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유리창 1>
“마지막으로 인사드려야지.”
이제는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일본 순사 놈들이 쳐들어 와서 ‘이년아 남편 내놓으라’며 소리를 질러도 내가 눈도 깜짝 안 했다. 오금이 저리고 심장이 벌렁벌렁했는디 겉으로는 티를 한나도 안 냈다. 내가.”
작고 야윈 몸에서 나오는 당당하고 또박또박했던 목소리. 할머니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앞에 누워있는 할머니는 너무도 낯설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뽀얀 분가루와 살굿빛 립스틱이 발라져 있었다. 참 고왔다. 살포시 감은 눈과 꼭 모은 입술은 너무도 편안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일어나실 것처럼.
할머니의 얼굴을 만졌다. 온몸에 염을 했으니 손을 대지 말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하늘로 돌아간 온기는 할머니의 몸 어느 곳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두 볼을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졌다.
“하…할…할머니.”
꾹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엄마를 위해, 아빠를 위해 꾹꾹 누르고 눌렀던 눈물이 감당할 수 없이 쏟아져버렸다.
할머니는 두 손으로 우리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를 비비는 것을 좋아하셨다. 이마부터 두 볼을 번갈아가며 당신의 살에 맞대며 “이뿐 내아 강아지” 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저 작고 보드라운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이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시겠지만. 나는 최대한 가까이 할머니 몸에 나의 몸을 기댔다.
하…할머니
사랑해…진짜 진짜 사랑해.
가장 추운 곳에서 가장 뜨거운 고백이었다.
이후로 할머니는 꿈속에 찾아오셨다.
어떤 날은 즐겨 입으셨던 연보랏빛의 하늘거리는 주름치마에 하얀 단화를 신으시고. 어떤 날은 어린 시절 우리가 함께 모여 살던 한옥의 마루에 앉아 할머니 무릎에 누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또 어떤 날은 마당에 놓인 대나무로 만든 평상에서 된장과 참기름에 고소하게 조물조물 버무린 고구마순 나물을 놓고 “아가, 어서 와. 얼릉와서 밥 묵어.” 손짓하며 학교에 다녀온 내 가방을 받아 들어주시기도 한다.
한동안은 장례식장에서의 마지막 모습만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목이 메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 형제들은 누구보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런 만큼 추억할 수 있는 감사한 순간들이 참 많았다.
먼저 떠나보낸 자식을 떠올리며 외롭고 참담한 심정을 황홀하다 노래했던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 1>을 읽다, 나의 할머니가 몹시 생각났다.
삶과 죽음의 이별로 누군가의 가슴에 별이 되어버린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의 남은 생에 물먹은 별이 되어버린 그들을 추모하며, 이 밤도 유리창 앞에 서 있을 남겨진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리창 1』
- 정지용(1902.6.20 ~ 1950.9)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불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꼭 한 번 들르고 싶은 곳이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이다. 윤동주, 정지용 두 시인의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나는 아마도 그 근사한 교정을 거닐다 눈물을 뚝뚝 흘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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