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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ul 03. 2024

시를 만나는 새로운 방법

나의 시시하지 않은 시 경험

   김소연 시인이 뮌헨에 오셨습니다. 제 글을 아껴주시는 몇몇 분들께서는 이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실 거예요. 짝사랑하던 유니콘이 내 눈앞에서 풀을 뜯고 있는 느낌? 아, 유니콘은 풀을 안 먹나? 아무튼 제가 그분의 글을 무척 좋아해서 여기저기 많이 나대고 다녔는데, 이렇게 만나 뵐 줄 알았으면 좀 더 얌전히 나댈 것을 그랬습니다. (얌전히 나대는 게 뭐냐고요? 아 그 뭐 단아한 술주정.. 뭐 그런 느낌으로 이해하시면...)  


   실은 올 초여름, 뮌헨에서 많은 작가님들을 만났습니다. <코리안 티쳐> <골드 러시> 등의 작품을 쓰신 서수진 작가님, 제가 이곳에 리뷰도 남긴 <천 개의 파랑>의 천선란 작가님, 그리고 김소연 시인을 쫑쫑 따라오신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의 하미나 작가님까지. 서수진 작가님은 여기저기 비추는 사랑스러운 작은 해님 같았는데 밤에 더 잘 떠 있었고요. 천선란 작가님은 고요한 눈빛을 하고 계셨고, 저런 작은 발로 참 잘도 걸어 다니시는구나 싶었습니다. 하미나 작가님은 글로 만났을 때는 세상 멋진 언니였는데 직접 만나니 아이처럼 너무 귀여우셨어요. 눈이 반짝반짝한 연두색 병아리 느낌이랄까. 본인이 겪는 노화에 관해 얘기하는 하미나 작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김소연 시인의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 노화는 처음이지?)


   김소연 시인은 쓰시는 글과 결이 무척 닮아 있는 분이었어요. 당연히 그런 거 아니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저만해도 글과 실제 인물 사이에는 괴리가 좀 있는 편이거든요. 대체로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걸걸한 여장부를 상상하시는데 저는 사실 목소리도 사지육신도 좀 하찮은 편입니다. 어쨌든 시인이 이야기하실 때, 안에서 웃음이 빙긋 떠오르는 그 특유의 표정을 보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은은하게 웃기셨고, 편안하게 솔직하셨고, 담백하게 꿰뚫으셨어요. 무엇보다 멋있으세요. 인간이 원래 항온동물이지만 그날그날 늘 온도가 적정하게 유지되는 느낌의 사람을 만나기가 사실 쉽지 않은데 아유 여기 계셨군요.


   마음껏 잘해드리면 상대가 부담스러울 것을 염려하는 인간형인 저는 너무 좋으면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는 편이라, 가방에 책을 넣어 다니면서도 사인을 부탁드릴 용기가 나지 않아 이번 생은 그냥 이렇게 살기로 했는데요. 벤치에 함께 앉아 있던 시인께서 슬그머니 시집을 건네 주셔서 굉장히 침착한 표정으로 내적비명을 질렀습니다. 끼야야야야야야악. 이미 읽었던 시집이지만 희연 시인님의 새 시집인 <당근밭 걷기>와 함께 곁에 두고 이번 여름을 나려고요.  

수진 작가님도 미나 작가님도 소연 시인님도 뮌헨에 또 오신다고 했음. 무르기 없기.

   이곳에는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한인 예술가도 참 많아요. 음악과 미술, 건축 쪽으로 유학 오시는 한국 분이 많기도 하고, 같은 분야든 다른 분야든 그들이 모여 근사하게 협업하는 모습도 자주 봅니다. 언어를 넘나드는 번역가님들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제겐 항상 귀한 경험이고요. 이번에 오신 작가님들은 베를린에 계시는 하미나 작가님을 빼고는 대체로 뮌헨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이곳에 오래 머무르셨는데, 덕분에 여기저기에서 모임과 행사들이 퐁퐁 터지는 게 축제 같았습니다.


   아래는 수진, 선란 작가님이 등판하신 행사였는데 그날 인상적이었던 작가님들 말을 붙여 둡니다. 

서수진: 모든 사람의 삶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뮌헨에서 태어난 사람의 절실함과 이민자의 절실함이 다르지 않을 거예요.


천선란: 저는 실수와 돌발성이 인간의 창의성이라고 생각해요.

이곳의 말을 모르기 때문에 아마 제가 뮌헨을 더 잘 묘사할 수 있을 거예요. 감각이 더 예민하니까.


