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시
2021. 12. 13.
박노해, ‘그 겨울의 시'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날이 많이 춥네요. 항온 기능을 상실하고 변온동물로 살고 있는 저는 따뜻한 목욕물과 전기담요 사이를 오가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이번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습니다. 오늘은 서리가 가득하네요. 많이 먹고 겨울잠 자고 싶어요.
우리가 만나는 사계절 어느 하나 사랑과 맞닿아 있지 않은 계절이 없지만 계절마다 느껴지는 사랑의 감각이 조금씩 다른 것 같아요. 봄은 간질간질 설레는 사랑, 여름은 뜨겁게 휘어 감는 사랑, 가을은 빨갛게 짙어지는 그리움 같은 게 생각난다면 겨울은 따뜻하게 품어주는 인류애가 흰 눈과 함께 성스럽게 등장하는 느낌. 쌓이는 눈에 걱정도 함께 쌓이고, 세상의 모든 숨 붙어있는 것들이 어느 한 곳쯤 따뜻하게 파고들 자리가 필요한 계절이니까요.
4월이 비유적인 의미에서 잔인한 달이었다면 (엘리엇이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이유는 찬란한 생명과 부활의 계절에, 그런 생명과 부활의 힘을 잃어버린 서구 문명의 비극성을 절감하며 느끼는 상실감 때문이라고 하죠) 12월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잔인한 달입니다. 먹을 것은 없고 날은 춥고 밤은 더욱 혹독하고.
인디언들은 12월을 ‘나뭇가지가 눈송이에 뚝뚝 부러지는 달’, ‘늑대가 달리는 달’, ‘무소유의 달’, ‘침묵하는 달’, ‘다른 세상의 달’ 등으로, 1월은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 '인사하는 달', '바람 속 영혼들처럼 눈이 흩날리는 달', '짐승들 살 빠지는 달' 등으로 부른다고 하네요. 무소유, 침묵, 인사, 그리고 다른 세상이라는 이름이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나뭇가지는 뚝뚝 부러지고 짐승들마저 살 빠지는 달. 눈이 바람 속 영혼들처럼 흩날리는 겨울날에 우리는 무소유를 감각하고, 침묵하고, 마음 깊은 곳을 응시하며,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는 이 아름답고 혹독한 시간이 우리를 진실로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시 안에서 얇은 이불을 덮고 누운 할머니와 손자가 더 추위에 떨 약한 존재들을 걱정하는 모습에, 무엇보다 손자의 눈물과 기도에 그만 마음이 주르륵 늘어나 버렸습니다. 저희 엄마도 늘 바람이 차가워지면 온 동네 사람들을 다 걱정하시고도 모자라 길에 다니는 강아지 고양이 다람쥐 참새, 마당의 나무들마저 걱정하시곤 했어요. 이웃들은 어떻게 도우셨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적에 저는 엄마가 새들을 위해 찐 쌀을 마당에 뿌려주고, 멍멍이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게 상자를 깔아 주고, 나무에도 옷을 입혀 주시는 모습을 보곤 했지요. 이런 따뜻한 마음들이 이 세상을 아주 조금씩 데워서 세상은 그럭저럭 겨울을 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듣고 자란 시인은 자라서 그토록 단단하고 아름다운 시들을 세상에 내놓으셨네요.
같은 필사 모임에 계신 분들의 따뜻한 단상도 가져다 놓습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어요. 겨울은 누군가에겐 너무 혹독한 계절이네요. 문풍지 우는 추운 밤에 할머니의 따뜻한 염려의 마음을 자장가 삼아 듣고 잠드는 어린 손자를 떠올려봅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자란 손자는 자신보다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주는 어른으로 성장하겠지요? 시인의 삶을 찾아보다 그의 경이로운 정의감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했는데 오늘의 시가 힌트가 된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손자에게 대물림되어 시인은 그것을 삶으로 증명한 게 아닐까요. (주정현)
박노해 시인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자장가로 듣고 자라며 그것을 온몸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여 인격과 인생을 만들어 왔군요.
부모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아이들에게
공부, 숙제, 학원, 학군, 대학입시, 주식, 집값 이런 것들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소중한 생명들에 대한 사랑과 걱정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이혜령)
이 시를 배달받고 나서 이틀 뒤엔가 유강희 시인의 <12월>이라는 시를 배달받았습니다. 시인은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부비는 소리가 난다고 했어요. 가난한 새들은 너무 높이 솟았다가 그대로 꽝꽝 얼어붙어 퍼런 별이 된다고, 12월이 되면 누구에게나 오래된 슬픔의 빈 솥이 하나 있음을 안다고요.
12월이라는 심상이 시간에 따라 얼마나 훅훅 바뀌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시를 필사하는 내내 해 보았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왕겨 부비는 소리, 왕겨 타는 소리가 이미 저에겐 낯설거든요. 어렸을 때만 해도 12월이라는 건 군밤과 군고구마 냄새,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두는 밥그릇, 석유난로에서 전해지는 알싸한 향의 온기 같은 거였는데 벌써 그런 심상들은 중앙난방이며 전기담요와 쿠쿠밥솥(후후), 다른 이국적인 먹거리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으니까요.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은 풍족해져서 왕겨 부비는 소리, 왕겨 태우는 냄새조차 낯설어졌지만, 12월이라는 시간을 조금 더 깊이 감각해보는 기회를 시를 통해 갖게 되니 감사한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의 12월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모두들 평안하시길.
어제 드디어 세 번째 책 원고를 탈고했습니다. 전체 원고가 없는 상태에서 계약한 건 처음이다 보니, 정작 앉아서 글을 쓴 건 몇 달이지만 거의 1년을 덜컹거리는 마음으로 불안을 안은 채 쫓기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이번 책은 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세상에 하고 싶은 말들을 담았는데, 이렇게 써도 되나 싶을 만큼 아주 제 맘대로 썼습니다.
이제 도처의 전원을 끊고, 마음의 안달을 등지고, 무심했던 몸의 외곽으로 돌아가고, 온갖 감각을 다시 열고, 두 눈을 쉬게 할 예정입니다. 어두워지면 제 곁에서 잠들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꼭 안고 어둠을 거스르지 않을 거고요. (오늘 배달받은 이문재 시인의 <도보순례>에 등장하는 표현들입니다.) 이제 그동안 쓰고 싶었던, 좋아하는 글들을 쓸 예정입니다. 미뤄둔 음식 에세이들과 노래 편지들이 기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