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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y 24. 2022

열과

스물여섯 번째 시

2022. 5. 16.
안희연, ‘열과(裂果)'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2020)> 중에서


[열과(裂果)]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저에게 봄은 기형도, 여름은 허수경, 겨울은 백석입니다. 가을 자리는 아직 비워두고 있고요.


그간 제게 여름은 허수경의 레몬맛이었어요.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어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다”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고 그래서 후회했던” 그런 여름,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짧은 여름이 저에게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약간의 비릿함과 땀 냄새 위에 아린 레몬향을 깔아준 허수경이 저의 여름의 시인입니다.  


작년엔가 안희연의 여름 언덕을 만났음에도 거기서 배운 것이 그리 깊지는 않았거든요. “올여름의 할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이라고 말한 김경인도 있었지만 시 전체가 제 삶에 자석처럼 착 달라붙지는 않았고요. 그런데 이 <열과>로 인해 이제 제게 여름은 허수경과 안희연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새콤한 레몬맛에 더해서 터지고 갈라진 열매, 더러워진 바닥, 작열하는 태양과 휘몰아치는 폭풍우 같은 것의 생생한 감각들과 함께요.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가 이제 제 여름의 캐치프레이즈가 될 것 같아요.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 그 사이의 먼지 낀 주름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합니다. 보기엔 비슷해 보이는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극과 극의 서사 같은 것들. 이 시 안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들어있어서 각 연마다 기쁜 마음으로 많이 머물렀습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다고 말하는 첫 연.

같은 나이를 먹었더라도 그냥 존재한 것과 능동적으로 살아낸 것이 다른 것과 비슷한 거겠죠.

또,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그 구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왠지 울 것 같은 느낌입니다.


시인은 문지기를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냥 흘러가게 두기 보다, 잘 보낸 사람일 겁니다.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이 있는 이 문지기의 양쪽 주머니 안에는 열쇠와 자물쇠 대신 작열하는 태양과 장마가 들어있네요. 아니, 그게 바로 열쇠와 자물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열감과 습기는 생의 열쇠와 자물쇠 같은 것이니까요. 어느쪽이 열쇠고 어느쪽이 자물쇠인지는 좀 수수께끼 같지만요.


최근에 읽은 책 안에 “모든 사람은 두 개의 돌을 갖고 있어야 한다. 때에 따라 필요한 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오른쪽 돌에는 ‘세상은 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왼쪽 돌에는 ‘나는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새겨져 있다.”라는 말이 있었어요. 인간은 그렇게 두 개의 돌을 번갈아 잡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힘내어 앞서 나아가야 하는 나, 적성에 안 맞아도 세상에 내놓은 입간판처럼 뻔뻔해져야 하는 나는 오른쪽 돌을, 뒤돌아 스스로 품속을 파고들며 울음을 내놓으려 하는 나는 왼쪽 돌을 잡고 있겠죠. 나란 인간은 사실 다양한 자아가 엉겨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사실 삶이라는 게 그 양쪽 돌 사이의 끊임없는 줄타기이기도 합니다. 저 파란 문장을 읽으며 나는 이제 앞으로 평생 두 개의 돌이 든 호주머니를 생각하며 살겠구나 싶었는데, 이제 양쪽 주머니에 작열하는 태양과 습기 가득한 장마를 넣고 걷는 옵션이 추가되었습니다. 돌들을 잘그락거려보는 것도 좋지만, 태양과 장마를 만지작거리며 걷는 느낌도 꽤 좋을 것 같아요. 델 것 같은 뜨거움과 물크러질 것 같은 축축함, 그 벅찬 온도와 습도를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면 저란 인간도 툭 터져서 열과가 되겠죠. 그런데 그렇게 열과가 되어보는 여름은 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열과는 익으면서 갈라지고 터진 과일이에요. 쪼개졌기 때문에 상품성이 떨어진다고들 하죠. 온도와 습도가 크게 변동하는 경우에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갈라진 부분으로부터 과즙이 흘러나와 “다른 건전한 과실까지 오염시킨다”는 어느 농업기술센터의 설명이 참 묘했어요. 과일 세상에도 ‘건전한’ 과실이 있고 그걸 ‘오염’시킨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푸코 아저씨 얼굴이 슬쩍 떠올랐습니다. 인간들이 땅에 선을 긋고 지들만 독점적으로 먹을 요량으로 과실을 재배하기 이전의 자연에서, 열과란 전혀 열등한 무언가가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오히려 껍질을 벌려 달콤한 속살을 드러내고 향기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더 많은 동물들을 불러들였겠죠. 특히 작은 곤충들에게 열과란 것은 그저 황홀한 축제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시장이라는 공간에 얽매인 인간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건전함이 오염이니 하는 그런 표현이 나오는 것이겠죠, 아마도.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구절은 ‘욕심껏 쥐고 놓지 않으려는 어리석음이 부르는 파국’이라든가 ‘적절히 흘려보낼 줄 아는 자의 현명함’과도 맥이 닿겠지만 이렇게 '나를 조금 툭 터뜨려 보여주는 것, 그래서 타인(이를테면 동물과 곤충들)을 만나게 되는 일’과도 썩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를 훔쳐가도 좋다고 말하는 그 마음. 그렇게 너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


