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날들, 작은 존재들의 아우성
2020년 여름, 방학 첫날이다.
방학이라니! 월급쟁이로만 살아온 나에게 '학생'이라는 타이틀도 아직 어색한데, 방학이라니! 혼자서 괜히 설레고 신이 난 방학이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알람이 울렸다. 5시 정각에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몸을 뒤척였다. 회사에 다닐 때의 기상 시각은 보통 5시 30분. 알람 없이도 기계처럼 눈을 뜨던 나였지만, 언제부턴가 8시가 되어도 몸을 일으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중요한 일이 있는 날에는 알람을 맞춰놓고 있다.
"뭐지? 오늘 무슨 일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아무 일이 없는 날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머리맡의 휴대폰을 들었다. 찌푸린 실눈으로 화면을 보았다. 화면에 보이는 선명한 글씨는
라다크로 출발!
완벽하게 잊고 잊었다. 2016년, 2019년에 이어 올해 2020년 여름. 나는 또 한 번 라다크로 갈 예정이었다.
지난해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듣고 들떴던 나는 라다크 여행을 구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항공권 티켓을 수시로 확인하며, 평생 다시 오기 힘들 긴 휴가 동안 오롯이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나고자 했다.
비포장길 오지, 전기도 수도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으로의 떠남. 낯선 곳에서의 날들을 위해 꼼꼼하게 교통편을 확인하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시내 서점을 찾아 여행 코너며, 인문학 코너에서 살다시피 했다. 참고할 만한 서적들을 부지런히 찾아보고, 인터넷 지도를 열어 찾아갈 곳의 지형과 특성을 다시 한번 파악했다. 현지인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최신 정보도 확인하며.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어쩌면 대학원 입학에 버금갈 정도로 신이 났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계획들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언제부턴가 ‘무거운 진실’이 얼마 가지 않아 나를 찾아왔다. 행복한 상상에 가려져 있던 내 눈은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라는 엄청난 벽! 그리고 팬더믹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내 가족과 내 사람들.
스스로의 즐거운 2020년을 계획하고 준비하는데만 바빴던 나를 꾸짖기라도 하듯 행복하지 않은 아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삶은, 어쩜 이렇게 불완전하고 불안한지!
아등거리며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아무리 멋진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도, 당장 지금, 내 옆의 소중한 가족의 일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못난 나였음을 그제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에도 '판타지 영화'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상상 너머의 세상을 꿈속에서 만나는 나이지만, 요즘 나의 꿈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등장인물 또한 가까운 이들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모든 것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가방 속 책, 연필, 식탁 위의 반찬들, 거리에 버려진 망가진 우산, 하늘, 바람, 해……. 내가 놓치고 있던 세상 만물들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듣지 않고 있었는지, 알려주기라도 하듯. 서로 앞다투며 나에게 소리를 냈다.
엄청난 아우성! 요란한 소리에 귀가 얼얼했다. 긴 숨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아우성의 이야기를 천천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지금 하지 않으면 희미해지고 퇴색해져 언젠가는 잊힐 나의 부질없는 기억력에 의지할 수 없으니. 나에게 말을 거는 모든 존재들과 순간의 감정들을 어디에라도 남겨보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