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세 번째 시
2023. 3. 6.
함민복, ‘꽃'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중에서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러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경계에는 철조망과 깨진 유리병과 통곡의 벽이 있는 줄 알고 자랐는데, 꽃이 경계가 되어준다니 그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이제는 경계라는 단어에서 오묘한 설렘을 느끼는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그것도 참 감사한 일이고요. 세상이 조금 더 환해지고 따뜻해질수록 경계들도 말랑말랑 부드럽고 아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 오지 마"가 아니라 "가까이 와서 나를 만나 볼래?"로, "넘으면 죽어"가 아니라 "넘어와도 괜찮아"로.
빛과 그림자, 안과 밖, 내 것과 내 것 아님, 전생과 내세, 나와 세계. 그 사이에 경계가 있습니다. 형체가 있는 듯하나 없고, 없는 듯하나 있는 신기한 선.
생이란 끊임없이 경계를 자각하고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결국에는 그 모든 경계를 허무는 일이기도 하고요. 자신이 자각하고 설정한 경계가 그 사람을 만들지만, 소멸의 순간에 모든 경계는 시들어 허물어지겠지요.
종국에는 허물어질 경계라면 물리적인 경계든 보이지 않는 차원의 경계든, 꽃으로 경계를 짓고 흠향하며 건배하는 삶으로 만들면 좋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경계가 꽃인 것이 좋지도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거기에 '꽃이 피도록' 하는 것은 마냥 꽃으로 경계를 나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요.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마지막 연의 이 합일되는 순간은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이런 무경계의 세상이 또 마냥 아름다운 것만도, 지속가능한 것도 아님을 압니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는 실상 거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 듯이요. 경계는 잠시 허물어지는 그 순간이 아름다운 것이지요. 아름다운 경계를 구축하는 것도 실은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하고 중요한 일이고요. 그래서 저는 이 시의 마지막 연보다는 첫 연의 향기가 더 진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모든 경계에 자연스럽게 꽃이 피는 것은 아님을 압니다. 그렇기에 이 문장이 더 빛나는 것 같아요.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세상의 경계에 꽃이 피게 하는 일. 나뉘어 있으나 서로에게 끌리고, 경계를 넘어 서로를 안아볼 수 있게 하는 일, 그렇게 경계를 가꾸는 일이 될 겁니다.
어느새 가시가 돋은 제 주변의 경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로 시작해 봐야겠네요. 너와의 경계에는 이 꽃을 심고 싶고, 그들과의 경계에는 이 꽃이 피어났으면 좋겠고. 이런 생각만으로 갑자기 경계가 환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
외국살이가 길어지면서 15년째 경계에 놓인 삶을 살고 있어요.
경계에는 그리움의 해바라기도 피고, 센터 자리는 내 것이 아니라고 물러서 있는 안개꽃도 만발합니다. 올망졸망 물망초 위에 낙엽이 두껍게 내려 쌓이기도 하고, 시간의 추위에 얼어 죽었다고 생각했던 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어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물론,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이색적인 꽃들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지요. 무엇보다 들꽃처럼 피어나는 자유가 있지만 고독이라는 아름드리나무의 존재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경계를 허무는 일은, 꽃이 시드는 일이 아니라 다른 꽃이 피는 일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