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 자유의 경계
나흘 전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작 《동굴 밖으로 나온 필로와 소피》에 실린 동화 일부를 공개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노 함 프린시플(No Harm Principle: 무 위해성의 원칙)'을 아기돼지 남매 이야기로 만든 동화인데, 쓰면서 가장 즐거웠던 편이에요. (아무도 안 물어봤지만 쓰면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편은 롤스였습니다. 브런치북 거둬들이면서 그 편은 삭제하지 않고 브런치에 남겨 뒀는데, 궁금하시면 여기를 눌러주세요.)
《동굴 밖으로 나온 필로와 소피》는 무사히 세상에 나와서 친구들을 만나러 뛰어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아직 책을 받아보지 못해서 실물이 궁금한데, 8월 하순까지 좀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네요. 그림을 맡아주신 김새별 작가님께서 출간 3일 만에 청소년 철학 주간 2위라고,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어요.
그럼 룰루와 랄라를 만나보시죠. 글의 도입부를 옮겨 둡니다.
엄마 돼지 로라는 통통한 배와 복스럽게 접힌 턱이 예쁜 연분홍 돼지입니다. 로라는 피기빌(Piggyville)에 살아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풀밭이 넓게 펼쳐진 시골 마을이죠. 로라에게는 귀여운 아들 룰루와 명랑한 딸 랄라가 있답니다. 로라는 룰루와 랄라를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키우고 있어요.
룰루는 북극 탐험이 꿈인 아기돼지입니다. 룰루의 예쁜 연갈색 눈은 북극에 가는 상상을 할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곤 하지요. 랄라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오빠 골탕먹이기가 취미인 장난꾸러기예요. 입 짧은 오빠와는 달리 랄라는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먹성 좋은 아기돼지랍니다.
손꼽아 기다렸던 여름 방학. 룰루와 랄라는 엄청나게 들떴어요.
밀 할아버지와 밀리 할머니가 있는 커다란 도시로 놀러 가기로 했거든요. 그것도 난생처음 기차를 타고요!
꿀단지 같은 노란 해님으로부터 햇살이 꿀처럼 세상에 흘러내리듯 떨어지는 달콤한 아침, 로라는 룰루와 랄라를 데리고 서둘러 기차역에 도착했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 위로 앞코가 뾰족하고 늘씬한 기차가 스르륵 와서 서자, 룰루는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이걸 타면 북극도 갈 수 있을까?
로라네가 들어선 칸에는 사이좋게 낱말풀이 게임을 하는 나이 지긋한 스컹크 부부가 타고 있었어요. 스컹크 아줌마는 룰루에게 방긋 웃어주었고, 스컹크 아저씨는 랄라에게 윙크를 해주었지요. 색이 고운 엄마 오리를 따라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오리 다섯이 종종종 오리걸음으로 들어와 룰루네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드디어 출발!
창밖으로 휙휙,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옆으로 바삐 지나가는 풍경들이 정말 근사해요! 정신이 팔린 룰루와 랄라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창문에 코를 박고 한참을 바라봤어요.
"창문에서 얼굴을 떼렴. 그러다가 돼지코가 된단다."
"엄마, 우리는 돼지인데요?"
"......"
아기돼지 랄라는 아침을 잔뜩 먹고 왔으면서도 배가 고프다고 꿀꿀거리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당근 줄까?"
"아니, 당근 말고 치즈! 치즈 주세요."
산양 젖으로 만든 치즈를 좋아하는 밀리 할머니를 위해 엄마가 아주 커다랗고 둥그런 치즈를 가방에 넣는 걸 아침에 봤거든요. 냄새는 좀 고약하지만 크래커에 얹어서 허브랑 꿀을 뿌려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치즈는 안 돼. 이렇게 밀폐된 공공장소에서 냄새나는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 거야."
"밀푀유? 엄마, 나 그거 엄청 좋아하는데? 어디 있어요?"
