을 재현한 작품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군요.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표현한 작품쯤 되려나요.

사진 출처: Ludington Library Facebook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이 도서관 2층에 있는 어린이 서가에는 한쪽에 작은 홀이 있는데요. 여기에서는 종종 즐거운 행사들이 열리곤 했어요. 같이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시간, 책을 읽어주는 스토리 타임, 뭔가를 나눠주는 행사들. 약 5년 전 저희가 갔던 날에는 왼쪽 사진처럼 풍선 아저씨가 오셔서 아이들이 원하는 풍선을 만들어 주셨어요. 놀라운 것은 오른쪽 사진처럼, 코로나로 위축된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아이들에게 만들기 재료가 담긴 가방을 꾸려 나눠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전화로 예약하면 로비에 놓아두어 접촉 없이 가져가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배려. 도서관에 아이들이 모이고 아이들이 도서관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음들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들

주민들을 모으는 공간과 관련해서 살짝 짚고 싶은 것은 다양한 소음 레벨인데요. 이렇게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니만큼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그렇기에 소음 레벨을 어떻게 컨트롤하는지도 중요한 이슈인 것 같아요. 제가 한국에서 가끔 이용했던 동네 도서관은 대체로 사람들이 머리 싸매고 공부하러 오는 곳이었고, 미칠 듯한 적막과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였거든요. (아직도 그런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엔 왜 그렇게 모든 연령대에 걸쳐 시험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걸까요.)


주차장 쪽 문으로 입장했을 때 이 도서관의 소음 레벨은 왼쪽에서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자연스럽게 낮아지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소리가 커지고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작아지는 시스템이었어요. 가장 왼쪽에 있었던 로비는 말씀드렸듯이 카드 게임이나 보드 게임이 가능할 정도로 꽤 거침없는 대화와 웃음이 오고 가는 공간입니다. 그 옆의 안내 데스크는 당연히 문의나 답변이 가능할 정도로 일상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고요.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우선 중고서적을 싼값에 구입할 수 있는 북 세일 코너, 그리고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이며 영화를 훑어볼 수 있는 코너, 그리고 약간 소음이 있어도 상관없는 DVD, CD, 오디오북 대여 코너가 순서대로 영리하게 배치되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동선을 거치면 소음 레벨은 자연스럽게 낮아져 있고요. 그다음으로는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조금 조용하면 좋을 서가들이 등장합니다. 소음 레벨이 다소 증가할 수밖에 없는 아기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서가는 2층에 따로 마련되어 있되, 통유리로 1층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어서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설계한 것 같았어요. 보다 조용한 공간은 아주 살짝만 내려가는 반지하에 위치해 있는데, 역시 통유리로 되어있고 사실 바닥이 그라운드 레벨이라서 반지하라고 볼 수 없는 아늑하고 멋진 공간이었습니다. 정말 조용한 장소가 필요하다면 이런 목적을 위한 미팅룸들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도 해요.


저는 이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다양한 소음 레벨이 존재하는 활기찬 도서관,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활발한 도서관,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필요한 소음 레벨을 얻을 수 있게 공간을 영리하게 구획한 도서관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양성을 포함하는 프로그램과 컬렉션


앞서 살짝 보셨듯이 이 도서관은 프로그램 기획에 진심인 도서관인데요. 한 해에 400여 개가 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되, 전 연령에 걸친 프로그램을 구상한다고 합니다. “There is something for everyone from toddlers through octogenarians!”이라는 문구에서 보듯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에서부터 80대의 어르신들까지, 모두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즐거운 일들을 벌이고 있다고 해요. 책만 대여하는 게 아니라 심지어 특별한 케이크 팬이나 베이킹 팬을 대여해 주기도 하는 도서관이라는 점! :) (베이킹을 즐기는 입장에서 이건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모양틀은 사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쓰는 건데 그걸 위해서 많은 팬을 사는 건 경제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수납 측면에서도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 같거든요.)


아래는 그 재미있는 프로그램들 중 일부입니다. 방탈출도, 의자 요가도 있고, 온라인 요리 교실도 있어요. 저자와의 버추얼 만남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고, 다양한 관심사들을 아우르는 강의도 다방면에 걸쳐 꾸리고 있더라고요. 둘러보니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줌 강의는 주택 매입에 관한 부동산 전문가의 강의였어요. 제 기억으로는 학교 선생님 출신의 자원봉사자들이 이민자들에게 매주 토요일에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 주는 오프라인 클래스도 있었어요. 남녀노소 누구나 아우르는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도서관 측의 배려가 엿보입니다.

연령대와 관심사를 고려한 다양한 프로그램들. 사진 출처: Ludington Library Facebook

아이들을 위한 스토리 타임 프로그램 하나만 보더라도 다양성을 굉장히 신경 썼구나, 하는 느낌을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아래 사진들에서 보듯 우선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으로 여성과 남성이 한 분씩 있고요. 스페인어 사용 인구가 많은 미국의 특성상 스페인어로 책을 읽어주는 분이 또 계십니다. 코로나로 도서관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도 스토리 타임은 꾸준히 온라인으로 이어지고 있는 중이에요.

이야기를 읽어주는 미스 앰버와 미스터 로런트, 그리고 스페인어 스토리 타임을 담당하는 미스 벨라.

스토리뿐 아니라 운문, 즉 시를 다루는 분이 또 계시고요. 사인 랭귀지, 즉 수어를 가르쳐 주는 분도 계시네요.

