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방문하면 혼자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페이지마다 마치 동창생 만난 듯 반갑고 마음이 간질간질했던 책이었다. 아, 나 얘 알아, 하는 마음. 유물은 인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 온 다채로운 물건들이기에, 정말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훅훅 꺼낼 수 있는 티켓이 되는구나 싶었다. "한 점의 유물 앞에서 우리의 시간은 과거로 향하기도 하고, 지금 이곳에서 가보지 않은 길로 이어진다"라는 책 소개글이 그대로 찰싹 들어맞는 독서였다. 박물관도, 유물 이야기도 너무 좋아하기에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읽었다.
이 책은 많은 전시를 기획하고 꾸렸던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정명희가 그렇게 우리를 가만히 유물의 세상으로 초대하는 책이다. 그 세계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무척 재미있다. 책 속 표현들을 빌자면 1만 년 단위로 흐르는 시간 속에 사는 고고학자들, 마이크로와 나노세컨드의 보폭으로 사고하는 보존과학자들, 부동산 시장이나 주식, 재테크 전망 같은 요즘의 현상은 깜깜하면서도 7세기 삼국시대의 대유행은 척척 알아맞히는 사람들.
"두 살배기 어을진이 장수하기를 발원합니다."
시간을 가로지르는 소원들을 보는 게 즐겁고도 먹먹했고, "찻잎이 놀라지 않을 정도의 따뜻한 물을 부으면"이라는 구절이 오래 남았다. 찻잎이 놀라지 않게 하는 마음이라니. 사람보다 유물을 오래 들여다보는 분들, 물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업인 분들은 그렇게 일상의 모든 무생물에도 자연스럽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건네시는구나 싶어 놀라웠다.
유물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부드럽게 연결되는 모습들을 보는 게 좋았다. 책 속의 아름다운 문장이 이야기하듯 "세상은 살아 있는 이들만의 것이 아니었고 신화와 이성이 공존했기에 소중하게 생각한 가치나 믿음, 꿈과 같은 것이 머물다 간 자리가 남았다." 그런 자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기 같은 묘한 힘을 얻는다. 실체를 손에 쥐기는 어려워도, 은은한 향 같은 게 나를 감싸는 그런 느낌의 힘.
아는 만큼 보인다는 공식을 대입하자면 국립중앙박물관에 놓인 유물 한 점 한 점을 아기 목욕시키듯 눈으로 꼼꼼히 닦고 또 닦으셨던 분이니, 더 깊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풀어내 주셨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흔치 않은 영역의 전문가를 모셨으니 조금만 생각을 더 깊게 뻗어주셨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너무 무겁지 않은 담백함이 오히려 좋았을 분들도 계시겠다. 유물에 대한 진입장벽을 문지방 없애듯 없애주는 책이다. 멋 부리지 않고 소소하게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았다. 박물관에서 유물들을 만나는 많은 이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엮으면 참 좋지 않을까.
저자는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긴다"라고 말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와 특별한 관계가 되는 데는 그렇게 대단하거나 분명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고. 기회가 된다면,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물건들과 실패한 것을 모은 전시를 해보고 싶다고도 했다. "그 전시실을 걷다 보면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더 너그럽게 바라볼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뚜벅뚜벅 걸어온 길에서 우리가 놓친 찬란한 순간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이런 큐레이터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에 계시다니 무척 기쁘다.
책의 부제 자체가 좋은 질문이었다.
“유물 앞에 오래 서 있는 사람은 뭐가 좋을까."
저자의 답은 에필로그에 있었다.
"타인에게 묻는 안부를 정작 자신에게는 묻지 않고 달리다 보면 거울 안에 낯선 이가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박물관을 찾는다."
내 답은 비슷한 맥락에서, 속도와 거리에 있다.
빠른 속도감으로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다 보면 박물관을 찾고 싶어진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유물들, 나에게 들러붙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유물들이 있어서 좋다. 내가 영화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이유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좋아하기는 하는데 즐기지 못한다). 나는 영화보다 책이 좋은 인간인데, 그건 내가 속도와 거리를 편안히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멈춰서서, 가만히', 다른 인간들이 살았던 이야기들을 나의 속도로 만나는 게 좋다. 정성이 가득 담긴 물건들, 웃음 짓게 만드는 물건들, 매혹적인 물건들. 그런 물건들을 만나면서 나의 이야기도 조금씩 다듬고 매만지게 된다.
반가사유상을 보며 자신에게 머물던 평화를 나의 손녀도 언젠가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어느 할아버지의 마음이 내게도 긴 여운을 남겼다. 나의 아이들, 운이 좋다면 그 후대로 이어질 존재들과 어떤 유물을 공통적으로 함께 마음에 품어보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당장 나의 아이들에게 엄마가 좋아하는 유물을 소개한다면 뭘 꼽으면 좋을까, 즐거운 생각거리가 생겼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불가항력적으로 가만히 멈춰 서서 한참을 들여다본 경험, 나에게는 뭐가 처음이었더라 생각해 보았다. 뉴욕 모마에서 만난 클림트의 <The Park>였던 것 같다.