엄마는 입맛을 다시며 두리번거리는 랄라에게, 기차에 탔을 때는 집에서처럼 마음껏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얘기해줬어요. 다른 동물들도 함께 타고 있으니 배려해야 한다고요. 더군다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는 도시에는 동물들이 많고, 집도 높은 빌딩을 한 칸씩 나누어 만든 집에 살고 있으니 더 조심해야 한대요. 기차에서는 치즈를 못 먹고 할머니네 집에서는 뛰지도 못한다니! 풀이 죽은 랄라에게 엄마는 대신에 엘리베이터라는 걸 탈 수 있다고 알려줬어요. 룰루의 눈이 반짝거렸어요. 우와, TV에서 본 적 있는데! 단추를 누르면 층층이 서는 그것!
"엄마, 엘리베이터가 뭐예요?"
"바보야, 너 그것도 몰라? 나는 TV에서 봤는데."
"룰루야, 동생한테 바보가 뭐야. 잘 가르쳐 줘야지.”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섰어요.
"엄마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 건데, 당근 먹으면서 둘이서 얌전히 앉아있을 수 있지? 일어나서 돌아다니면 안 돼."
피기빌에서 자라는 당근은 얼마나 달콤하고 아삭아삭한지 몰라요. 하지만 입 짧은 룰루는 탐스럽게 잘 여문 피기빌 당근 앞에서도 늘 시큰둥해요. 와삭와삭,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먹어치운 랄라 옆에서 룰루는 오늘도 당근을 그저 요술봉처럼 쥐고만 있군요. 랄라는 오빠 당근도 내가 다 먹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어요. 오빠가 다 먹었는 줄 알고 엄마가 오빠를 칭찬할 것 같아서요.
"너 엘리베이터가 뭔지 몰라?"
룰루는 당근이고 뭐고 또 엘리베이터 생각에 푹 빠진 모양이에요. 당근을 들고 위로 천천히 올리면서 위이잉 소리를 내고 있어요. 저게 뭐하는 짓이람. 룰루는 가끔 식탁에서도 공상에 빠진 채 두부부침으로 이글루를 짓곤 해요.
"오빠, 그 당근 내가 먹어도 돼?"
당근을 따라 눈알을 위아래로 움직이던 랄라는 결국 못 참고 룰루의 당근으로 손을 뻗었어요. 룰루는 랄라의 입에 당근을 물려주고 엘리베이터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는 물건인지 알려줬어요. 마음에 평화가 온 랄라는 그제야 엘리베이터가 뭔지 들을 마음이 생겼어요. 오, 재미있겠는데? 이걸 마음껏 탈 수 있다니!
랄라는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엘, 리, 베이터! 엘리베이터~!"
랄라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요. 랄라의 노랫소리에 스컹크 아줌마 아저씨가 낱말풀이 책에서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어요. 룰루는 생각했어요. '음... 엄마는 일어나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만 했으니까, 노래는 괜찮겠지?'
"꽥, 꽥, 꽤액~!"
랄라의 노랫소리에 아기오리들도 덩달아 꽥꽥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엄마 오리는 아기오리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했지만 가장 목청이 큰 아기오리 하나가 고집스럽게 랄라의 노래에 꽥, 하고 장단을 맞추었고 다른 아기오리들은 그게 재밌어서 깔깔깔 웃었어요. 랄라는 신이 나서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고요. 기차 안은 꽥꽥 대는 소리와 랄라의 커다란 노랫소리, 그리고 조용히 시키려는 엄마 오리의 꽥꽥거리는 소리로 시끌시끌, 꼭 학교 쉬는 시간 같았어요. 룰루는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이거 근사한데!
결국 스컹크 아저씨가 큰 소리로 말했어요.
"요 녀석들 조용히 하지 못해? 여럿이 타고 있는 기차에서 이렇게 떠들다니, 조용히 하지 않으면 이 아저씨가 엄청 고약한 방귀를 뀌어버릴 테다!"
기차 안은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어요.
잠시 뒤에 들어온 로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그만 감격했지 뭐예요.
(이하 생략 - 룰루와 랄라는 엘리베이터도 타고, 함께 식사도 하고, 각자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밀 할아버지로부터 자유의 경계에 대해 배워요.)
아이들이 읽을 글을 쓴다는 건 이전과는 또 다른 종류의 책임감과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 일이더군요.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정성껏 담았습니다. 서점을 오가다 마주치시면 반가워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