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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딸들을 위한 미술관>을 엽니다

by 이진민

<아이라는 숲> 이후로 미술 쪽으로 다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이번엔 미술과 여성이요. 이 연재는 별일이 없다면 저의 다섯 번째 책이 될 예정입니다.


세상의 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 이야기를 하나씩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워낙에 미술과 여성을 묶은 좋은 책들이 많아서 제가 무슨 얘기를 더 새롭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도 길었습니다. 예상 가능한 그림들로 예상 가능한 얘기들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쉬면서 조금 뾰족한 저만의 포인트가 생긴 것 같아요.


일단은 단어 목록을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의 딸들과 함께 살펴보고 싶은 단어들이요.
우리 일상에서 너무 대놓고 여성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단어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고른 단어들입니다. 가나다 순으로 줄 세워봤어요.


거울 (자화상)

결혼

고통 / 상처

공간

관계 (가족, 친구)

관습

근육

기억

나이 듦

노동 / 일

달거리

도덕

모험

변신 / 괴물 / 마녀

불안

사랑

생명

서투름

선 / 경계

성(sex)

속도

슬픔

시선

아름다움

앞과 뒤

어린이

여신

영웅

요리 / 음식/ 식사

욕망

웃음

이름

이야기

자존감


전쟁

죽음

직선과 곡선

친구

하찮음, 사소함, 익숙함

하늘

학문

할머니

이걸 다 쓸 건 아니고요. 일단 목록을 길게 만들어 본 겁니다. 목록을 만지작거리면서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단어들을 고를 거예요. 나열된 단어들 몇 개가 섞여서 하나로 모이는 챕터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추가되는 단어도 있을 겁니다.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은 그림에서 시작해서 생각이 뻗어나가는 방향이었는데, 이번에는 단어들을 수집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그림을 찾아보는 방식으로 하려고 해요. 어차피 독자님들 보시기에는 그게 그거겠지만 저에게는 새로운 작업 방식입니다. 그간 이 프로젝트를 마음에 품고 하나둘 모아 온 많은 그림들을 뭉텅이로 그냥 창고에 다시 집어넣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림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자유롭지만 챕터가 파편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단어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조금 더 어떤 수렴점이 생긴다든가 챕터가 흐르는 모양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어떤 지도 같은 것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하고 있습니다.


가제에 있는 ‘딸들’은 육아 대상으로서의 어린아이라기보다 그냥 세상의 모든 여성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여성', '여인', '여자'보다는 관계성을 내포하는 ‘딸들’이라는 말의 어감이 더 따뜻하고 좋아서요. 제 반려인이 아들들을 위한 것도 필요하다면서 시리즈로 써보는 게 어떠냐고 하더군요. 제 아이들(둘 다 아들입니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들이 안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의 마음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여성인 저도 여성의 이야기를 쓴다는 게 벅차거든요. 여자인 저는 고유명사고 여성은 일반명사니까요. 그러니 일단 딸들은 딸들의 이야기를 쓰고 아들들은 아들들의 이야기를 써서 만나면 되지 않을까요.


연재를 다 할지 아니면 몇 챕터만 선보이고 책으로 낼지도 조금 더 고민할 생각입니다. 연재하면서 반응을 느끼고 댓글을 보면서 깨닫는 건 큰 기쁨이고 소중한 기회지만, 경험상 연재했던 글을 출간 목적으로 다시 거둬들이는 것도 나름대로 고통이더라고요. 그래도 꽤 많은 부분을 연재하게 되지 않을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만큼 오래 마음에 품어왔던 주제인만큼 시작하려니 기쁘고 설레네요. 세상의 딸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미술관, 그래서 세상의 인간들에게 조금이라도 행복을 주는 미술관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

이 연재의 시작이 반가울 그분께 특별히 안부와 사랑을 전합니다. 이렇게 다시 이어질 수 있어서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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