시를 다루는 미스 멜로디와 수어를 가르쳐 주는 미스 스테파니.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은 꼭 스토리나 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무척 다양합니다. 과학 실험 교실을 담당하는 미스 애쉴리, 만들기 교실을 담당하는 미스 재키가 있고, 요리사 분이 꾸준히 담당하시는 요리교실도 있네요.

가운데 사진은 아마 <매직 팟>이라는 동화를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리얼을 이용해 만들어 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네요.


프로그램들 뿐 아니라 컬렉션과 큐레이션 역시 ‘universal, inclusive, accessible’이라는 키워드에 부합할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요. 이 도서관은 12만 권의 책과 만 6천여 개의 DVD, 만 8천여 개의 오디오 북과 음악 시디들을 보유하고 있어요. 오디오 북은 단지 시각 장애가 있는 분들 뿐 아니라 시력이 약해지신 어르신들, 집안일을 하면서 소소하게 듣고 싶은 사람들, 아직 글을 떼지 못한 어린이들, 그리고 영어 듣기 연습이 필요한 이민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용한 자원이 되겠죠.


이렇게 이 도서관에는 단순히 책뿐 아니라 정기간행물, 아티클, 비주얼 타입과 오디오 타입의 다양한 미디어들을 고루 갖추고 있는데요. 이 중에는 다른 언어로 된 책과 다른 나라의 영화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도서관이 운영하는 필름 클럽에서도 세계 각국의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 같더라고요. <부산행>이 보이길래 반가운 마음에 캡처해 왔습니다.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필름 클럽
북클럽 주제도 'racial justice'네요.


어린이 서가에서 보는 물리적 배려


이제 마지막으로 2층에 위치한 어린이용 서가를 조금 다루어볼까 해요. 우선은 이 공간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예쁘고 아기자기한지, 얼마나 아이들(뿐만 아니라 저 같은 어른이들)을 홀리는지 보여드리고 싶은데 아쉽게도 관련된 이미지가 없네요.


이 공간은 입구 쪽에 우선 안내 데스크가 크고 낮게 설치되어 있어요. 키가 작은 아이들의 신체 구조를 배려한 높이로요. 그 앞쪽으로는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잔뜩 깔린,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컴퓨터들이 대여섯 대쯤 있었던 것 같고요. 책이며 DVD, CD 등이 진열된 서가의 모습은 왼쪽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아이들의 작은 키로 닿을 수 있는 높이로 서가를 만들어 두었어요.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어린이용 서가에서 어른들 서가가 보이는 구조입니다. 아래 오른쪽 사진을 보시면 아래쪽으로 저층의 서가가 보이시죠? 저 아래의 서가는 소설, 신문, 잡지류가 구비된 곳이라 가장 인기 있는 곳이기도 한데,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2층에서 시간을 보내다가도 우리 아빠, 우리 할머니가 어디 있는지 아래를 내려다보며 종종 확인하더라고요.

좌: 낮게 진열된 어린이용 서가 모습 / 우: 아래쪽으로 1층 서가가 보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스토리 타임이며 만들기 교실 같은 것들이 진행되던 홀의 모습입니다. 유연한 공간이었어요. 아이들이 다양하게 손발을 움직이며 놀고 배울 수 있도록 자석을 붙일 수 있는 공간, 블록, 기차 테이블 같은 것들이 있는 놀이 공간이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벽에도 아이들 키높이에서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붙어있었고요.

이날은 풍선 아저씨가 오셔서 아이들에게 풍선을 만들어 나눠주는 날이었어요.
저희 아이가 한 살 반 정도 되었을 때인 것 같네요. 굉장히 좋아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진행되던 스토리 타임을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그냥 단순히 이야기를 읽어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관련된 주제로 뭔가를 만들어보는 것까지 함께 기획한 'sensory story time'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주시던 남자 선생님이 계셨고, 한쪽에는 각종 재료가 듬뿍 올라간 커다란 테이블을 두고 만들기를 도와주는 여자 선생님이 계셨어요. 각종 색지가 난무하고 솜이 풀풀 날리던 기억이... 도서관 사서 분들은 약간 치어리더 느낌으로 많은 아이들이 재미있게 참여하도록 격려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서가 쪽에 있던, 아직 말도 잘 못하던 저희 아이에게도 색지를 한 장 건네주면서 갖고 놀라고 하시던 기억이 있어요. 아이가 좀 더 크면 우리도 참여해야겠다, 마음을 먹고는 이사를 가는 바람에 함께 해보지 못했네요.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 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글이었는데요. 그래도 'universal, inclusive, accessible’이라는 키워드가 조금이라도 설명이 되었기를, 그리고 이런 키워드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실 이 도서관이 너무 좋아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가 싫었답니다. 외국인, 여성, 사회적 약자인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었던 엄마로서의 제가 이곳을 ‘내 공간'으로 인식하고 확실히 애착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도서관이 저 키워드들을 따뜻하게 구현하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도서관은 그저 책이 쌓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 정보와 지식, 기회, 그리고 사람들과 연결되는 장소라는 점을 이 도서관을 통해 즐겁게 깨달았고요. 무엇보다 친구처럼 이웃처럼 반갑게 맞아주는 도서관, 나이며 성별이며 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도서관, 그렇게 모두를 위한 도서관이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코로나가 어서 좀 잠잠해져서 독일의 도서관들은 이런 키워드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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