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번째 시
2021. 2. 7.
이원하, ‘참고 있느라 물도 들지 못하고 웃고만 있다'
이원하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중에서
이미 하얀 집에 눈까지 내리는 건
어떤 소용이 있어서 그러는 건가요
금방 사라졌다고 며칠 만에 다시 눈이 내려요
이번에는 오래 흘리다 가줄까요?
눈이 쌓이는 만큼 빛은 자기를 최대한 펼쳐놓아요
펼쳐서 얻는 게 별로 없을 텐데도
사람 좋은 사람처럼 자신을 바닥에 널어놓아요
저렇게 물도 들지 못하고 웃으며 사는 것 좀 보세요
눈은 그렇듯 쌓이듯 모여서
골목까지 아낌없이 생기를 펼쳐놓아요
불편하면 고개를 저어도 될 텐데
절대 그러지 않아요
사랑받고 싶은 것이겠지요
눈이 저러는 동안
바다는 꾸준히 여전히
줄었다 늘었다 반복해요
사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겠지요
눈 쌓인 섬도
살결이 푸른 바다도
전부 사람의 마음을 흔들지만
내겐 아무 소용이 없어요
당신과 함께 보면 좋을 일들이 전부
사느라
아무 소용이 없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시 필사를 시작했다가 1년째 빠져나오지 못하고 시를 주워 먹고 있습니다. 필사 모임 마지막 10기째의 첫 날에 배달받은 시.
이미 하얀 집에 눈이 내리는 소용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이번에는 오래 흘리다 가주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에서, 일부러 그 소용을 가만히 찾고 싶어졌어요.
소용이 없을 것 같아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저런 쓸모들이 떠올랐습니다.
당신과 함께 보면 좋을 아름다운 풍경이 되는 그런 소용.
삶의 때가 묻은 지친 흰 빛을 자연의 순백이 덮을 때 흰색은 한 종류가 아님을, 그렇게 두 하얀색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그런 소용.
가장 큰 소용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외부로부터 덮인 하얀색 속에서 내가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의 하얀색이 가려지는 일.
하얗게 덮인 눈 속에서 마음껏 하얄 수 있는 일.
슬픈 마음 위에 슬픈 음악을 쌓아두는 그런 종류의 소용 말이죠. 내 슬픔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혹은 마음껏 슬프고 싶어서, 겉에 슬픈 음악을 둘러두는 그런 일 같은 것.
눈[雪]이 쌓이면 눈[目]이 멀 것처럼 빛이 강해지지요. 눈 온 날의 세상은 그만큼 환하게 빛납니다.
그런데 그건 눈이라는 흰 얼음가루들 때문이잖아요. 자기 속은 차갑기 그지없으면서, 안에 든 것은 하얗게 감춰 두고 그 위에 세상의 빛을 불러들여 생기를 펼쳐 놓는 눈.
시인이 말하기를, 사랑받고 싶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내 안은 차게 얼어도 사랑받고 싶어서 복잡한 마음은 밑에 감춰 두고 애써 알록달록하게 생기를 두르는 여자의 마음이 보여서, 눈[雪]도 시리고 눈[目]도 시린 느낌을 받았습니다. 빛은 물들지 않죠. 참고 있느라 물도 들지 못하고 그저 얼어붙어서 웃고만 있는 마음이 낯설지가 않네요.
바다란 곳은 그런 눈이 쌓이기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곳인데.
눈이 저러는 동안 그저 사느라 정신이 없는, 꾸준히 자기 일을 반복하고 있는 바다가 야속합니다.
하지만 시인의 말대로 눈 쌓인 섬도, 살결이 푸른 바다도, 전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존재들입니다.
어쩌겠어요. 그렇게 사는 거죠. 어쩌면 바다는 사랑스러운 눈조각들을 자기 품에 녹여 안고 그냥 말없이 일렁이며 살기로 마음먹은 건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눈을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연을 보자니 사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네요.
'당신과 함께 보면 좋을 일들의 연속'이 좋은 삶일 텐데, 사느라 그 좋을 일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이 아이러니.
귀엽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삶이란 게 원래 그런 거지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누군가를 마음에서 밀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미워질 때도 있고 감당이 안 될 때도 있고 그냥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고.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고 그럭저럭 잘 접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보고 탄성과 함께 반사적으로 그 사람 이름이 입에 담기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던 거구나. 내 의지나 계산과 상관없이, 좋은 걸 보면 그냥 떠오르는 사람. 그렇게 별이 내 마음을 알려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연을 읽으면서 오래전 그 별밤이 생각나서 조금 멋쩍어졌어요. 사랑하는 마음이란 건 기본적으로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인 것 같아요.
당신과 함께 보면 좋을 일들이 전부
사느라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오늘의 저도 사느라 정신이 없어서, 함께 보면 좋을 일들을 많이 지나쳤을 테지요.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늘 함께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함께 보면 좋을 일들을 보면서 당신을 떠올리는 것으로 그 소용을 찾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