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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y 03. 2022

찢다

스물네 번째 시

2021. 1. 17.

나희덕, ‘찢다'

나희덕 시집 <기능주의자> 중에서


[찢다]


찢고, 찢고, 찢는다


모든 기록은 일종의 얼룩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찢을 때마다 들리는 종이의 비명

그러나 정작 찢어야 할 것들은 손도 대지 못했다


저 나무상자에는

오래 열어보지 못한 편지들이 있고

열어보지 못하는 것은 찢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고

찢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예의를

아직은 완전히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도 아닌데

나는 왜 열지 못하는가


그렇게 찢기고 찢겼으면서, 차마 찢지 못한

한 줌의 사랑이 남아 있지도 않은데


찢으면 찢을수록

끝내 찢지 못한 것들이 떠오른다


나를 이루는 마지막 페이지

또는 첫 페이지


한 번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그걸 찢는 순간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편지들



글씨가 가관이군요


시를 읽는 내내 종이 찢는 소리를 떠올렸어요. 특히 편지를 찢는 소리. 이메일과 파쇄기가 있는 요즘엔 예전처럼 많이 듣지는 못하는 소리죠.

손으로 쓴 편지가 귀해진 시대입니다. 서로의 글씨를 알아보는 사이라는 건 왠지 뭉클한 느낌을 주기까지 하는 그런 시대.


종이는 물리적으로 손에 쥐고 찢을 때의 경쾌하기까지 한 단호함이 있는데, 디지털 세상에서는 그 단호한 ‘끝의 의식’이 다소 흐릿합니다. 짝 찢어버리면서 안팎의 비명을 듣는 일 없이 그저 망설이다 delete 키를 누르는 것에서 그치고, 그것 역시 메일함 휴지통을 뒤지거나 ctrl+z로 언제든 다시 살려낼 수 있으니까요.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인간들을 돕는 것은 뒤도 안 보고 찢어버릴 수 있는 아날로그 쪽일까요, 아니면 후회하며 다시 살려낼 수 있는 디지털 쪽일까요.


돌아보면 저는 단호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간입니다. 워낙 생각이 많기도 하고, 뭐든지 쉽게 결론을 못 내기도 하고요. 가능성이라는 건 그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지켜주고 싶은 쪽의 인간형. 뒤도 안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신기해하며 자꾸 뒤를 돌아보는 인간형. 후배 하나가 저에게 밀크부단이라는 귀여운 수식어를 붙여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 터져하곤 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고 할 일이 많아지면서 선택에 드는 시간이 드라마틱하게 줄어 제게도 단호함이라는 것이 늘었지만, 그래도 편지를 단호하게 찢는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찢기보다는 태우는 쪽을 생각했을 것 같아요. 편지라는 건 한 사람의 마음과 시간을 잘라서 건넨 조각인데, 그걸 찢어버린다는 건 그걸 쓰는 동안 오롯이 나에게로 향해 있었을 그 마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시에도 들어있듯, 찢으면 찢을수록 찢지 못한 무엇인가가 떠오를지도 모르고요. 외부적 행위와 내부적 인식 사이의 균열 같은 것이 오히려 나를 찢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래도 찢는 마음을 알겠습니다. 루소가 말하듯이 의식이나 제례 같은 것이 인간 의식에 미치는 힘 말이죠. 저는 결혼은 했지만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는데요. 가족 간에 이런저런 사정이 있기도 했고, 남들 앞에서 결혼의 예식을 올리는 것에 딱히 흥미도 없었거든요. 그건 그야말로 형식에 불과하니까, 하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살면서 가끔은 결혼식이라는 것을 했다면 우리의 마음가짐이 조금은 달랐을까, 궁금해지는 순간들이 생기더군요. 그러니까 '의식'이라는 것을 거쳤다면 뭔가 달라지는 부분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 말이죠. 장례식의 필요성은 절감합니다. 가는 이를 애도하고 인사할 수 있는 시간. 마음속에서 고인과 연결된 삶의 페이지를 가만히 찢어내 어딘가 다른 곳에 보관해두는 의식. 찢는 행위를 의식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결혼식보다는 장례식에 가까울 테니, 그 찢는 행위를 둘러싼 생의 파동 변화를 알 것 같습니다.


"모든 기록은 일종의 얼룩이다." 


처음에는 살짝 저항감이 드는 문장이었는데, 들여다보고 있으니 화선지에 먹 번지듯 공감의 영역이 잔잔히 늘어나네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나를 이루는 마지막 페이지

또는 첫 페이지


한 번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그걸 찢는 순간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편지들"


이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면 사실 그건 고통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에서처럼 내게도 그렇게 오래 열어보지 못한 편지, 찢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 편지가 있었나 더듬어보자니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어 달고 갑니다. 감상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김동률 목소리에 현빈 얼굴이 왔다 갔다 하면 이건 우릴 죽이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https://youtu.be/kMRLzSQorK0


저는 사실 예전의 누군가가 마음을 고백했던 메일을 프린트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잊고 지내다가 서랍을 정리할 때마다 한 번씩 꺼내보면서 웃곤 해요. 최근에 정말 오랜만에 새해를 맞아 서랍 정리를 하다가 또 발견했습니다(참고로 이 글은 1월 17일에 써둔 글입니다). 관계는 찢어졌지만, 이걸 찢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모든 기록은 일종의 얼룩이라는데, 세상은 어차피 얼룩 투성이고 얼룩 없이 살 수 있는 인생은 없잖아요. 게다가 귀엽고 예쁜 얼룩이거든요. 현재의 내가 보잘것없게 느껴지거나 마음이 비참할 때, 누군가 나를 이렇게 좋아했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꽤 괜찮은 위로가 되니까요. 비상약 같은 겁니다.


반려인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닐까 걱정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그런 부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삽니다. 헤어지고 나서 소독이라도 하고 싶은 관계라면 스스로 견딜 수가 없어서 태워버리겠지만, 그게 아닌 다음에야 이것도 저것도 다 나를 만든 시간, 당신을 만든 시간들이니까요. 그리고 그 편지가 비상약이라면, 반려인이 제게 준 편지들은 부적 같은 거니까요.

오늘도 이렇게 얼룩을 하나 남겨 봅니다.   
 



<아이라는 > 지난 주에 3 소식이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자는 마감을 하나 끝내고 넘치는 잉여력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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