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릴레이

스무 번째 시

by 이진민

2021. 12. 14.

다니카와 슌타로, ‘아침 릴레이'


[아침 릴레이]


캄차카의 젊은이가

기린 꿈을 꾸고 있을 때

멕시코의 아가씨는

아침 안개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뉴욕의 소녀가

미소 지으며 잠을 뒤척일 때

로마의 소년은

기둥 끝을 물들이는 아침 햇살에 윙크한다

이 지구에서는

언제나 어딘가에서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는 아침을 릴레이 하는 것이다

경도經度에서 경도로

말하자면 교대로 지구를 지킨다

자기 전에 잠깐 귀 기울여보면

어딘가 먼 곳에서 알람시계가 울리고 있다

그것은 당신이 보낸 아침을

누군가가 잘 받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잘 자고 일어나면 내가 보낸 아침이 도착해 있을 거라고 말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오늘 달이 참 예쁘더라는 말에 그거 아까 여기 있던 거 내가 보낸 거야, 하던 친구도요.

친구들의 그 다정하고 귀여운 말들을 이렇게 시로 만나니 반갑네요.

생각해보면 동그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파도타기를 하는 것처럼 쪼로록 일어났다가 눕는다는 사실이 귀엽습니다.


외국살이가 16년 차에 접어듭니다.

처음에는 낮과 밤을 딱 반대로 살아야 하는 미국 동부의 시차가 많이 원망스러웠어요. 점점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시간 뒤로 몸을 숨기는 게 편안해지더군요. 모든 건 어차피 시차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였어요. 내가 보고 있는 저 달을 이따가 그들도 보겠거니 하는, 그냥 그런 느슨하게 연결된 느낌으로 마음의 영점을 조준하고 살면 괜찮았어요. 낮의 마음을 가진 내가 밤의 마음을 가진 너와 만나는 건 뻔하지가 않아서 좋기도 했고요.

낮과 밤이 정확히 반대로 간다는 건 그냥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는데, 유럽살이는 또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이제는 한국 시간을 일고여덟 시간 뒤에서 따라가는 곳에 살고 있다 보니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이 먼저 산 시간을 부지런히 뒤따라 살고 있네요. 사람들이 밟은 눈길을 밟고 가는 억울한 느낌일 때도 있고, 나에게는 아직 선물이 도착하지 않은 간질대는 느낌일 때도 있고요.



참 사랑스러운 시죠.

같은 필사 모임에 계신 이혜령 님께서는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가 아니라 이렇게 ‘캄차카의 젊은이, 멕시코의 아가씨, 뉴욕의 소녀, 로마의 소년’이라고 하니 왠지 삶이 궁금해지고 더 친밀한 느낌이 든다고 하셨어요. 내가 반드시 그에게 아침을 잘 넘겨주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도 든다고요.

이제는 폰 화면 하나로 시간과 날씨까지 한 번에 확인할 수 있으니, 세상 어디든 그곳의 분위기를 상상으로 감각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화면을 손가락으로 넘겨보며 생각해요. 아, 귀여운 우리 E가 자고 있는 곳에는 눈이 오고 있구나. S는 지금 포근한 기운 속에서 점심을 먹으려나. 환경문제에 예민한 J는 미세먼지가 많다고 걱정 반 지랄 반의 마음을 겉절이처럼 버무리고 있겠구나.


어제 잠들기 전에 스무고개로 나라 이름을 문제로 내는 걸 보니, 아이가 한글학교 수업 시간에 나라 이름을 배운 것 같더라고요. 이렇게 대륙이 많고 나라가 많은 세상.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을까요. 파푸아 뉴기니는 수도가 뭐야, 묻는데 파- 푸- 으아-거리면서 자는 척했습니다. (궁금해서 찾아보고 싶은 분 계시죠. 포트모르즈비(Port Moresby)라고 합니다. 저는 다정합니다.)


현재 우리는 같이 올림픽의 시간을 지나고 있죠.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적인 스포츠 이벤트 안에는 사실 다양한 명암이 있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시간을 약속처럼 꼽으며 기다리는 그런 느낌은 꽤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대륙에서 열리는지에 따라 누구는 잠을 설치고, 누구는 밥을 후루룩 코로 마시고, 누구는 느긋하게 치맥을 즐기고 말이죠.


실은 필사 모임의 구성원들이 이 시에 등장하는 릴레이 선수들처럼 다양한 시간대에 살고 있어요. 한국,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미국. 꼽아보니 일곱 나라에 걸쳐 있네요. 알람 소리처럼 배달되는 시를 받아서 누구는 읽으면서 잠자리에 들고, 누구는 오후의 차와 함께 맛보고, 누구는 아침의 물 한 잔처럼 받아 들고. 그렇게 색색의 단상을 바통처럼 서로에게 전달하며 지구를 한 바퀴씩 돕니다. 자전과 공전을 동시에 하는 지구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한 바퀴씩 돌면서 모두가 시를 향해 느리게 공전하는 기분이 꽤 간지럽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저는 어린 왕자가 몇 번이고 의자를 뒤로 당겨 노을을 구경하던 장면을 떠올렸어요.


"나는 해지는 걸 보는 게 좋아. 함께 보러 가자."

(중략)

모두들 알고 있듯이 미국에서 정오일 때 프랑스에서는 해가 진다.

프랑스로 단숨에 달려갈 수만 있다면 해가 지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랑스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러나 너의 조그만 별에서는 의자를 몇 발짝 뒤로 물려놓기만 하면 되었지.

그래서 언제나 원할 때면 너는 석양을 바라볼 수 있었어.

"어느 날은 해가 지는걸 마흔네 번이나 본 적도 있어!"

조금 있다가 너는 이렇게 덧붙였지.

"있잖아. 사람이 너무 슬플 때는 해지는 걸 보고 싶거든."

"마흔네 번 본 날 그럼 너는 그렇게 슬펐니?"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이 없었다.


어린 왕자에게도 해가 지는 모습을 같이 바라볼 친구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해가 지는 모습은 누군가와 함께 보면 좋을 풍경이잖아요. 그래서 아마 조종사에게도 해지는 모습을 보러 가자고 졸랐겠지요. 제 사진첩에도 그런 마음으로 찍어둔 노을 사진이 많습니다.


여기서는 지는 해지만 어딘가에서는 뜨는 해겠지요


지난 글에서 사랑하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이라고 썼는데, 저는 외국살이를 하면서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자의 반 타의 반 꾸준히 훈련해 온 듯합니다. 만사에 좀 무심한 듯한 제 태도는 시차 있는 삶이 준 축복이자 저주 같기도 해요. 그래도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살려고요.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그런 질긴 마음들을 훅훅 깎아내고 오래도록 다듬다 보면 정갈하고 단단한 마음이 남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요.


오늘 달 예쁘던데 이따가 꼭 보라던 다정한 친구들이 종종 있었어요.

한국은 벌써 대보름이니 오늘 달은 예쁠 게 틀림없네요.
한국에 계신 여러분들은 유럽이나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예쁜 달을 선물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가끔 그 초능력을 사용하시길.


미국은 꿈나라로 갈게요. 독일은 좋은 하루 시작하세요.

최근에 이 인사를 받고 참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독일은 꿈나라로 갈게요. 한국은 좋은 하루 시작하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