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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y 23. 2023

보내지 않은 말

마흔네 번째 시

2023. 1. 9.

정병근, '보내지 않은 말'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 시작, 2020)> 중에서


[보내지 않은 말]


보내기 전에

말은 아름다웠다


부를 필요도 없이 너는 너였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나였다


말하지 않았으므로 풀들은 우거졌고

나무들은 가지를 쭉쭉 뻗어갔다

바위와 돌들은 제자리에서 충분히 무거웠다


보내지 않은 말은 어둠과 같아서

하늘엔 별의 눈동자들이

초롱초롱하였다


어떤 말도 될 수 있으며

그 어떤 말도 될 수 없는

경계에서 나의 말은 지혜로웠다


내장된 말을 품고

나는 아직 아름다이 접혀 있어

소리들이 먼저

내 귀의 지붕에 비처럼 내릴 때


목젖은 촉촉이 젖고 혀는 달아

아무도 부르기 싫었다

아직 나를 보내지 않았다





  “써지지 않은 시는 시가 아닐까요?”


  동그란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던 분이 계세요. 이런 묘하고도 엄청난 질문을 맨 정신에(음?) 직접 던진 건 아니고, 책을 읽고 내용과 감상을 나누면서 한 말이었지요.


  그분께 그 질문에 대한 답시로 보내드렸던 시였는데,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분이 그런 질문을 한 것은 ‘활자로 옮겨지면서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고, 아직 써지지 않은 시가 써낸 시보다 아름다웠다’는 김선오 시인의 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보내기 전에 말은 아름다웠다,” “어떤 말도 될 수 있으며 그 어떤 말도 될 수 없는 경계에서 나의 말은 지혜로웠다”라고 말하는 이 시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답이 될 것 같았어요.


  짧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에서, 말을 쉽게 내뱉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고 묵혀두었다가 말을 고르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말이든 글이든 그것이 삶을 넘을 수 없음을 아는 사람들도요. 아마도 시인들이 대표적으로 그런 사람들이겠지요. 언어의 바다에서 끊임없이 말들을 골라내고,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우주에서 묵묵히 싸우는 사람들. 언어는 이 세상 많은 소리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때로는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하니까요. 삶의 어떤 순간은 글 따위로 부연되지 못하고, 말이나 글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음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삽니다.


  세상에는 도저히 언어화되지 않는 순간과 감정들이 있지요.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말이 축제처럼 소용돌이치지만 내뱉는 순간 다 거짓말이 되어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같은 거요. 아니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영롱한 무지개를 언어화하는 순간 그 색감이나 광채를 잃을 것 같은 자각. 언어가 가지는 본질적 한계에다 내 표현의 한계가 더해지면 문득 아찔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아찔함을 계속 되새기며 살고 싶어요.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표현의 한계를 세포로 절감하는 일 말이에요.


  어떤 말로 형체화되지 않고 그저 가슴 어딘가에, 목젖 어딘가에서 맴도는 감정들. 혹은 무언의 자기장에 들어가 그저 전류만을 감각하는 순간들. 이런 것들이 한계가 아닌 축복임을 깨닫고 즐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한계 속 축복과 즐거움이란, 쓰는 사람의 고뇌 속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읽는 사람으로서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읽은 책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필립 자코테라는 스위스의 시인이자 번역가는 그런 뭉클한 감정의 근원을 파고들어 《순례자의 그릇: 조르조 모란디》라는 얇고 아름다운 책을 남겼습니다. 모란디의 그림이 던지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손에 잡히지 않고 계속 빠져 달아나는 어떤 비밀을 쫓아가는 어린아이처럼요. 모란디의 정물화를 볼 때 느껴지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아마도 시인 자신이 정물처럼 꼼짝 않고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그 사물들조차 속으로 결코 이럴 줄 몰랐을 만큼 잘 말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많은 문장을 썼지만, 오묘한 향기의 허브 잎만큼이나 신비로운 이 그림들 앞에서는 내가 앞서 쓴 내용이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자코테가 느끼는 언어의 한계를 바라보는 일은 저에게는 지극한 기쁨이었습니다. 수학과 음악, 철학과 시,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그림(이를테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나 마크 로스코)까지 다양하게 등장시키며 모란디의 그림들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몸부림 자체가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정병근 시인은 “보내기 전에 말은 아름다웠다”라고 썼지요. 그 무한한 미지의 아름다움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그 옆에 저는 자코테 시인의 "말을 보내려는 몸짓은 아름다웠다", "그렇게 보내진 말은 아름다웠다"라고 조그맣게 쓰고 싶었습니다.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는 사물들의 색깔"이라는 표현 같은 것, 모란디의 꽃다발들은 곧 시들고 말 덧없는 존재가 아니라 "봉오리 상태로 곱게 감싼, 영속화된 새벽"이라고 말하는 시인에게서 저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영롱한 무지개를 느꼈거든요. ”약간 떨리지만 연약하지 않은 윤곽," "활짝 피어날 준비를 마친 모든 말의 봉오리가 모여 있는 중심" 같은 표현도 참 아름다웠고요. 그러니까, 표현의 한계를 몸의 세포로 절감하는 자들에게서 생겨나는 또 다른 무지갯빛 자기장 같은 것이 있는 셈이죠. 장 크리스토프 바이이라는 다른 시인이 남긴 말도 무척 향기롭습니다. "마치 이 화가(모란디)의 회화는 차를 눈으로 음미하는 의식이 된 듯하다. 이 의식은 감각이라는 찻잎을 초탈이라는 물에 담가 우려내는 기술이다..."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는 자들에게서 보내진 말들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궁금하실 것 같아서 책에 있는 모란디의 그림 하나를 찍어서 보여드립니다. 표지 그림이기도 해요.   


