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민 May 31. 2022

얘들아, 뭔가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재능, 없으면 안 되나요?

wee 매거진에서 '재능'을 주제로 한 호를 꾸리시면서 원고를 부탁하셔서, '아이라는 숲'을 두고 '재능이라는 나무'만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감각적인 매거진에 글을 싣게 되어 기쁩니다. 여기에 올리는 글은 솔직 담백한 톤으로 조금 더 길게 썼던 초고입니다.

사진출처: wee 매거진 인스타그램


얘들아, 뭔가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인간으로 태어나 재능이 없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다만 내가 가진 재능을 재능이라고 인식하지 않거나 인식하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인식하지 않는’ 이유는 순위로 매겨지지 않는 재능을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적 경향 때문이다. 재능이란 것은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이다. 타고난 소질이기도 하고, 연습과 노력으로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언어나 스포츠나 악기를 잘하는 것만 재능이 아니라 남의 마음을 잘 읽고 사람을 잘 챙기는 것도 재능이고, 공기놀이를 잘하는 것도, ‘한 입만’을 차단하기 위해 혈육이 문 닫고 몰래 끓여먹는 라면 냄새를 잘 맡는 것도 재능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랬는지 돈이 되는 재능만을 재능으로 생각하고, 그것도 순위권에 들어야만 안심하곤 했다. 우리는 재능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납작하게 인식한다. 좋은 재주와 능력을 사회적 합의의 영역에 두는데, 그 합의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식을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놓인 시공간의 다양성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프로게이머의 재능을 가지고 고려시대에 태어난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카리브해의 열대 섬나라 자메이카 같은 곳에서 태어난 관계로 평생 얼음 구경을 하기 힘든 무수한 김연아와 웨인 그레츠키가 지금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땀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재능은 꼭 사회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영향을 꽤 많이 받는 것이다. 장소에 따라 가능성이 드라마틱하게 제약받기도 하고, 재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의 궤적에 따라 엄청난 재능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어찌 됐든 사회적 합의에 따른 재능의 리스트는 끊임없이 꼬물거리며 변한다.


나의 재능을 인정받고 거기에 몰입하는 일은 대체로 즐겁고 기쁜 것이므로, 내 재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든 인식하지 않는 경우든 다소 슬프다. 하지만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며 쪼그라드는 아이들을 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그래,   양보해서 재능이 없다고 치자. 없으면  되나? 우리 아이에게 시대가 가치를 두는 재능이  들어맞게 있다면 그건 축복이겠지만, 아니면  어떤가 싶다. 재능을 인식하든 못하든 아이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아이는 ‘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지  ‘재능을 인정받고 발현하는  살아야 하는 존재는 아니다. 재능은 인생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오히려 ‘재능이라는 단어에 갇히면 삶이 고단하고 공허해진다.


부모라면 누구나 갓 태어난 작고 말랑말랑한 아기를 안고서 이 아이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 생각해 보는 순간이 있다. 최선을 다해 아이를 지원해 주는 부모가 되리라, 아이의 반짝이는 면을 발견하고 북돋워주리라 다짐하곤 한다. 아이의 재능을 적절한 시기에 발견하고 꽃피게 도와주는 것은 부모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주위에서 김연아에게 스케이트를 내밀어주지 못하는 엄마, 조성진에게 피아노를 만나게 해주지 못하는 아빠가 될까 봐 걱정하는 다정한 부모님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아이의 재능을 살려주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어 있는 현실을 우리는 차근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아이의 재능을 찾아 키워주는 일이 아니라,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한 둥지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재능은 부차적인 영역이다. 재능과 상관없이 자기 인생을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고, 남의 재능을 질투하며 내 인생을 허비하기보다는 적은 것을 가지고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팔을 뻗어주는 것이 부모의 일이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아이 그 자체이지, 아이의 재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라는 숲'을 두고 '재능이라는 나무'만 보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믿는다. 부모가 숲을 봐야 아이가 무엇을 잘하는지에만 몰두하지 않고 아이라는 존재를 온전하게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아이도 부모가 기대하는 모습에 맞추느라 뒤틀린 나무로 살지 않게 될 것이다.


