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아저씨가
이모네 철학 상담소 2025년 10월호 원고입니다. 게임에 니체라니, 어리둥절해 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네요 :) 여기 올리는 글은 다듬기 전의 초고임을 알려 드립니다.
[이모네 철학 상담소 10월호] 게임 중독인지 고민하는 너에게: 니체 아저씨가
제가 게임 중독일까요?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고 평상시에도 계속 그 생각만 나요. 진짜 잠깐만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훌쩍 지나 있고, 엄마아빠는 무시무시하게 화를 내세요. 절제하는 법을 알고 싶어요.
게임 참 재미있지요. 제가 좋아했던 게임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한국 사회는 어린이도 지나치게 쫓기며 사는 경향이 있어서 좀 놀기도 하면서 여유를 가지면 좋겠지만, 중독을 의심할 만큼 게임에 빠지는 건 다소 우려할 만한 일이죠. 그래도 ‘부모님 눈을 피해서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싶어요.’가 아니라 ‘절제하는 법을 알고 싶어요.’라고 생각한다는 점이 너무 대견해서 삼삼칠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스스로 고치고 싶다는 마음은 변화의 씨앗이 되거든요.
우선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게임 개발자들은 유저들이 계속 몰입할 수 있도록, 즉 중독성 있게 게임을 설계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해요. 저도 테트리스라는 고전 게임(위에서 떨어지는 블록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게임입니다)에 한참 빠졌을 때에는 교과서 안에 띄어쓰기가 된 모든 부분을 연필로 까맣게 메꾸고 싶은 충동이 들었거든요. 문제는 이 마음을 어떻게 적절히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죠. 어쨌든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고, 게임만 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려면 이유부터 살펴보는 게 필요할 거예요.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을 떠올리는 거죠. 그러면서 어떤 연결고리를 공략하면 좋을지 함께 짚어보면 어떨까요?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거예요. 잠깐 쉬고 싶을 때 편리하게 버튼만 누르면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기도 하고, 성적은 잘 안 오르지만 게임 레벨은 쑥쑥 오르기도 하고, 내 통장에는 돈이 잘 안 쌓여도 게임 세상에서는 코인이나 아이템 같은 것을 쉽게 긁어모을 수 있죠. 현실의 나는 약해도 게임 속에서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휘두르며 날아다닙니다. 다쳐도 아프지 않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지요.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을 때의 쾌감은 중독적이기도 해요. 빨리 다음 판으로 넘어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지요. 종합하자면 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재미와 쾌감, 그리고 현실에서 얻기 힘든 종류의 만족을 경험합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쉽게 얻기 힘든 만족’이라는 점이 중요한데, 이런 만족감을 별 고통 없이 누릴 수 있는 다른 세상이 터치 하나로 열리는 거죠. 우리는 거기에 기쁨을 느끼고 빠져들어요.
물론 게임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꺾이지 않는 도전정신, 노력과 경험치의 중요성, 작전과 협업의 필요성, 인내와 기다림의 미학 (소위 ‘존버’라고 하죠.) 등 게임마다 방식이든 스토리 진행이든 그 안에서 여러분이 성장하면서 깨닫고 줍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하지만 게임 속 세상에서 얻은 것들이 얼마나 현실로 이어지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게임 속의 멋지고 부유하고 강한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괴리가 혹시 여러분을 괴롭히지는 않나요? 현실에서도 빨리빨리 레벨이 올라가고 나를 가로막는 것들을 시원스럽게 처리해 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기에 이 세상이 더 불만족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특히 여러분은 이 세상에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고 관계를 맺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나이가 들면서 실제로 내 앞에 놓이는 ‘퀘스트’들을 깰 수 있는 능력이 생기니까요. 현실에는 매직 포션이나 전설의 무기가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는 골고루 먹고 부지런히 배우며 열심히 운동하고 착실히 관계를 쌓아야 합니다.
