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가 이 책을 선물로 준 게 2년 전 9월이었다.
여름의 빛과 향기가 은은하게 느껴지는 예쁜 책이었다. 특별한 종이를 써서 잎이 반짝거리는 느낌까지 담아낸 표지. 크림색 속표지에는 작은 나뭇가지들이 흩어져 있었고 나뭇잎들이 손끝에 오돌토돌 만져졌다. 뒤표지에는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밀어를 주고받듯 서로 속삭였고"라는 소설 속 문장이 표지 그림 속 나뭇잎 색깔로 인쇄되어 있었다. 책을 이런 만듦새로 세상에 내는 사람들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Y가 준 책이었으므로 나는 진심을 다해 이 책을 좋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읽어보세요 언니. 아마 좋아할 거예요.
독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가장 앞에 실린 두 개의 단편 <시간의 궤적>과 <여름의 빌라>를 읽었고, 이 책을 건넨 마음을 단번에 이해했다. 시간이 흘러 이번 독서 모임에서 같이 읽을 책을 추천해야 했을 때 나도 이 책을 내밀었다. 해외에 거주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성들이 주축인 모임이기도 하고, 여름이기도 해서. (그러고 보니 Y 덕분에 모인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런 고요한 거미줄이라니.)
나라는, 대체로 작고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세계의 확장을 위한 최적의 계절이 있다면 바로 여름이 아닐까. 휴가라든가 여행이라는 단어와 맞물려 새로운 것을 만나고 느끼기에 적절한 계절이니까. 우리에겐 방학이나 휴가가 있는 계절이 둘 있지만 둘은 왠지 성질이 좀 다른 느낌이다. 겨울에는 그냥 따끈한 아랫목에 고양이처럼 눌어붙어있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여름에는 마음이 이미 신선하게 바람 부는 미지의 장소를 향한다. 겨울에는 온기가 필요하기에 익숙하고 따뜻한 장소로 연어처럼 회귀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세상 만물을 팽창시키는 여름의 열기는 우리의 소심한 마음마저도 그렇게 일순간 팽창시켜 대담하게 만들곤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아주 조금 커진 마음으로 평소의 익숙한 경계를 넘는다.
책 속 인물들도 여름휴가를 떠나 낯선 곳을 여행하는 사람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이리저리 그들만의 작은 세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국경이기도, 계급이기도, 성별이기도, 인종이기도, 결혼이기도, 나이이기도 한 '나'의 테두리에서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 사람들. 그렇게 세계의 확장이 일어나는 곳에는 늘 ‘타인’이라는 존재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감각할 수 있는 ‘경계’라는 선이 있다. 시간의 손이 닿아 희미해지기도 하도 더욱 견고해지기도 하는 선들이 여덟 편의 이야기 속에서 제각기 아련하다. 그러고 보니 책 표지의 은은함은 단편들의 속성을 효과적으로 담은 것이었다. 서유럽의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으로 감싼 책은 우리를 그렇게 인상적인 서유럽의 세계들로 차분하게 안내한다.
나라는 익숙하고 작은 세계의 확장에는 당연히 빛과 그림자가 있다. 각각의 이야기 속에는 희열뿐 아니라 경계에서 벗어나는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불안과 두려움, 수줍음 같은 것들이 비중 있게 버무려진다. 주인공에 따라 슬픔이 번지기도, 자기 환멸이 안에 고이기도, 무기력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경계를 허무는 자들은 사탕을 입에 넣은 것 같은 달콤함을 맛보기도, 일탈의 짜릿함을 경험하기도, 이해와 성숙의 시간을 선물 받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에는 '강렬한 생의 감각'이 독보적으로 존재감을 뽐낸다.
백수린은 애써 답을 찾지 않는 대신 상세히 서술한다. 판단하기보다는 감각할 수 있도록. 작가의 말에서 그는 “성급한 판단을 유보한 채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직시하고 찬찬히 기록하는 것이 (나의) 사랑의 방식”이라고 썼다. 그렇게 사랑으로 찬찬히 기록해 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훅 깊어지는 순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윤곽을 드러내 주지 않는 삶의 불가해성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도 온다. 여성, 해외생활(유배...), 엄마, 아이, 중년, 비자, 모국어와 외국어, 주재원, 강의실, 낯섦, 관계, 계층, 욕망, 소수자, 힘과 균형 등 나와 딸깍 들어맞는 키워드들, 혹은 내 주변을 맴돌면서 신경 쓰이게 하는 단어들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공감의 폭이 컸다.