김소연 시인은 <마음사전>에서 ‘중요’와 ‘소중’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중은 궁극이고 중요는 방편이다. 예를 들어 돈은 너무 중요한 나머지 소중하다는 착각을 일으킨다고, 우리는 중요한 것들의 하중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시인은 말한다. 아이의 재능은 중요하지만, 소중한 것은 아이다. 재능이 중요한 나머지 그 하중 때문에 소중한 아이를 잃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 곁의 작은 인간들은 '영재'보다는 그냥 '아이'가 되어야 하고, ‘재능 있는 인간’보다는 그냥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회적 합의 때문에 재능은 인간의 능력 중에서 극히 일부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일부의 능력만 가지고 인간이 온전하게 살 수는 없다. 미적분을 쉽게 푸는 아이가 친구 사귀기를 극히 어려워할 수도 있고, 이름난 피아니스트가 그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손으로 자기 입에 넣을 변변한 먹을 것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내 아이가 한 가지 능력에 올인하느라 찌그러지기보다는 인간으로서 필요한 능력들을 골고루 갖추고 배워나가는 아이이기를 바란다. 앞에서 사회적 합의에 따른 재능의 리스트는 끊임없이 변한다고 말했다. 어차피 아이가 살 세상은 (오늘내일하는 이 환경이 허락해 준다면) 현재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찰 것이다.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한두 가지 능력에 올인하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기술들을 든든히 배워두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재능 있는 아이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행복을 느끼는 아이다.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으나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재능이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재능이 없는 아이는 불행할 거라는 기괴한 도식부터 버려야 한다.


어쩌다 보니 독일에 살고 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라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내가 독일에서 특히 좋아하는 부분은 누구나 인정하는 재능이 없어도 인간의 삶이 충분히 행복하고 충만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사회라는 점이다. 독일 아이들도 재능을 찾아 꽃 피우는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만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님을 안다. 독일 학제는 우리와 달라서 초등학교 4학년 때 김나지움, 레알슐레, 하우프트슐레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학교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김나지움 학생들은 대체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고, 레알슐레는 주로 사무직 기술자나 공무원을 양성하는 학교이며, 하우프트슐레는 대체로 몸을 쓰는 방면의 직업교육을 위한 학교다. 대체로 성적순으로 진학하게 되지만, 점수가 차고 넘쳐도 기쁘게 레알 슐레를 선택하는 아이들이 있고, 아이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레알슐레나 하우프트슐레를 권하는 부모들이 있다. 획일적인 시스템이 아니어서 김나지움을 가지 않더라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경로도 많고, 우리처럼 모든 학생들이 사활을 걸고 대학에 진학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장인’이라고 번역되는 ‘마이스터’ 제도를 통해, 해당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직업 영역을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학교를 시찰하다가 서울대에 몇 명 붙었는지 자랑하려고 내건 플래카드를 보고 깜짝 놀란 핀란드 교육관계자가 말했다고 한다. "저희는 '우리 학교에는 낙오하는 학생이 없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겁니다"라고. 능력을 신봉하고 더욱 강고하게 능력주의를 구축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가, 다른 방향으로도 눈길을 주고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재능의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은 자기 몫을 하며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사회가 인정하는 특정한 능력이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성장이다. 성장 없이 성공해 버린 이들은 대체로 아픈 대가를 치르곤 한다. 우리는 과연 아이의 성공을 바라는 부모인가, 아이의 성장을 바라는 부모인가. 그런 의미에서 재능 역시 성공보다는 성장과 연결되는 개념이면 좋겠다. 할리우드의 전문가 50 퍼센트가 당신은 재능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한다면 뭐라고 할 것이냐고 묻자, 마릴린 먼로가 대답했다. “설사 100 퍼센트가 나에게 재능이 없다고 말해도, 그들 모두가 틀렸을 수도 있잖아요.” 재능이 전문가의 진단이나 사회적 합의의 영역에 있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멋진 대답이다. 비틀즈의 존 레논도 막심 고리키도 입을 모아 말했다. 근본적인 재능은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알랭 드 보통도 사람의 운명은 재능 부족이 아니라 희망의 부재로 결정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뭔가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잘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재능은 능력보다는 신념에 가까운 것이니 자신을 믿어 보라고. 그렇게 차근차근 성장해 가라고.






+

제가 가진 재능 중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글재주도 손재주도 아니고, 빠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는) 이해력이나 문해력도 아닙니다. 아무리 속상하고 힘든 일이 있었어도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잘 자고, 일어나면 대체로 긍정적인 기분을 되찾는 능력. 이건 저의 ‘모든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이므로 분명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재능을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

이것이 저의 궁극의 재능 ('온라인 커뮤니티'라고만 되어 있어서 사진 출처를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재능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매거진의 이전글 세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