비슷하게 ‘깨어지거나 흠이 나서 못 쓰게 된 물건’을 이르는 ‘파치’라는 단어도 과일에 쓴다고 해요. 제주에서 감귤농사를 하신다는, 늘 시 같은 노래를 듣고 사실 것으로 추정되는 어느 작가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열과’는 ‘과(果)’ 자가 끝에 당당히 붙은 모양이 ‘그래도 나는 누가 뭐래도 과일이야’라고 말하는 느낌이라서 좋고 ‘파치’는 어감이 매력적이라 괜히 좋습니다. 파치, 하고 발음해 보면 뭔가가 쪼개지고 터지는 느낌이 들어요. 마치 마법 주문 같은 느낌.    


이 시를 읽고 나서 우리가 만나는 과일들은 대체로 얼마나 매끈하고 예쁜 것들인가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은 ‘과일이란 모름지기 이렇게 생겨야 한다,’ 그렇게 플라톤이 말하는 사과의 이데아나 복숭아의 이데아 같은 형상을 한 과일들만을 만나고 사는 삶이었구나 생각합니다. 나 자신이 그렇게 예쁘고 매끄러운 과일이 아닌데 내 입에 넣는 과일은 왜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제야 새삼 이상함을 느낍니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피드를 살피다가 못난이 농산물을 유통하는 어글리어스 마켓(@uglyus.market)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참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인간들의 눈에 좀 못생겼을 뿐 맛도 향기도 엄청난 억울한 친구들이 갈 곳을 찾아가는 모습이 어찌나 흐뭇하던지요.


익다가 터져버린 삶.

피부가 터질 만큼 안에 든 물기가 많았던 삶.
틀이나 껍데기가 감당할 수 없었던 내면의 무엇.
‘상품성이 없다’라는 무미건조한 말로 재단하기엔 열과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인가 싶습니다.

잘 여문 예쁜 과실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계절이 가을이라면, 우리의 여름은 이렇게 향기를 뿜고 속살을 드러내며 툭툭 터져버리는 계절이면 좋겠습니다. 그 더럽혀진 바닥까지 사랑하는 건 여름을 지나는 청춘들에게 조금 어렵겠지만, 가을의 익은 눈과 겨울의 서리 낀 눈은 그 찐득한 바닥이 얼마나 황홀하게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곧 보게 되니까요.   


같은 필사 모임에 계신 김민주 작가님은 이렇게 묵직한 한 방을 날려주셨습니다.

"망가지고 터져야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죠."

그래요. 상품성이라는 단어를 굳이 인간에게 꼭 써야 한다면, 열과가 되어보지 않은 인간은 오히려 상품성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를 읽고 여러 가지 표현들이 마음에 착 붙었는데 그중 하나가 슬픔을 세는 새로운 단위예요.

오늘의 슬픔 한 그루, 그날의 슬픔 세 그루.

슬픔을 ‘그루’로 세는 작은 행위만으로 왠지 슬픔이 한결 고와지는 느낌이라 견딜만할 것 같아요.
슬픔의 단위가 그루라면 세상의 수많은 열과들은 아주 깊고 고운 위로를 받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연마다 행마다 제 마음에 쏙쏙 들어와 예쁘게 내려앉는 시가 최근에 또 있었나 싶을 만큼 이 시가 좋았습니다. 왜 어떤 시는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는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돌이 되어 가라앉았던 시가, 혹은 시간이, 때로는 폭풍우처럼 다시 휘몰아치는 이유도요.


여름이 기다려지는 시가 한 편 있는 걸로 인간의 삶은 이렇게 살짝 행복해지네요. 훔쳐가도, 망가져도, 더러워져도, 슬퍼도 좋은 그런 여름. 생에 몇 번의 여름이 더 준비되어 있는지 모르겠어서 여름을 다시 쓸 수 있을지 자꾸 생각하게 되지만, 이 아름다운 시를 품고 여름을 맞으려고 합니다.





+

저희 동네에 동전을 내고 직접 꽃을 데려가는 꽃밭이 있어요.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산책을 하다가 그 곁을 거닐게 되었습니다. 수선화는 지고 튤립이 만개했더라고요. 최근 저의 말창고 안에 ‘열과, 파치’라는 단어가 들어온 기념으로, 꺾인 채 바닥에 뒹굴고 있는 애들을 일부러 골라와 봤습니다. 그대로 두면 몇 시간 뒤에 바로 햇빛에 사그라질 친구들을 데려오는 마음이 제법 근사하더라고요. 얘들아, 모니터 옆에서 내가 쓰는 망나니 같은 글들을 보며 혀를 쯧쯧 찰 기회를 주마.

직접 꽃을 데려가는 우리 동네 꽃밭. 튤립은 송이당 50센트.
꽂아둔 지 삼십 분 만에 바로 생기를 찾더라고요. 데려온 다음날에는 조금 더 봉긋해졌습니다.
역시나 그 안에는 우주가 들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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