사람들이 백수린의 소설을 우아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읽는 사람을 다짜고짜 불에 휙 던져 넣거나 물에 풍덩 빠뜨리는 소설들이 있다면, 이 책은 은은한 난롯불 앞에 놓아두거나 촉촉한 안개 속에 세워두는 느낌이었다. 일단은 문장도 플롯도 극단으로 가는 법 없이 잔잔하고 무엇보다 묘사가 아름답다. 자연과 계절감, 노을에 관한 묘사들이 특히 아름다워서, 소금고개의 초라한 골목에서 노을을 만나던 주인공의 황홀감이 활자를 뚫고 나와 그대로 나에게도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백수린 표 우아함의 지분은, 아름다운 묘사보다는 역시 '강렬하게 느끼되 조용히 말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백수린의 이야기 속에는 머리채를 잡고 격하게 싸우며 욕을 내뱉고 악다구니를 하는 사람이 없는 대신 눈동자에 불을 담고 침묵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태풍을 담고서도 조용히 작은 숨을 내뱉는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배경도 마찬가지. 스펙터클한 자연재해나 재난은 없지만 구름처럼 서서히 부유하며 조용하게 진동하는 일상이 있다. 정중동의 시공간에 사는 정중동의 사람들. 이 책 속에는 조용하게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았다. 그러므로 내향형의 독자인 나는 왠지 그 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 타인에게 수줍게 옆자리를 내주는 주인공들이 왠지 나에게도 그럴 것 같아서. 내 편을 들어달라고 절규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난 이렇게 살아요,” 하고 조그맣게 웃는 사람 옆에서는 나도 판단의 부담을 덜고 그냥 가능한 만큼 공감할 수 있을 테니까.
격정적이지도 않고 그야말로 책 속 단편 제목처럼 <고요한 사건>들이 이어지는 편인데, 그게 밋밋하다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이 없이 내 마음을 끄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작가의 말 끝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나는 당신이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유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라는 말.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딸깍하고 고리가 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 소설가는 나와 같은 곳을 보면서 같은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이구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교육 수준이 낮지 않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사람들인데, 선량하고 다정한 호기심으로 경계를 탐색한다. 학습이든 유전이든 슬그머니 혐오나 멸시가 끼어들 법도 한데 서로를 향해 다정한 마음을 유지하며 섣불리 미워하지 않는다.
내가 작가(..라는 말은 아직도 어색하고 내 것 같지가 않다)로서 책을 쓰면서 가장 크게 바라는 지점이 그거였다. 편 가르기와 혐오로 얼룩지고 있는 세상에서 나의 익숙함에 안주하지 말고 아주 조그만 철학적인 질문들을 품고 가는 것, 그렇게 다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탐색하고 조심스럽게 선을 넘어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것. 나의 첫 책에 누군가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써드릴 때면 다음의 문구를 썼었다. “언제나 사랑으로 향하는 질문들을 던질 수 있기를.” 비록 백수린은 우아하게, 이진민은 망나니처럼 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다정한 호기심을 가지고 사랑 쪽으로 분투하는 인간형을 그린다는 것. 그래서 기뻤다.
가장 좋았던 단편은 가장 나중에 읽었던 <흑설탕 캔디>와 가장 먼저 읽었던 <시간의 궤적>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한다면, 아름다웠다. 첨언하자면 트레이싱지로 겹쳐놓은 듯 비슷한 모양의 추억이 소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앳된 우리가 소나기를 흠뻑 맞으며 말간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던 연희동 고갯길의 골목, 그리고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아, 저게 엄마가 손에 쥔 달콤한 것이었구나,' 싶었을 만큼 되풀이하시던 엄마의 빛바랜 추억이 글줄 사이로 떠올랐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궤적을 따라 각자의 삶에서 받은 흑설탕 캔디를 손에 꼭 쥐고 산다.
여름이라는 계절을 마흔몇 번이나 통과한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해 여름이 그을려놓고 간 피부에 생긴 기미며 점이며 각종 잡티들은 인간이라는 나무의 나이테 같은 게 아닐까. 집에 들어앉아 뜨거운 햇빛을 피하지 않고, 탐색하며 살아 있었다는 흔적. 그렇게 보면 최근에 거울을 볼 때마다 은근히 거슬리는, 난데없이 커다랗게 생긴 왼쪽 뺨의 도돌이표 같은 자국에도 그럭저럭 관대해진다.
이 책을 다시 찬찬히 읽고 나니 이번 여름에 맞이할 타인과 내가 넘어가 볼 경계들이 기대된다.
수줍고 불안하게.
그래도 <흑설탕 캔디> 속 할머니처럼, 주먹을 꼭 쥐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이건 내 것이란다."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손에 쥐게 되지 않을까. 여름이란 그런 계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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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는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의 그림이다. 불어라고는 뚜레쥬르와 파리바게뜨 밖에 모르는 나는, 최근까지도 당당하게 이 화가의 이름을 시슬리라고 읽어왔다. 같은 철자를 쓰는 화장품 브랜드가 나의 무식한 당당함에 일조했다. 나는 한국 사람인데 알게 뭐야 싶지만 사실 독일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민으로 읽는 것과 비슷한 거겠지. 낯선 이름은 최선을 다해 읽어야 한다. 다 읽고 나니 이 책의 맥락과도 통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