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선 잔들의 이야기
비 오는 오후, 재즈가 잔잔히 흐르는 추석 연휴의 월요일. 괜히 노트북을 열고 몇 자 끄적이고 싶어졌다. 요즘 부쩍 ‘해야지’ 했다가도 금세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 나이 탓만 할 게 아니라 뇌 운동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도 슬쩍 든다.
얼마 전, 우드 손잡이가 달린 예쁜 유리 머그잔을 샀다. 늘 그렇듯 ‘쌍으로’ 사왔지만, 이상하게도 꼭 한 잔은 어느 날 툭— 하고 깨지고 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주방에는 짝을 잃은 컵들, 홀로 남은 잔들이 가득하다. 여행지에서 예쁜 컵을 보면 하나만 사오는 버릇도 한몫했다. “둘이 있어야 더 예뻐요”라고 외치는 판매원의 말에도, ‘혼자 사는데 뭘’ 하며 하나만 데려왔다. 그렇게 내 인생도, 내 컵장도 어쩐지 늘 한쪽이 비어 있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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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들의 속삭임
컵장을 열면, 그 안은 마치 오래된 무도회장 같다. 짝을 잃은 컵들이 조용히 줄지어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얘, 너 짝은 어디 갔어?”
“몰라. 어느 날 사라졌어. 설거지하다 쨍 하고…”
어떤 잔은 의기소침하게 구석에 숨어 있고, 어떤 잔은 깨끗이 씻겨 늘 전면에 자리하며 아침마다 커피 향을 머금는다. 화려한 무늬의 잔은 “나 한때 주인님이 제일 아꼈다구!”라며 과거의 영광을 자랑하고, 무난한 흰색 잔은 “나는 매일 쓰였지, 실용성이 최고야” 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하지만 짝을 잃은 잔들의 눈빛(같은 유리 표면)은 어쩐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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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물컵
이런 컵에 대한 집착은 어릴 적부터 시작된 걸지도 모른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가면, 남자 밥상과 여자 밥상이 따로 있었다. 남자 밥상에는 방짜 유기 그릇에 정갈하게 찬이 담기고, 컵까지 곱게 놓여 있었다. 반면 여자 밥상에는 컵이 없어, 밥을 다 먹고 난 그릇에 물을 부어 마셔야 했다. 그게 그렇게 싫었다. 아마 그때의 서운함이 지금의 ‘예쁜 컵 소유욕’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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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 수집이라는 작은 기쁨
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꼭 예쁜 컵을 사온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그 컵에 따뜻한 차나 커피를 따를 때, 향이 피어오르며 주는 그 짧은 순간이 나의 가장 조용하고 확실한 행복이다.
그런데 오늘, 차를 우리며 문득 생각했다.
‘이 컵, 짝이 있었던 거 아닌가?’
컵장을 열어보니, 그곳은 이미 컵들의 산. 짝을 잃은 잔들이 위태롭게 서로를 지탱하며 쌓여 있다. 예전엔 매일 아침 설렘을 주던 컵들도, 이제는 구석에서 잊혀져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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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찾기 프로젝트
비가 촉촉이 내리는 오후, 나는 결심했다.
“얘들아, 이제 너희 짝 좀 찾아주자.”
컵들을 하나씩 꺼내어 닦고, 짝을 찾아 맞춰보았다. 마치 오래된 연인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중매쟁이처럼. 어떤 컵은 잃어버린 짝을 찾지 못해 슬며시 혼자 남아 있었지만, 그조차도 한때 나에게 설렘을 주었던 소중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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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하며
컵장 정리는 단순한 정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지난 시간, 잊고 있던 기쁨들을 다시 꺼내보는 일이었다. 깨지고, 짝을 잃고,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컵들이 하나둘 다시 제자리를 찾듯, 나도 내 일상 속 소소한 행복들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싶어진다.
언젠가 또 새로운 잔이 들어오겠지만, 오늘은 이 짝 잃은 잔들과 조용히 차 한 잔을 나누고 싶다. “나도 아직 괜찮지?”라며 수줍게 빛나는 잔에 따뜻한 차를 채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