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둥지
아빠랑 둘이 있지. 집이야.
멀리 떨어져 있는 딸은 추석날 오후가 되어서야 늦게 전화를 건다. 벨소리에 멀리서 뛰어 온 건지, 숨이 찬 엄마의 목소리에는 반가움도 가득하다.
"오구오구 우리 꼬맹이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어제도 들었으면서 엄만!"
"매일 들어도 좋아. 하루 종일 들어도 좋아."
소녀 같은 엄마 덕분에 깔깔 웃는다. 한국은 내일(22일)까지 추석 연휴, 세 아이를 데리고 오빠는 이제 처갓집으로 향했다. 보통의 명절 때 같으면 오빠네 다섯 식구가 떠난 텅 빈자리를 나와 남편이 대신하고 있을 시간이다. (내가 결혼을 한 후로는 오빠네 식구와 한 자리에 모여 추석 연휴를 보내기 어려워졌다.)
손주들 손을 잡고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는 이야기. 산소 한쪽에 심어 놓은 밤나무에는 알밤이 가득 열렸다는 이야기. “너도 밤 좋아하는데,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이 아까운 걸 다 어떡하니. 삼 남매(조카들)가 키가 참 큰 것 같아. 지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 하나 같이 날씬하고 길쭉길쭉 해.” 엄마의 어제오늘 있었던 추석 현지 중계는 한참 동안 계속됐다. 그러다 뜬금없이.
"밤나무 근처에 풀이 많더라. 참... 니가 피부가 워낙 약해서... 작년엔 너를 괜히 밤 밭에 데려갔다가 고생시켰네. 지금은 괜찮지? 어디 아픈데 없지? 넌 모기 물려도 유난스럽게 부어서 참... 조심해. 아프면 바로 병원 가고."
이야기의 마무리는 결국 내 걱정이다. 모기 물린 게 뭐가 큰 일이라고 당신의 으스러진 뼈마디 보다 엄마는 딸이 가려워서 밤잠 설칠까 걱정이다.
"그러게 힘든데 뭐하러 이렇게 많이 낳았어요. 친구들 중에 형제가 다섯 명인 사람은 나 밖에 없어. 셋도 많아 요즘엔!"
철없던 시절,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서 집안일을 하고, 네 개나 되는 언니 오빠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엄마를 보며 말한 적이 있다. 하루 수면 시간은 길어야 네 시간. 엄마는 언제 잠을 자고 언제 쉬는 걸까. 엄마의 삶이 답답하고 속상했다. 그때를 회상하면 돌아오는 엄마의 말.
"그래도 니들 얼굴 보면 힘이 났어 그땐. 그러니까 살았지. 그러니까 살아졌지."
우리가 한 집에 살던 그 때나 지금이나 엄마의 하루는 여전히 바쁘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집안일을 하고, 텃밭에 나가고, 독거어르신을 돌보고. 재잘대는 자식들은 제 삶을 찾아 떠났지만, 엄마의 둥지는 여전히 엄마를 필요로 하는 일들로 꽉 차 있다.
그러던 엄마가 장마가 시작되기 전 6월, 가족 '밴드' 게시판에 사진 몇 장을 올렸다. 엄마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고 했다.
"우리 강아지들처럼 제비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네. 그런데 오늘은 두 마리가 잘 안 보여. 두 마리도 멀리 해외에 갔나 봐."
아이쿠! 우리 엄마 멀리 있는 딸내미들을 얼마나 울리려고. 안 그래도 눈물 많은 둘째 언니가 이 글을 보면 또 펑펑 울겠지 싶었다. 딸 둘을 멀리 떠나보내고 늘 마음으로 걱정하며 기도하는 엄마. 어미 제비가 물어오는 먹이를 향해 기를 쓰고 입을 벌리며 울어대는 새끼 제비를 보며, 엄마는 우리를 생각했단다. 기특한 제비들이 우리 엄마에게 자식들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제비 가족도 별 탈 없이 올여름 잘 보낼 거예요 엄마. 요놈들 괜히 집을 지어서 똥 치울 일거리 만들었다고 괜히 밉상이었는데… 저희 다섯처럼 엄마 사랑받고 잘 크고 있다니 측은하네요."
오빠도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평소 말이 없는 오빠가 제법 긴 답글을 남겼다. 이 글을 쓰며 오빠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오빠도 우리가 떠나 온 엄마의 둥지를 떠올리고 있었을까. 나처럼 또 울고 그러진 않았겠지.