현실의 세계가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러울수록 인간은 다른 세계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현실 세계로 눈을 돌리고, 힘들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기를 권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근대철학에서 현대철학으로 넘어가는 문을 연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저는 가끔 니체 이름을 써보는 것으로 셀프 치매검사를 합니다)예요. 물론 1900년에 사망한 니체가 여러분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 게임을 했던 건 아니에요. 니체의 이야기는 조금 더 어렵고 복잡한 배경에서 나왔지만, 현세와 내세 사이의 간극에 주목했던 이 철학자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니체는 천국이라는 가상의 세계에 정신이 팔려 현실 세계에 눈을 두지 않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삶이 고통스럽고 허무하다고 느낄지라도 다른 달콤한 세상을 만들어 거기에서 위안을 찾지 않는 사람, 내 삶을 그대로 긍정하고 책임지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유롭고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현실 세계의 문제는 사실 현실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몸이 약하다면 게임에서 갑옷과 무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잘 먹고 운동을 해서 체력을 키워야지요. 친구 관계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AI를 유일한 친구로 삼는 것보다는, 힘들어도 끊임없이 주변 사람과 부딪히며 경험을 넓혀야 하고요.
스크린 속 세계에 정신이 팔려 종종 현실 세계를 뒤로 놓는 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예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서로 핸드폰만 들여다보기도 하고, 앞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에 집중하기보다 끊임없이 댓글과 ‘좋아요’를 확인하며 인터넷 세상 속의 관계에 집착합니다. 음식이 나오면 더 좋아 보이는 각도에서 요리조리 사진을 찍느라 제일 맛있을 골든 타임을 놓쳐 버리기도 하고요. 스크린 속의 세계는 그저 연출된 일부이거나 심지어 가짜일 수도 있는데, 거기에 질투를 느끼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뉴스에서는 게임에 빠져 아이들을 방치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정신 나간 어른들도 가끔 보여요. 즉, 게임 중독이라며 여러분을 질책하는 어른들도 정작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고 인터넷 중독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중세 시대가 캄캄한 암흑의 시기, 즉 인간의 이성이 꼼짝없이 억압된 시기였다면 현대 사회는 인간의 이성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차단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반짝반짝 휘황찬란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정신이 팔리고 눈부시게 만들어 이성적 사고를 차단하는 거죠. 20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사 사회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어떤 눈부신 현상에 가려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현혹(Verblendung)’이라고 표현했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스크린 속 세계에 현혹되어 진짜 현실 세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세계에 더 집중하며 적절한 균형을 찾을 것인지를 빨리 깨닫는 사람이 결국 후회를 덜 남길 거예요.
게임은 없애 버려야 할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신기하며 상상력 가득한 세상인가요. 뭐든 과한 게 문제지, 잠시 머리를 식히며 구름 위를 뛰어다니고 별을 따먹는 세상이 주는 기쁨을 누리는 게 뭐가 문제겠어요. 게임을 많이 해봐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나중에 관련 산업에 뛰어들 수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을 구별하는 일이에요(‘나는 나입니다’라는 문장처럼 보이는군요).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거예요. 내가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 ‘싸운 친구와 화해할 방법’인지 아니면 ‘보스 몹을 물리칠 전략’인지, 내가 당장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이 ‘내일 있을 시험 대비’인지 아니면 ‘게임 속 승급 미션’인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맞춰 시간을 잘 분배할 수 있다면, 게임을 좀 한다고 손가락질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여가 시간에 마음 편히 하는 게임의 맛과, 숙제도 많고 할 일도 많은데 뒤통수에 언제 엄마 얼굴이 나타날지 불안해하면서 하는 게임의 느낌은 전혀 다르죠. 그러니 나에게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생각해서 순위를 정해 보면 어떨까요?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정말 귀한 것은 시간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대체로 시간이 무한하게 느껴져서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여러분을 만들고 여러분의 삶을 그려갑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루이틀쯤 게임만 하면서 소위 ‘현질’을 하다 여러분의 전재산을 날려도 좋고 방학의 대부분을 스크린 앞에서 보내다 개학 전날 세게 ‘현타’를 맞아도 좋으니, 그런 흑역사를 통해 정말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게임에 대한 생각을 건강하게 정립했으면 좋겠습니다. 책임 있게 주도권을 잡고 즐길 것인지,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 ‘조련’당하며 끌려 다닐 것인지요. 훗날 여러분이 게임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것이 후회보다는 미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이 글은 종종 스마트폰 게임을 하면서 썼답니다.
이모네 철학 상담소는 마지막에 고민 해결을 도와줄 메뉴를 추천하는데, 이걸 고르는 게 늘 어려우면서도 재미있었어요. 이번 글에는 공갈빵을 붙여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