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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un 07. 2024

낭만주의 시대

예순 번째 시

2021. 11. 24.

김용택, ‘낭만주의 시대,' 

시집 <울고 들어온 나에게> 중에서


[낭만주의 시대]


외상으로 책을 샀다.

책을 외상으로 사들고

서점 문을 나서는

나는 가난하였다.

가난이 달았다.


책을 외상으로 사들고

서점 문을 나서서

한시간 오십분 동안 완행버스를 타고

책을 보다가

차에서 내려 삼십분 동안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날은 헌책을 샀다.

지게로 한짐이었다.


책을 짊어진 나는

밤나락을 짊어진 농부처럼

성큼성큼 들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이 시에서 가장 마음을 잡아끄는 문장은 아마 누구에게나 비슷할 겁니다.

    가난이 달았다.
    시집 제목이 <울고 들어온 나에게>라는 점도 마음을 끕니다.


    가난이 달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일 겁니다. 가난을 쓰게 여기는 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가난을 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더라도(飯蔬食飮水 曲肱而沈之 반소식음수 곡굉이침지, 제게는 늘 곡괭이가 생각나는 구절입니다.), 그렇게 다소 거칠고 궁핍한 생활을 하더라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더라는 <논어> 술이편(述而篇)의 말이 생각나는 건 자연스럽지만 좀 구태의연하고요. (이 문장은 사실 가난 그 자체에 자족하는 의미라기보다는 그 뒤에 나오는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부와 귀는 내게 뜬구름과 같다"는 문장의 대조항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봅니다.)


    조금 덜 구태의연한 생각을 덧붙여 보자면, 꿀 같은 달콤함은 원래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그 안에 있는 자들보다는 떠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듯이요. 충족감은 풍요보다는 결핍에서 더욱 진하게 맛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 썼던 천상병 시인의 시들이 유난히 맑고 순수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마 비슷한 맥락일 거예요. 이미 책으로 그득한 서가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외상으로 산 책이 그토록 달지도, 지게로 한 짐 진 헌 책이 그렇게 밤나락같이 묵직하고 뿌듯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주전부리가 별로 없던 어린 시절에 똑 따서 빨아먹던 샐비어 꽃의 꿀맛이, 온갖 신기한 간식들로 풍족해진 요즘에 맛보는 그 어떤 단것보다 제게는 강렬하고 달콤하게 각인되어 있듯이요.


   그러므로 가난이 쓰다고 찌푸리는 마음과 가난이 달다고 서글픈 미소를 짓는 마음, 그 두 마음 사이에 놓이는 것들을 헤아려보게 되네요. 실은 저도 요즘 이런저런 사정으로 경제적으로 많이 쪼들리고 있는데요. 그 가운데서 주워 올릴 수 있는 행복과 단맛을 최대한 느껴보려고 합니다. '달콤한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한 완벽한 세팅인 거야, ' 이런 마음으로요. 마음만 먹으면 외식을 할 수 있었던 때와는 다르게 오랜만에 들뜬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가서 맛본 자장면이 얼마나 맛있었게요.


   결핍은 당연하고도 중요한 삶의 조건입니다. 그 조건을 질색하며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것인지, 그 조건을 겸손한 마음으로 귀하게 바라볼 수 있는지가 많은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결핍이란 불안처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서, 결핍을 '꼭 채워야만 하는 것'으로 믿으며 연연하는 자세로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습니다. 우리 인생은 납작하지도 않고 각자의 삶의 모양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다 채울 수도 없고 채워지지도 않거든요. 일례로, 돈으로 아이들에게 책을 척척 사줄 수는 있어도 책을 읽고 싶은 마음, 책에 배고픈 마음은 사줄 수 없습니다. '비었다'라고 느끼는 곳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요.  


   두 번째로 눈길을 끄는 것은 '낭만'이라는 단어입니다. 낭만주의 시대라는 건 이렇게 외상으로 책을 사서 완행버스를 타고 책을 보다가 밤길을 걷고 걸어 집으로 가는 시대이기에 앞서, 서점 주인이 책을 외상으로 주었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시인의 이 모든 행위를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것. 그건 그 서점 주인의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시대의 문화였을까요.


   앞서 결핍을 중요한 삶의 조건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결핍을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일 거예요. 생존을 위협하는 극악한 결핍 앞에서는 이런 말들이 모두 의미를 잃게 될 테니까요. 낭만은 모두 사라지고 아마 생존만이 거대한 명제로 목을 짓누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낭만이란 건 아마 물질적으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있어야 가능할 거예요. 즉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거칠게나마 먹고살 거리가 있고, 그리고 조금 더 가진 사람들은 소박한 방식으로 다정하고 넉넉할 때, 그때 비로소 낭만도 꽃필 수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어린 시절에 살았던 동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부단히 살폈던 기억이 있습니다. 누가 굶지는 않는지, 누가 매 맞지는 않는지. 더 가난했던 시절인데 우리는 그렇게 살았었네요.


   한편으로는 책을 살 돈은 부족했지만 시간은 족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가기도 해요. 완행버스를 타고 책을 볼 시간, 밤길을 걸으며 그 책을 생각했을 시간들. 책에 탐닉할 수 있는 시간이 그래도 풍족하게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낭만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는 마음과 그렇게 어렵게 얻은 것을 쌓아가는 시간들.


   어떤 의미에서 낭만은 시간 그 자체입니다. 조급함은 낭만에게 옆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시간에 쫓기고 내몰리는 일은 낭만과는 상극이니까요. 가난과 낭만, 왠지 구태의연한 두 단어를 새롭게 곱씹어보게 되는 시였습니다. 두 단어 사이에 나 있는 길도요.  


   실제로 제게 책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단맛을 주는 힘을 가진 물건입니다. 화자가 외상으로 사서 귀하게 읽은 책이 무엇이었을까 참 궁금해져요. 저도 그런 책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달게 만들어주는 책을.




   안녕하세요.

   꽤 오랫동안 스스로 마감을 정하고 매주 한 편씩 글을 올려왔는데, 최근 작업량이 부쩍 많아지고 이곳에 미리 올릴 수 없는 글을 쓰는 일이 많아지면서 저만의 브런치 마감을 이어가기가 조금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원고를 쌓아 올렸다가 출간하면 모두 비공개로 거둬들이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제 브런치는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 덩어리가 되고 있네요. 그런 공간이지만 꾸준히 찾아주시는 분들께 얼마나 고마운지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앞으로 이곳에는 조금 느슨하게 글을 올릴 예정이에요. 그래도 힘닿는 대로 찾아올 예정입니다. 대신 책으로 활발히 인사 전할게요.    

   8월 말에서 9월 초에 두 권이, 11월쯤에 또 한 권이, 이듬해 봄에 또 한 권, 그 해 하반기에 또 한 권, 그 뒤로도 계약이 몇 건 있어서 별일 없다면 책으로 전하는 인사는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옆으로 눕힌 전자레인지 같은 얼굴로 따뜻하게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디선가 주워온 짤인데 원작자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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