 최근에는 또 제가 아끼는 이윤주 작가님(이자 '나의 편집자님!'이라고 소유욕을 드러내고 말 테다)이 "명백히 문자의 세계에 진입한" 조카를 바라보는 애틋한 마음을 담은 글을 읽었습니다. 물티슈 겉면에 달콤한 사탕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사탕인 줄 알았던 어린 조카를 달래던 일화가 담긴 글이었어요. 작가님은 "이름을 불러야만 꽃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름을 몰라야만 사탕인 경우도 있음을, 실망한 아이를 달래며 알았다"라고 합니다. 문자 이전에는 "물티슈도 (잠시나마) 사탕 가득한 봉지가 되고, 꽃은 '꽃' 이상이 되고,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가두지 않는다"고요. 물티슈라는 글자를 모르기에 알았던 그 달고 황홀했던 세계, 오롯한 감각의 세계가 얼마나 고맙고 중요한 것인가에 관한 아름다운 문장들은 사실 언어로서도 달고 황홀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이요. "그런 세계를, 우리 모두는 한때 가졌을 것이다. '붉다'라는 말보다 더 붉고, '보드랍다'라는 말보다 더 보드랍고, '새소리'라는 말보다 더욱 경쾌한 새의 소리가 있는. 기호의 체계에 들어서고 생각의 회로에 익숙해질수록 멀어지지만, 몸 어딘가엔 새겨져 있을."


  다듬어지지 않은 미지성, 그 안에서 헤매는 일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분명히 정의 내리고 잘게 나누어 서랍에 정리하길 좋아하는 인간들의 이성은, 가끔 이 시를 읽으며 아름답게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말하지 않았으므로 풀들은 우거졌고/ 나무들은 가지를 쭉쭉 뻗어갔다/ 바위와 돌들은 제자리에서 충분히 무거웠다"는, 이 고요 속의 풍성함과 깊이감을 아는 일. 잡초 같은 단어를 우거지게 하고 문장을 덩굴처럼 뻗어보아도 한없이 가볍기만 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요.


  문장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아름다워서 눈으로 여러 차례 쓰다듬다 보니 아주 예쁜 연시(戀詩) 같기도 합니다. 아직 나를 보내지 않은 순간의 황홀감, 경계에서 느끼는 무한한 아름다움 같은 거요. 보내지 않은 말이 어둠과 같아서 오히려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별처럼 빛나고, 그 마음이 궁금한 별들의 눈동자도 초롱초롱 빛나는 모습을 생각해 보니 마음이 간질간질합니다. 마음도 대체로는 보내지 않았을 때가 더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실은 1월 9일, 이번 해를 새로 시작하던 무렵에 읽고 썼던 시인데요. 그때 '써지지 않은 시를 많이 품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라고 적어둔 것을 보니, 지난 다섯 달 동안 참 되지도 않는 문장들을 많이도 뱉어놨다 싶습니다.

   

내장된 말을 품고

나는 아직 아름다이 접혀 있어

소리들이 먼저

내 귀의 지붕에 비처럼 내릴 때


  올해의 남은 시간은 이 연을 조금 더 많이 감각하며 살고 싶습니다. 침묵하며 아름다이 접혀 있고 싶어도(이미 뱃살은 충분히 접혀 있..) 편집자님들이 데드라인까지 어서 말을 뱉어내라고 등짝을 칠 것을 알지만요. 그리하여 내장된 말을 품기는커녕 내장까지 쥐어짠 말들을 탈탈 털어 활자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요. 아무리 삶에 미지와 하얀 여백을 품고서 소리의 빗소리를 듣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해야 하는 작업들은 구분과 분해와 테트리스처럼 시간을 조립하는 일들이겠지만요. 시를 읽는 마음이라는 게 결국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미지와 허공을 삶에 포함하려는 태도. 모래 먼지 속에서 피어난 조맣고 연약한 노란 꽃을 아끼는 마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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