가로세로 1미터 남짓의 그림이었는데, 보는 순간 그냥 매혹되었다.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거의 9할이 우거진 녹음으로 꽉 찬 그림인데, 눈이 싱그러워지고 마음이 달콤해지는 것 같았다. 나머지 1할을 보면서 그 밑에 엄청난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꼭 사람처럼 보이는 나무 둥치도 재미있다.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클림트가 자주 그리는 문양의 옷을 입은.) 그림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고, 집에 가기 전에 일부러 다시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돌아온 기억이 있다.
두 번째로 나를 붙잡았던 그림은 필라델피아 뮤지엄에서 만난 고흐의 Rain이었다.
직접 보면 색감이 말도 못 하게 예쁜데, 대담하게 선을 그어서 세차게 내리는 비를 표현했다. 그림을 보고 ‘청록색 비’라는 새로운 비의 종류 하나가 내 머릿속에 만들어졌다. 그러고 보니 책 안에는 ‘녹우당'이라는 예쁜 이름이 나온다. 집 뒤편 비자나무 숲에 바람이 불면 초록 비가 내리는 듯하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해남 윤 씨 종가에 붙은 이름이다. 녹우당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에서 나는 고흐의 청록색 비를 떠올렸다. 시공간을 건너 이렇게 맞닿는 마음들이 좋다.
사실 이 그림은 고흐가 정신 병원에 갇힌 채 창문 너머로 바라본 풍경이다. 가만히 있을 것을 요구받는 작고 네모난 방 안에서, 창문을 통해 저렇듯 싱그럽게 약동하며 세차게 내리는 비를 내다보았을 그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박물관에서 울어본 적이 있냐는 N의 질문을 받고 떠올렸던 그림이기도 하다. 다 컸으니 울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저런 비가 내렸던 것 같다.
미국을 떠나 독일에 살고부터는 밀밭을 볼 때마다 자동 소환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다시 가서 오랜 친구 만나듯 재회하고 싶은 그림.
뮤지엄은 ‘뮤즈들의 집’이란 뜻이다. 시간의 신이자 제 손으로 쫓아낸 아버지였던 크로노스의 존재가 두려웠던 제우스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에게서 아홉 명의 딸들을 낳는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제우스처럼 전능한 존재라 할지라도 기억력까지 자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잊지 않도록’ 읊조리고 노래하는 것이 업이었던 뮤즈들은 이렇게 시간에 굴복하고 마는 우리의 부실한 기억력을 매만져주는 일을 했다. 지금은 뮤즈들의 집인 뮤지엄이 그 일을 대신한다. 유한한 인간들이 물처럼 연결되어 흐를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했었다는 기록. 밥을 해 먹고, 서로 사랑하고, 가끔은 우울해하고 외로워하면서 이 자리에 머물렀었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담아주는 공간. 우리의 사소한 일상도 유물에 담겨 먼 시간을 가로질러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늘을 사는 마음이 조금은 더 단단하고 특별해질 것 같다.
고국에 들러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아졌다. <평안감사향연도> 속의 왁자지껄한 잔치에서 비껴 있는 구경꾼들과, 한쪽에서 임무를 마치고 쉬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싶어졌다. 갈대 위에 앉아 바다를 건너는 달마대사의 표정도 궁금하다. 기마인물형 토기에 앉은 사람의 표정과 턱 밑에 꼭 묶은 끈, 슬쩍 몸을 앞으로 기울인 다부진 자세를 다시 보면 웃음이 날 것 같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책 속 '깃털남'의 존재를 확인하고, 추사가 그린 <세한도>의 낙관을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우리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의 빨간 네 글자. 눈 덮인 혹독한 추위의 시간을 메마른 갈필로 그려내면서 저렇게나 따스하고 촉촉한 낙관으로 그림을 완성했었다니. 화룡점정과도 같은 그 낙관에 담긴 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낙관을 찍을 수 있는 도장을 굿즈로 판다면 냉큼 가져다가 독일에서 손편지를 쓸 때마다 꾹 눌러 찍을 텐데.
저자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힘은 사용할수록 자란다"라고 했다. 책의 맨 마지막에는 "이제 당신 차례의 끝말잇기를 들려주기를, 당신의 시선이 닿을 때 세상에 없던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라고 썼다. 책 한 권 덕분에 한국이 부쩍 그리워졌고 마음이 알록달록해졌다. 곧 그 끝말잇기를 하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