   선란 작가님과 소연 시인님은 일정이 겹치지 않게 뮌헨에 계셨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을 묻는 질문에 두 분의 대답이 신기하게도 일치했어요. "거리에 개들이 많아요. 그들을 보는 게 좋았어요." 작가들의 눈높이는 주어진 대로 정중앙에만 놓이지 않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소연 시인은 여기에 덧붙여 배낭처럼 생긴 독일인들의 가방이 인상적이었다고 해요. 최근에 마감한 책에서 그 배낭에 관한 이야기를 쓴 저는 십이지장 부근에서 미소가 퐁 튀어나오는 걸 느꼈습니다. (실은 언급한 선란 작가님의 첫 문장은 올 겨울에 나올 제 책의 '서투름' 챕터와 잘 맞아떨어지기도 해요. 저 말을 듣고 너무 좋아서, 주파수 맞는 외계인의 느낌으로 변태처럼 혼자 히죽 웃었습니다.)

   

   소연 시인님과 관련해서 열렸던 행사는 두 가지였는데요. 이곳에서 문학과 예술에 관한 멋진 작당을 많이 하고 계신 박술 선생님이 아주 기가 맥히게 판을 짜놓으셨고, 그 안에서 의미를 여러 겹으로 재생해 내며 단숨에 깊이 교감하는 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무척 좋았습니다. 막혀있는 줄도 몰랐던 혈을 조그맣게 뚫어준 느낌이라 이곳에도 기록을 남겨 둡니다.    


1. Soyeon Kim X Ardhi Engl X Sarah Neumann, Hannah Mitterwallner @ Gallery The Tiger Room (June 22, 2024)

   시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감각할 수 있었던, 나에게는 역사적인 날. 그동안 시는 나에게 은밀한 즐거움을 주는 아름다운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는데,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시를 마주하면 일단 책상에 올려놓고 내가 가진 체로 의미를 건져 모양을 빚는 놀이에 빠지곤 했는데.


   시와 음악과 미술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퍼포먼스는 시가 뇌를 거쳐 마음으로 오는 게 아니라 입자화되어 바로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 시는 원래 노래였구나 싶었고, 시는 책상에만 올려놓는 텍스트가 아닌데 그동안 내가 너무 한 가지 방식으로만 시를 만났구나 싶었다.  


   Rabbit Hole이라는 전시가 (여기에 시 한 편이 숨어 있다.) 열리고 있는 공간. 수도관과 배드민턴 채, 폐 용수철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여기에 시 한 편이 또 숨어 있다!), 거기에 시인의 근사한 목소리가 사르르 섞였다가 가끔은 몇몇 단어와 구절이 파편처럼 꽂히는 느낌이 가만히 강렬했다. 글자들이 해체되어 공간에 뿌려졌다가 사르르 녹는 느낌이랄까. 


   우리는 시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구나.

(공연 영상이 궁금하신 분은 제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보실 수 있어요. 영상이 길어서 여기에는 올라가지 않네요. @kehet)


2. Soyeon Kim X Minjae Lee X Sool Park @ Apartment der Kunst (June 28, 2024)

   이전에 들었던 김소연 시인의 말 중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와 '없다'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자꾸 '있다'와 '없다'를 구분하는 것에 화가 난다고 했다. 있는데 없다고 한다고. "없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제가 시로 하는 일이에요"라고 말했던 시인은, "있어졌어!"라는 아이의 서툰 말을 너무나 마음에 들어 했다.


   공간에 들어서자 이민재 작가는 없지만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작가의 심장소리와 새싹처럼 나와 있는 까만 발끝. 동굴 속에, 뭔가를 촉진하는 밤 공간에 누워 있는 한 사람. 애초에 이런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두 분을 엮어 기획했다면 박술은 천재다.


   몸에 딱 들어맞는 크기의 그 어둠 속에 누워 보았다는 시인은 야간열차에 타고 나무 이불을 덮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시인은 "행사 내내 작가님 손을 (아니, 발을 •ᴗ•) 잡고 돌아다니는 느낌이었어요."라고 했고, 나는 행사 내내 내가 깔고 앉아 있는 어둠 속에서 두 팔이 가만히 올라와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안겨 심장 소리를 듣는 것 같은 묘한 아늑함과 흥분.


   한국어와 독어와 영어 세 언어가, 아니 심장 소리까지 네 언어가 어우러지는 걸 듣는 게 참 멋있었다. 세 점의 궤적이 한 자리에 모인 지점에서 ”여기에 있자/ 그래 그냥 그러자/ 그래야겠다“라는 시로 마감할 때 그 마침표가 얼마나 눈동자 같았는지.


   오늘 부고를 하나 들었다.

   없지 않다.



+
이 글을 쓰는 중간에 전해받은 부고에 하루 종일 마음이 시큰거립니다. 제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구독했던 분 중 하나인 뮌헨의 마리,
늘 다정하고 강인했던 오유정 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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