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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Sep 27. 2022

[리뷰] 한국에서 읽은 책 세 권

모나미 153 연대기, 긴긴밤, 한 글자 사전

3주 정도 한국에 머물렀는데 책을 열 권 정도 읽었다. 기차며 지하철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은 것도 한몫했을 테지만 세 끼 식사와 청소, 설거지를 내 손으로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 싶다. 평소에 책 읽을 시간이 없어 그렇게 허덕였는데, 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녀도 가사노동이 줄면 이 정도의 독서가 가능하구나 싶어 조금은 마음이 시큰거렸다. 여성과 노예는 시민이 되기에 적절치 못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아이고 영감님" 하고 코웃음을 치던 이십 대를 지나 "아아, 그 말이..." 하고 씁쓸한 썩은 웃음을 짓게 된 지 오래다. (그리고 독일에 돌아온 지 2주가 넘어가는데 역시나 단 한 권도 끝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매일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따뜻한 걸 해 먹이고, 한숨 쉬며 우리 식구의 공간을 정돈하는 일상을 좋아한다.)


그렇게 읽었던 책 중에서 세 권을 묶어서 짧은 리뷰를 남긴다.
김영글 님의 <모나미 153 연대기>, 루리 님의 <긴긴밤>,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

1. 모나미 153 연대기

제 동전이 아니라 카페 탁자입니다. 책에 따라온 모나미 153. 그러고 보니 이 카페 이름은 커피 273이었다는 하찮은 유사성.

잘 익은 여름 햇볕이 과즙처럼 쏟아지던 날. (주르륵 흐르는 과즙의 느낌은 공기가 촉촉한 여름 한국에서 특별하게 느껴지는 감각. 독일의 여름 햇볕은 갓 튀긴 감자칩처럼 뜨겁고 바삭하다.) 오래 못 만났던 지인을 만나러 플라뇌즈라는 작은 서점에 갔다. 거기서 선물로 받은 책이다.


쪼끄만데 놀라운 책이었다.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가지고 한국 근현대사를 경쾌하고도 진중하게 엮어냈다. 사물에 대한 수다인데 그 이면의 이야기. 그러니까 그걸 책상 위에, 필통 안에, 주머니 속에 두고 움켜쥐었던 우리들의 지난 시간이 들어있다. 저자도 이야기하듯 사물은 결코 온전히 사물로서만 머무르는 법이 없기에, 우리는 볼펜 한 자루로 한국 사회의 복잡다단한 모습을 스케치해낼 수 있다. 사물의 미시사는 반드시 인류의 거대한 역사와 만나기 마련이니까.  

책은 평범한 볼펜 한 자루를 따라 종횡무진 움직인다. 우선은 볼펜의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보이는 한국의 압축성장과 그에 따른 명암, 심심했던 그 시절 우리가 모나미 볼펜으로 만들 수 있었던 각종 장난감이며 놀이들, 이 조그만 볼펜을 신의 한 수처럼 쓸 줄 알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것들. 읽어 가다 보면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의 낭만에서, 볼펜 속에 든 독극물을 삼켰던 마유미를 거쳐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에 이르기까지 언뜻 보아도 80년대의 강렬한 기억들이 이 작은 볼펜 주위로 모여든다. 사물을 통한 역사(참고로 이 책은 소설로 분류된다. 정사와 야사를 맛있게 섞어 놓고 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였다.)를 좋아하기에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주로 책 안에 착실하게 텍스트를 쏟아붓는 타입의 저자인데, 플라뇌즈의 친절한 사장님으로부터 책이라는 물건을 다양한 감각으로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이 책도 그중 하나.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조그만 크기인데,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책등에 모나미 153의 등신대가 디자인되어 들어있는 데다 페이지도 153페이지로 딱 맞춰놨다. 책등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내용뿐 아니라 디자인에도 위트를 소금처럼 뿌려놓은 감각. 나도 언젠가 저런 시도를 해볼 수 있을까, 책의 물성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 외관이 귀엽죠. 책방에서 더 귀엽게 포장도 해 주셨다는.

참고로 플라뇌즈는 고양시청 부근에 있는 매력적인 책방. (일단 간판부터 매력 터진다. 대성환경개발이라는 가게 간판을 그대로 두고 쓰는데 전 주인은 대체 어떻게 환경을 개발했는지부터 궁금해진다.)‘산책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책방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것도 여성형으로 센스 있게. 책과 산책이라는 단어는 발음에도, 의미에도, 기분 좋은 유사성이 스며있다. 책도 산책도 좋아하는 여성인 나는 그렇게 책방에서 쌓인 책 사이를 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거기서 <긴긴밤>을 구입해 왔다. <모나미 153 연대기>는 재빨리 호로록 읽고, 사장님의 바람대로 이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친구에게 선물로 주고 왔다.  

 

2. 긴긴밤

그렇게 뒤늦게 <긴긴밤>을 구입해 읽었다. 책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무수한 간증이 있어왔기에 리스트 앞줄에 적어두고 종이책으로 구입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과연, 주변의 간증은 과장되지 않았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도 있듯이, 인간 삶의 아주 중요한 줄기는 이런 동화 안에 들어있구나 싶었다. 동화라는 선입견 같은 게 있다면 버려도 좋을 만큼 문장이 담백하고 아름답다. 쉬운 말로도 이토록 깊을 수 있다.


