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학번 친구들을 위해 쓴 글
모교에 재상봉 행사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올해가 저희 94학번들이 모이는 해라고 하네요. 멀리 사느라 행사에 갈 수는 없고, 과별로 몇 페이지씩 사진과 글을 모아서 출판하는 콘텐츠를 준비해야 한다길래 짧게 글을 보내줬어요. 과 동기들을 위해 호로록 쓴 글인데 많은 친구들이 좋아해 주었기에 여기에도 남겨 둡니다. 참고로 저는 정치외교학과를 나왔습니다. (저희 과 동기 중에 이름이 동기인 친구도 있고 상봉이인 친구도 있어요 :-)) 사진은 학교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재상봉(再相逢)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자니 말뜻이 담백하니 뭉클하다.
다시, 서로, 만남.
94년은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던 해였다.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며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고, 김일성이 사망했고, 어이없게 성수대교가 무너졌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아현동에서 가스가 폭발했고, 나라 밖에선 전쟁도 내전도 많았다. 94년의 기록적인 폭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거리에서 여름을 보낸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게 폭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냥 여름은, 젊은 날은, 원래 그렇게 더운 건 줄 알았다.
그렇게 사건사고가 많았던 해지만 내 인생에서는 가장 빛나는 해였다. 자유가 달았고, 술은 맛있었고, 머릿속에는 찬물이 들이부어졌다. 그 놀라운 시간들을 함께 했던 앳되고 반짝이던 얼굴들을 기억한다. 거기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 강의실에서 눈을 빛내던, 놀 때는 눈코입손발을 다 빛내던, 마주 보며 계란인가 비닐인가 의심스럽던 청경관의 시스루 오므라이스(한 입에 다 넣고 씹으면 마지못해 계란 향이 났다)를 입에 넣던, 잔디밭의 지박령이 되어 기타를 안고 탕수육을 입에 물고 노래 부르던(그 나이 때는 다기능 멀티가 가능했다), ‘민주’ ‘정치’와 ‘자주’ ‘외교’라는 아름다운 단어들을 크게 소리치던 동기들. (우리 학번에는 동기도 있고 상봉이도 있다.)
그 시간을 지나는 우리를 따뜻하게 지켜봐 주시던 얼굴들도 기억한다. 김 나는 머리를 토닥이고 치기 어린 마음을 쓰다듬어 주시던 스승님들. 웃어주시던 눈빛들과 단호하게 꾸짖던 목소리들.
그 시간을 감싸던 아름다운 배경도 기억한다. 봄이면 벙글던 목련과 교정에 번져나가던 진달래, 꽃비를 내려주던 벚나무들, 여름이면 건물에 살랑살랑 연초록 옷을 입히던 담쟁이들, 가을을 노랗게 늘이던 은행나무들. 기형도 선배님이 총성을 들으며 플라톤을 읽었다던 돌층계가, ‘초록에 한하여는 나에게 청탁이 없다’는 이양하 선생님의 문장을 머금게 하던 향긋한 청송대가, 사시사철 술잔과 노래가 놓이던 윤동주 시비와 이한열 추모비가, 무엇보다도 우리 학교에서 가장, 제일, 최고로 아름다운 연희관이 있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멀리 있는 나로서는 <신록예찬>의 이 문장을 나 대신 보낸다. 상봉(霜蓬)은 서리같이 하얗게 센 백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도 하더라. 머리 위에 조금씩 서리가 내려앉는 나이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된 너희들이 훗날 상봉의 나이에도 다시, 서로, 만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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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으로 친구들이 모은 추억의 사진들 중에서 세 장.
1학년 때는 수강 신청을 하려면 이렇게 신청서를 직접 써서 과사무실에 제출해야 했다. 곧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학교 컴퓨터실에서 신청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내가 졸업한 뒤로는 각자 집에서 인터넷 광클릭을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학교 컴퓨터실에서만 수강 신청이 가능했기 때문에, 원하는 시간표를 만들기 위해 전날부터 줄 서서 밤을 지새우는 친구들이 많았다(수강 신청 오픈런). 딱히 학구열에 불탄 건 아니고, 그땐 그냥 모든 게 재미있었던 것 같다. 핑계 삼아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하룻밤을 지새우는 재미. 나는 그 재미보다 술 마시는 재미가 더 좋았기에 내 시간표는 언제나 지뢰밭이었다.
이것은 '날적이' 혹은 '적거리장'이라고 부르던 그 당시의 아날로그형 인터넷 게시판. 진지한 고민도 신세 한탄도 헛소리도 아무말대잔치도 모두 가능했던 공간이다. 과방이나 동아리방에서 혼자 끄적거리다 가면, 나중에 선후배 동기들이 읽고 옆에 한 문장씩 달아주기도 하고(댓글), 낙서나 그림도(이모티콘) 그려주었던 기억.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진심으로 당황했다. 신용카드처럼 생긴 카드형 학생증 말고, 이런 수첩형 학생증이 있었다. 등록금을 내면 저렇게 학기마다 등록필 도장을 찍어주었다. 뭐든 빠르게 변화하던 때에 학교를 다녀서 졸업 전에 현재와 같은 모습의 은행 카드 겸용 학생증이 나왔던 것 같은데, 이 사진을 보고 '옛날 사람'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말았다. 사진을 찍은 친구의 마음도 크게 흔들렸나 보다. 아니면 나이 먹고 손이 흔들리는 것일 수도. (친구야, 술 작작 먹자.)
실은 최근에 다정한 선배 한 분을 잃었다. '잃었다'라고 써놓고 동사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세상은 다시 서로 만나는 일이 언제나 보장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니 만나지 못하더라도 서로 마음 전하는 일을 미루지 말기를. 다시 서로 만나는 기회가 있거든, 눈으로 마음으로 상대를 어루만지며 그 시간을 충분히 느리게 사용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