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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y 10. 2022

바이러스

스물다섯 번째 시

2022. 2. 24.
이동욱, ‘바이러스'
시집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가 있고> 중에서


[바이러스]


누군가 강물 속으로 돌을 던진다

물살은 남김없이 이물질을 껴안는다

움직이지 못하게 돌을 품어

강의 굴곡은 이토록 소란하다


며칠째 물속에 누워

돌이 풀리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관계에서 떨어져 딱딱해진다

그동안 사람들은

몇 개의 감정을 더 포기할지 모른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본다

가윗소리가 내 몸을 지나간다


햇빛이 들지 않는 이 방에서

나는 실루엣처럼 수척해질 것이다


새들이 가로수마다

숯불 같은 꽃을 놓고 있다


꽃물이 밴 입술을 두고

환절기를 빠져나간다



처음에 이 시를 받아 들었을 때,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한참을 들여다봤어요.

물속에 누운 화자처럼 저도 몇 분간 시 속에 누워서 돌을 만지작거리다가 아- 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왔습니다.

 

내 몸 안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면역 세포들이 단단히 이물질을 껴안고 소란스럽게 싸웁니다. 몸은 물에 잠긴 것처럼 나른하고 열도 나지요. 그러는 동안 나는 사람들과 떨어져 격리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다소 수척해진 모습으로 환절기를 빠져나가게 되죠.  


사랑의 열병을 앓고 터널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의 강에 돌을 던졌습니다. 내 피가 그것을 단단히 껴안아 품고,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굴곡을 따라 소란스럽게 움직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물속에 누워있는  같습니다. 세상 만물이 약간 굴절되어 닿아오는 시간, 세상과 살짝 차단되어 있는 듯한 느낌. 감각이 무척 생생하다가도 단숨에 마비되곤 하.  안에서  사람이 던진 돌이 차츰 풀려갑니다. 모래알이  때까지 내가 조각조각 부숴 하나하나  생긴 모습을 들여다볼 때도 있고, 단단했던 돌이 자연스럽게  안에서 차츰 풀어질 때도 있습니다.


주고받는 사랑은 사람을 말랑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랑은 사람을 딱딱하게 합니다. 감정을 포기하는  그만큼의 수분이 빠져나가 버석거리게 되는 걸까요. 나만 애달프고 나만 그리워한다는 생각이 들면 얼굴에는 홍수가, 마음에는 가뭄이 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합니다. 나를 그토록 반짝이게 하던  사랑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고, 나를 그토록 촉촉하게 적시던  감정이 이제는 나를 버석거리게 만드는 아이러니.


모든 일에는 시간이 약이죠. 햇살 같은 마음이 들지 않아 어두운 방에서, 가윗소리처럼 뭔가 끊고 끊고 또 끊어내는 초침 소리가 내 몸을 한참 훑고 지나가야 우리는 수척해진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동안 밖에는 꽃들이 피었습니다. 시인은 숯불 같은 꽃이라 합니다. 타고 남은 마음 같아서 아직도 빨갛지만 이제 사그라들 일만 남은 숯불. 입술을 깨물어선지, 사랑의 독백이 향기롭게 남아서인지, 꽃물인지 핏물인지가 잔뜩 밴 입술을 두고 우리는 그 환절기를 빠져나갑니다.


오래전에 읽은 시지만 바이러스가 점차 물러가는 이 환절기에 다시 꺼내봅니다. 

다행히 저희 집에는 바이러스가 비껴가 아무도 수척해진 사람은 없지만, 그 시간 동안 저도 물에 잠겨 지낸 느낌이에요. 다 함께 앓은 세상 속에서 저도 긴 터널을 지나, 그 시간의 초입에 마음속에 던져졌던 돌이 풀어짐을 느낍니다. 역병이든 열병이든 병을 이겨낸 존재는 더 단단해지겠죠. (장담은 못하겠지만,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역병을 이겨낸 세상의 소란스러운 기지개와, 열병을 앓고 난 영혼의 소란스러운 침묵을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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