코끼리들의 지혜로운 이야기들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았고(다 옮겨 적을 수가 없다. 코끼리들이 나오는 챕터가 통째로 정말 좋아서 여러 번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의 부분이 아름다웠다.

“노든은 아내와 딸에 대해서는 항상 말을 아꼈다. 아내와 딸은 노든의 삶에서 가장 반짝이는 것이었고, 그 눈부신 반짝임에 대해 노든은 차마 함부로 입을 떼지 못했다.”


읽다가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문 표현은 “별이 빛나는 더러운 웅덩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냥 책의 주인공인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의 여정을 묘사하는 조그만 덩어리의 일부였지만, 그 표현이 너무 좋았다. 더러운 웅덩이에도 별은 빛나는 게 당연하다. 더러운 웅덩이라고 해서 빛나는 별을 품지 못할 이유도 없다. 무엇보다 이들의 여정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고 나서 책을 다 읽고 맨 뒤에 실린 심사평을 보는데 딱 이 구절이 제목으로 나와있는 것.

같은 것을 보는 마음.

반가웠다.


내 아이들이 커서 (가능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이 책을 읽어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마음으로, 어른의 눈으로, 나도 여러  다시 집어  .

왜 이렇게 분홍색으로 찍혀 버렸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오른쪽은 가슴이 저릿하게 예뻤던, 비오는 날의 그들을 그린 삽화.

3. 한 글자 사전


시인은 자신만의 사전을 쓰는 사람들이다.


칠레의 시인 파라가 '모든 시인은 자신의 고유한 사전을 가져야 한다' 했다는데,  말에 굉장히 아름답게 부합하는 책들을  분이 김소연 시인이다. 마음에 관련된 낱말들을 모아 엮은 <마음사전> 이어,  글자로  단어들 안에 꼭꼭 접힌 세상을  펼쳐 보여주는 < 글자 사전> 내놓았다. <마음사전>   터울 자매가 되어주면 좋겠다며 2018년에  책을 이제야 만났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누구나 읊조리는 시 조각도 있듯이 시인은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다. 시인들이 이름을 부르면 문이 열리고 그 사물이 몰래 품고 있던 세계가 보인다.

시인의 사전은 날렵하면서도 묵직하다. 차가운 샘물이 솟는 철학자의 잠언집 같기도 하고, 멋있는 언니의 매콤달콤한 다이어리 같기도 하다. 시인의 사전은 사전이라는 낱말의 정의를 바꾼다.


<마음사전>이 깊고 진중한 큰언니라면 <한 글자 사전>은 언니의 날카로움을 닮았지만 조금 더 발랄하고 유쾌한 동생 느낌이다. 언니는 할 말이 많아 보였는데, 동생은 조금 더 말의 여백을 즐기고 장난도 자주 친다. 언니를 만났을 땐 내 곁에 두고 오래오래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는데, 이 동생은 부담 없이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고마운 친구에게 한 권, 읽다 보니 생각나는 사랑스러운 작사가 님에게도 한 권 건네고 왔다. 자신의 공간을 채워야 하는 사람들, 여백을 채울 창작자들이 스위치처럼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전이 아닐까 해서.  


글밥이 많지 않아 가볍게 읽으면서 한 글자 단어들의 매력적인 정의를 그물로 듬뿍 건져 올렸다. 자주 맛보며 아끼고 싶은 정의가 많다.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ㄱ'에서 건진 보물들만 몇 개 옮겨 둔다. 깨의 정의가 얼마나 귀여운지 말도 못 한다.


객: 손님을 뜻하는 말이지만 객기, 객소리로 활용될 때야 비로소 숨겨진 뜻이 들통난다. 쓸모없는 군더더기라는 뜻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겁: ‘나는 겁이 많아’라는 표현과 ‘저 사람은 겁이 없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인다. 많거나 없는 두 갈래 외에, ‘나는 겁이 적당한 편이야’ 같은 말도 두루 사용되면 좋겠다.


겉: ‘속’의 반대말이므로 다 보이는 세계에 관한 것. ‘속상’하다는 말은 있어도 ‘겉상’하다는 말은 없다. 말하지 않으면 몰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심이 ‘겉상’할 뿐인 경우도 있다. 속까지 상하지는 않은 적도 사실은 많다. ‘겉상했을 뿐이야’라는 표현도 두루 사용되면 좋겠다. 겉치레, 겉멋처럼 부정적인 뜻으로만 활용되는 ‘겉’의 세계의 연장선에서.   


공: 공을 굴리다, 공을 던지다, 공을 받다, 공을 잡다, 공을 차다, 공을 튀기다, 공을 때리다… 어울려 쓰이는 말들을 살펴보면, 둥글둥글한 사람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가 짐작된다.
 

금: 금은 밟지 말라는 뜻에서, 선은 넘지 말라는 뜻에서 설정된다. 금은 타인을 통제하기 위해서, 선은 나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서.


깨: ‘맛있게 드세요’라는 뜻으로 뿌려두는 것.  


다음으로는 시인의 <시옷의 세계>를 구입해 읽으면 세 자매가 결성되려나. 기대된다.


이렇게 자음별로 들어간 간지 디자인도 감탄이 나올 만큼 예쁩니다.



+

<마음사전>에 관해서는 이미 이 매거진에 연애서평을 남긴 바 있습니다. 참고하실 분은 아래 링크로.

https://brunch.co.kr/@jinmin11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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